2014년도에 발간한 스팁로키 회지입니다.

'만약, 캡틴아메리카가 70년대에 깨어났다면?' 이란 주제로 쓴 IF물.




The deep BLUE sea 上

(Steve Rogers X Loki) 

 

 

 

 

 

 

 

 



 


1


 

 

 

 

 

  

1970년 12월 18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발키리호가 그린란드의 빙산아래에서 발견되었다스타크사의 CEO인 하워드 스타크는 기자회견을 통해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웅 캡틴아메리카가 25년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살아있다고 발표했다이 놀라운 소식은 미국 전역을 들끓게 만들기 충분했다.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 등 유명 일간지의 1면은 물론이며 라디오와 텔레비전 쇼할리우드의 영화까지 모든 언론에서는 영웅의 귀환’ 이란 제목으로 캡틴아메리카에 대해 다루었다월스트리트 저널만이 미국의 주가상승에 대한 예측 기사를 썼을 뿐이었으나 그 또한 모두 캡틴아메리카의 귀환덕분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영웅의 귀환은 미국에 수많은 변화를 일으켰다인플레이션과 연이은 주가폭락으로 인해 예측되던 제 2의 경제 대공황을 벗어날 수 있던 것은 물론소련과의 군비경쟁에서 간신히 우위를 점하던 미국은 그 격차를 벌려놓는데 성공했다.


특히나 전쟁영웅의 등장으로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공화당이었다길어지는 전쟁 때문에 곤두박질치던 닉슨대통령의 지지율을 단숨에 치솟게 했고 캡틴아메리카를 베트남으로 파병해 전쟁반대론자들의 여론을 불식시켰기에 닉슨대통령의 재임이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캡틴아메리카또 다시 미국을 구해낸 영웅이었다.

 



 


2

 

 

 

 

 

 

 

마리아 스타크라네.”


눈을 뜨자 잘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가 나를 향해 말했다폭탄을 실은 비행선이 뉴욕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린란드에 불시착을 시도 한 것이 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그리고 지금은 낯선 곳에 누워있었다얼떨떨하기만 해 멍하니 상대방을 쳐다보자 그런 나의 반응에 과장된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내 부인 이름이 마리아란 말일세마리아 스타크자네가 그랬지나는 평생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할 거라고?”


그제야 나는 눈앞의 남자가 하워드 스타크라는 것을 알아챘다기억 속 하워드 스타크’ 보다 더 깊게 패인 주름과 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있었고 입가에 걸려 있는 특유의자신만만하다 못해 종종 오만하다고까지 느껴지던 미소를 가진 것은 여전했다.


좋아기억력에는 문제없는 것 같군그럼 나한테 빚진 10달러도 잊지 않았겠지?”


그의 말에 예전에 지나가듯 한 내기가 떠올랐다당시에도 무례한 내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가 먼저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했던 것이 먼저였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워드가 결혼을 할지 안할지에 관한 내기를 했었다이것으로 그가 하워드 스타크라는 것을 확신했다방금 깨어난 사람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할 만큼 뻔뻔한 이는 내가 알기로는 하워드뿐이었다그래도 그의 행동이 나름의 배려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놀랍군이 내기는 내가 이길 줄 알았는데.”

“25년이나 흘렀으니까덕분에 나한테 빚진 10달러의 이자가 제법 된다네그러니 내 돈 내놓으시지.”


하워드의 재촉에 나도 모르게 바지주머니를 뒤져보지만 손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게다가 이제 보니 입고 있는 옷도 내 것이 아닌 가벼운 운동복이었다내가 난색을 표하며 나중에라도 꼭 갚겠다고 말하자 하워드는 기다렸다는 듯 두꺼운 파일 몇 개를 내게 던져주었다.


융통성 없는 건 여전하네그 말 잊지 말게나이제 자네는 부자야나보단 아니지만.”


파일 안에는 내가 전쟁영웅으로 인정되어 대위(captain)에서 소령(major)으로의 진급명령이 적힌 서류와 전쟁 당시 지급되었던 채권들의 높아진 가치에 관련한 보고서들이 몇 장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종과 고아였던 덕분에 가지고 있던 채권들과 연금이 내 명의의 연방은행에 고스란히 잠들어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하워드는 격렬한 반응을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저 “0이 많군.” 이라고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내 말에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하워드가 콧수염이 흔들릴 정도로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그런 하워드를 보며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다한참을 웃고 나서야 하워드가 이번에는 작고 네모난 상자를 흔들며 말했다.


자네가 잠들어있던 동안 일어난 중요사건들을 모아봤지비디오테이프라는 건데 영사기 없이도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네.”


그의 과학적인 설명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집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하워드는 열정적인 선생처럼 1970년까지의 역사나에게는 미래인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달을 걸었고 마틴 루터킹이라고 대단한 흑인이 있었지덕분에 이제 흑인과 백인이 결혼 할 수 있어좋은 일이지그리고 한국전쟁이 있었고 지금은 또 다른 전쟁이 한창이라네.”


한참을 줄줄 쏟아내던 하워드는 숨을 골라내더니 다른 서류파일을 꺼내들었다처음에 내밀었던 것 보다는 얇았지만 앞면에 써져 있는 이름을 읽은 순간 나는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마지막으로이게 자네가 가장 궁금해 하는 일이겠지페기카터 는 장군(General)이 되었다네최초의 여성장군이야.”


항상 그리워하던 그녀의 소식이었다스타크에게는 미안하지만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그녀페기카터였다그녀가 지금은 장군이 되었다니그녀가 지니고 있던 강인함이나 능력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었지만 내심 놀라웠다훌륭한 군인에 있어 남녀는 상관이 없음을 그녀가 증명한 것이다그녀야말로 하워드가 만들어 준 비디오테이프를 보지 않아도 시대가 점점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훌륭한 증거였다.


지금은 두 아들의 훌륭한 어머니이자 좋은 아내라네.”


파일 안에는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가족사진도 함께 있었다조금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페기와 부부를 반반씩 닮은 아이들그녀 옆에 꼭 붙어있는 남편까지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이상적인 가족처럼 보였다나는 파일을 덮고 애써 말을 돌렸다.


그보다 자네는 어떻게 지냈나?”

이제 유부남이지만 여전히 잘나가는 천재 무기개발업자이자 세계최대의 무기상이지.”

이상한 엑스포를 열던 취미는 버렸고?”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하워드는 입술만 끌어올린 미소를 보여주었다그를 안 뒤로 처음 보는 서글픈 얼굴이었다조금 전만해도 패기 넘치던 청년의 얼굴은 순식간에 쇠락의 길에 접어 든 중년의 얼굴로 변모했다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피어올라 재만 남은 열정이었다나는 그에게 많이 변했다고 해야 할지 여전해야하다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 * *



 

맨하탄의 빌딩 하나를 내주겠다는 하워드의 제안을 뿌리치고 브루클린의 작고 아담한 집을 골라 이사를 했다그의 호의는 고마웠으나 전구 하나까지 최신식으로 설계 되어있는 하워드의 빌딩은 불편하기만 했다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요즘 물건들에 영 익숙해지지가 않았다내가 잠들어있던 사이에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청소기세탁기의 발명으로 사람들이 할 일은 줄어들었고 컬러텔레비전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전쟁 전 즐겨보던 영화 몇 편이 떠올랐다화려하기는커녕 흑백에 조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직까지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런 옛날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나 또한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방안에 들어서자 낡은 건물의 냄새가 났다삐걱거리는 마룻바닥과 구식 라디에이터가 뿜어내는 열기에 마음이 편해졌다마음이 편해지자 피곤이 몰려왔다나는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그러나 다시 잠이 드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다잠은 이미 충분히 자두지 않았던가.


지난 25년간 끊임없이 꿈을 꾸었다버키와 놀던 어린 시절 꿈이나 레드스컬과 싸우는 꿈을 꾸기도 했다때로는 페기와 춤을 추기도 했다토요일 저녁의 스토크 클럽(stork club) 안은 종전의 기쁨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붐볐고 페기는 약속대로 나에게 춤을 가르쳐주었다어설픈 춤 솜씨에 그녀의 발을 몇 번이나 밟아도 그녀는 상냥하게 웃었다페기의 리드에 따라 블루스를 추었다곡이 끝나면 그녀는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날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말에 그제야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나는 여전히 깊고 차가운 바다 아래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그 꿈은 너무 달콤했지만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너무 잔인했다나는 아직도 자고 일어나면 지금 이순간이 꿈일까 무서웠다.






3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와 동시에 샴페인을 터트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새해 축하인사를 건넸다거리는 새해를 맞이하여 터지는 폭죽을 구경하는 가족들과 서로 껴안고 키스하는 연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미국은 전쟁 중이었지만 사람들은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보다는 지금 당장의 평화를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새해에도 행운이 있기를 빌게요로저스 대령.”


뒤를 돌아보자 감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린 페기 카터가 서 있었다눈가와 입가의 주름이 무색할 만큼 그녀는 여전히 우아하고 매력적이었다그녀를 공식석상이 아닌 곳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그녀를 향해 경례를 했다.


카터 장군님.”


격식을 갖춘 인사에 그녀는 살짝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경례가 아니라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받아주었다나는 실례를 범했다고 느끼며 다시 악수를 청해야하나 고민했지만 결국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나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해 그녀의 옷차림을 칭찬했다.


그런 로저스대령은 오늘도 군복을 입으셨군요.”

사실솔직히 말하자면 옷을 입는 것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페기는 나의 어설픈 변명을 쳐낼 만큼 모진 사람은 아니었다나의 장단에 맞추어 애써 활발한 척나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잡아주었다.


예전부터 당신 옷차림은 제 취향이 아니었죠."


그녀의 말에 시무룩한 얼굴을 지어보이자 페기가 웃음을 터트렸다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페기는 연회장 한가운데에 서있는 하워드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스타크씨는 당신은 벗고 다니는 게 낫겠다고 말했었죠.”


하워드와 페기는 좋은 친구이자 나의 옛 모습을 동시에 추억하고 있던 동지였다지금은 장군과 무기거래상으로 여전히 돈독한 관계였지만 그 밑바탕아래에는 아직도 친애적인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그들의 얼굴을 보니 예전 페기와 하워드의 사이를 오해했던 일이 떠올라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때는 어리고 어리석었기에 질투에 눈이 멀어 부끄러운 짓을 했었다하워드와 자신과 페기순간 25년 전의 그 날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아니요저도 이제 많이 늙었는걸요.”


페기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녀의 미소는 예전 그대로였다강인한 부드러움곧고 정직한 마음가짐외양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그 이상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웃음을 본 순간그녀에 대한 감정이 세월이 지나 옅어지기는커녕 더욱 공고해졌음을 알아차렸다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만약 발키리에 마지막까지 타고 있지 않았었다면 어쩌면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헛된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페기늦었지만 그때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지켜도 될까요?”


충동적인 감정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페기의 손을 잡았다페기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뿌리쳤다그러나 그 행동에 놀란 것은 도리어 페기인 것 같았다페기는 잡혔던 손을 감싸 쥐며 황급히 뒤로 감추었다방안에 갑작스러운 침묵이 찾아왔다허탈감과 상실감이 소용돌이 쳤다그녀와 나 사이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하워드가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어요저는 이만.”


그녀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채 감추지 못하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이미 당시의 약속은 흩어져 없어진지 오래였다나는 문득 그녀와 춤을 추던 꿈이 그리워졌다.




* * *

 



하워드를 따라 연회장 한견에 따로 마련 된 방안에 들어서자 매캐한 담배연기가 코끝을 찔렀다무리지어 있는 남자들은 끊임없이 시가를 피워댔고 하워드 또한 자연스럽게 탁자 위에 놓인 시가를 입에 물었다시가를 피우지 않은 것은 나만이 유일했다.


신문이나 TV에서 보던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지만 담배연기가 장막처럼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 확신할 수는 없었다.


캡틴아메리카이거 영광이로군자네를 만나게 되다니.”


몸이 다부진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 짐짓 친근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것은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미소 짓고 있는 얼굴과 별개로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노련한 사냥꾼을 떠올리게 했다그를 보며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워드는 남자를 미스터 피어스라고 불렀다공화당의 중추적인 인물로 나도 몇 번 들어본 이름이었다금세 그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피어스는 나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인사를 시켰다마치 예전의 춤추던 어릿광대 원숭이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그런 생각들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피어스는 한숨 돌리자며 나를 발코니로 데리고 갔다사람을 다루는데 능숙한 남자였다.


며칠 전 대통령님을 만났었지어떤가자네가 본 대통령님은.”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내가 만나 본 대통령은 전쟁에 대하여 반대했지만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을 했다물론피어스의 질문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그날 대통령은 나에게 넌지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대한 나의 의중을 물어봤다국민들은 캡틴아메리카가 직접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기를 원한다던 말에 당시에는 즉답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일지도 몰랐다어차피 잠에서 깨어난 뒤 하는 일은 대부분 라디오와 방송을 통해 청년들의 입대를 요청하는 것이었다예전에도 비슷한 일을 했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은 25년 전에도 안전한 후방보다는 나가서 싸우는 것을 원했던 터였기에 생각이 많아지던 찰나였다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있을까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피어스는 품안에서 시가를 하나 더 꺼내든 뒤 불을 붙였다.


자네도 하나 하지?”


피어스가 시가를 권유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혀를 찼다.


저 히피족들을 보게나저러니 전쟁에 이길 수 없지 않은가.”


피어스가 가리킨 곳에는 긴 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무리들이 있었다그들의 손에는 대부분 기타와 전쟁반대 피켓이 들려있었다전쟁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베트남의 선제공격에 선량한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고 군사독재에 의해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면 우리는 전쟁을 해야만 했다지난 날 레드스컬의 손아귀에서 사람들을 구해냈듯 말이다.


우리에게 자네가 필요하네조국을 위해 자네가 한 번 더 나서주길 바라네!”


피어스는 내 어깨를 붙잡았다좀처럼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 지리멸렬한 싸움을 끝내 줄 전쟁영웅을 원했다무엇보다 조국이 자신을 원했다그보다 더 큰 동기는 없었다.

 





4

 

 

 

 

 

 


베트남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맞이한 것은 가만히 있어도 숨 막히는 더위와 그보다 더 뜨거운 군인의 환영인사였다그들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앞 다퉈 나와 나에게 사인을 요구하는 이도 많았다나는 군인이었지 유명인사가 아니었기에 거절을 하고 싶었지만 내 뒤를 따라오던 공보장교가 속삭였다.


아버지 세대의 영웅이자 어린 시절의 영웅인 당신이 그 모습 그대로 눈앞에 나타났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승리를 거머쥔 듯 환호했다미국인만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다양한 국가에서 모인 다양한 인종을 보니 코만도즈 대원들이 생각났었다인종과 국가는 달랐지만 옳은 정의를 위해 함께 싸웠던 아군은 예나 지금이나 든든한 존재였다그들의 존재에 나는 당장이라도 전쟁에서 이길 것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랬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지 않아 무참히 꺾였다상상했던 것보다도 베트남은 무더웠고 한낮이면 몸은 불덩이처럼 느껴지고 아무 생각도 못할 정도로 머릿속까지 뜨거워졌다그저 서 있기만 해도혹은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내리쬐는 뜨거운 햇볕 속을 암담한 마음을 안고 억지로 걷곤 했다계속 되는 더위와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들에 우리는 점차 지쳐만 갔다무엇보다도 제일 최악이었던 것은 조국에서 들려오는 전쟁반대시위에 대한 소식이었다부정적인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나조차도 맥이 빠졌기에 부대에서의 신문과 라디오를 금지했다.




* * *



 

남자를 만난 곳은 전쟁의 한복판이었다사방에서 울리는 폭음과 그 폭음에 파묻힌 비명소리들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그 지옥 같은 곳에서 남자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운 얼굴로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등줄기로 긴장감 때문에 배어 나온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햇빛이 온 몸을 꿰뚫어 더위 때문에 옆구리와 목덜미에 땀이 배어나오는 와중에 등에 흐르는 땀은 그런 것들과 종류가 다른공포나 불안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남자는 6피트는 넘는 듯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가냘픈 느낌을 주었다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목덜미까지 내리덮은 장발을 하고 뺨이 옴폭 패인 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상한 것 투성이었지만 무엇보다 기이했던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그 깊고 짙은 녹색의 눈동자를 마주보는 순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암흑의 세계에 홀로 버려져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순간 혼란에 빠져 어슴푸레한 불안에 휩싸였다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그의 등장에 주목을 하거나 의문을 갖지 않았다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그는 유령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아니면 환상일까어쩌면 수퍼세럼의 부작용일지도 몰랐다어떤 것이 되든지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잔뜩 경계하는 나를 아랑곳 하지 않고 남자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녕다시 만나서 반가워내 이름은 로키야.


그 손을 잡은 순간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존재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로키는 실재했고 그 생각이 착각인 것 같지는 않았다나는 조용히 그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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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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