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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ep BLUE sea 下

2018. 6. 9.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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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ep BLUE sea 中

글/긴 2018. 6. 9. 17:47

 2014년도에 발간한 스팁로키 회지입니다. 

'만약, 캡틴아메리카가 70년대에 깨어났다면?' 이란 주제로 쓴 IF물.




The deep BLUE sea 中

(Steve Rogers X Loki) 

 

 

 

 

 

 

 

 



 


4


 

 

 

 

 

  

전쟁은 계속 되었다로키는 언제어디에서나 존재했고 갑자기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나기를 반복했다나는 이 기묘한 동거인에 대해 익숙해져갔지만 전쟁은 그렇지 못했다.


이미 한 번의 전쟁을 치러봤으니 이제 전쟁에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으나 베트남전은 전혀 다른 종류의 전쟁이었다무기도 달랐지만 무엇보다 상대가 달랐다베트남에서 만난 적들은 레드스컬의 군대보다 더 무시무시했다그들에게 최신식 무기는 없었지만 길에서 만나는 모두가 적이 될 수 있었기에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젊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나 노인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폭탄을 짊어지고 달려들었다순박하게만 보였던 사람들이 돌아서면 등에 칼을 꽂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무엇보다 용서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행동이었다무고한 민간인들을 방패로 삼아 위협했다그들의 비열한 방식은 우리 모두를 질리게 했고 끝내 나에게도 큰 상처를 입혔다그들이 성공한 것이었다.



 

* * *



 

막사로 돌아온 나는 손에 물든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내가 잘 아는 소녀의 피였다소녀는 연합군에게 호의적이었던 이장의 손녀였다이제 막 열일곱이 되었는데 부대원들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그녀가 가르쳐준 베트남어는 제법 쓸모가 있었기에 나는 간간히 소녀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었다부대원들은 소녀를 나의 현지처 정도로 생각한 듯 놀리곤 했다짓궂은 놀림에 얼굴을 붉히던 소녀가 나에게는 여동생처럼 느껴지기만 했다그랬기에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처음 보는 죽음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반군에게 잡혀 억지로 다이너마이트 조끼가 입혀졌을 때의 모습은 결코 쉽게 잊혀질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과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정당하다.(All´s fair in love and war) 좋은 말이야안 그래?

내가 알던 전쟁은 이런 게 아니었어!”


나는 로키에게 소리치며 분노를 터트렸다그는 마치 죽음의 신처럼 전쟁터를 쏘다니며 사람들의 죽음을 기꺼워했다몇 번이나 그에게 그러지 말아달라며 부탁했으나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이런 참혹한 상황에서조차 태연한 그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불쌍한 캡틴아메리카.


로키의 가느다랗고 섬세한 손이 내 눈물을 닦아주고 나서야 내가 언제부터인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불쌍하고 미욱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얼굴이 나에게로 불쑥 다가왔다심해를 닮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로키는 나를 위로하려는 듯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 곳곳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해주었다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내 눈물을 핥았지만 나는 거절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눈물만 흘렸다.


 


* * *



 

여전히 전쟁은 계속 되고 있었지만 나의 전투는 끝이 났다본국으로 귀환하라는 통지서를 받아든 뒤 겁쟁이처럼 안도감을 느꼈다한시라도 빨리 이 악몽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6

 

 

 

 

 


 

반년 만에 다시 찾아 온 조국은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보다 더 낯설게만 느껴졌다길어진 전쟁에 여론은 반년전과 판이하게 달라져있었다신문이나 라디오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제멋대로 떠들어댔다독립기념일이었지만 기념일을 축하하는 이들보다는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거리행진이 더 눈에 띄었다그들 중 하나가 다가와 나에게 전단지를 주려고 다가왔다다리 한쪽은 없었고 양팔의 피부 모두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그는 나에게 전단지를 내밀며 말했다.


이게 다 망할 놈의 고엽제 때문이죠.”


나는 도망치듯 그 거리를 벗어났다고엽제의 사용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당시 미로 같은 숲의 지형을 파악하기도 전에 게릴라들은 공격을 했고 나무들은 적의 몸을 숨겨주는 방패였다나와 부대원들은 나침반을 잃어버린 여행객들처럼 숲 속 이곳저곳을 헤매다 간신히 본부로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빌어먹을 놈의 나무들모두가 나무만 없어지기를 바래왔다그랬기에 정부에서 비행기로 고엽제를 뿌린다고 했을 때 우리는 모두 기뻐했었다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동료들이 피부를 벅벅 긁으며 기침이 잦아져도지나가던 여자들의 품에 안긴 아기의 기형적인 팔다리에도 자신은 몰랐다그것이 사람들을 좀먹는 독약인줄 정말로 몰랐다.


정말 몰랐어스티브?


언제나 그랬듯이 로키는 슬며시 나타나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로키가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렀다상냥함에 울분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변명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정말로 몰랐어그들을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어.”

그래당신은 몰랐겠지그들이 원했던 것을 주었겠지.


로키는 교활한 앵무새처럼 말을 되풀이하며 나를 놀리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왔다고 말해도 믿지 않았어!”


로키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보는 얼굴로 혀를 찼다.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지 않아그것은 그들의 본성이 아니야.

사람들은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전쟁은 끔찍해누구나 아는 사실이지하지만 계속 반복되지예전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듯 말이야.


로키는 예전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듯 나의 입술에 키스했다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이 끔찍하게 느껴졌지만 반대로 그것이 얼마나 유혹적이고 감미로운지 차마 떨쳐낼 수 없었다그의 손길을 뿌리치기는커녕 그의 얼굴을 잡고 키스에 응했다.


전쟁이 있는 한 사람들은 너를 원할 테지.


끔찍한 말이었다그리고 너무 듣고 싶은 말이었다나는내가 너무 끔찍했다.


당신이 깨어나서 전쟁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을 때사람들이 아직도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로키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그의 입을 막고 목을 조르고 싶었다그러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기쁘지 않았어?


나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화가 났다머리를 부여잡고 최대한 힘을 쥐어짜내어 간신히 말했다.


제발사라져

고지식하긴.


로키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자취조차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졌다방안에 나만이 홀로 남았다.






7

 

 

 

 

 

 

 

군사재판에 회부한다는 명령서를 받아든 뒤 나는 S.H.I.E.L.D 에 가기로 했다페기와 하워드가 만든 조직이었으며 이번 베트남 전쟁의 주축이 된 곳이었다물어볼 것이 너무 많았다그들이라면 내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대체 이 기사들은 뭐야어떻게 된 일이야?


나는 가판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사온 신문다발을 그들에게 내던지듯 펼쳤다제대한 군인들의 열악한 처우나 민간인에게 자행 된 가혹행위고엽제로 인한 피해사례들비인간적인 행위윤리에서 어긋난 참상


사진은 대부분 참혹했다한눈에 보아도 피해자들이 군인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처음에는 베트남군대에서 자행된 범죄행위인줄 알았으나 나 또한 참전한 군인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이뿐만이 아니었다베트남전쟁을 발발시켰던 통킨만 사건이 사실은 미국의 조작이었다는 증거가 밝혀지고 있었다


나에게 설명을 해줘야지나를 그곳에 몰아넣었으면서!”


나의 질문에 그들은 답하지 못했다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가혹한 비난에 어쩔 줄 모르는 듯 보였다페기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감추듯 쓸어내리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모두 사실입니다절 경멸해도 좋아요.”


확인사살과도 같은 말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맸다지금까지 정의라고 확신했던 일들이 모두 살인행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당장 이 모든 것들을 멈춰야 했다.


불쌍한 친구들의 얼굴을 보라지너에게 부끄러워하는 모습 말이야하지만 너도 그리 좋은 사람만은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할 텐데.


로키는 혀를 차며 비아냥댔다로키의 말대로 나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대공황의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살아왔으며 전쟁에서 크고 작은 전투들을 수없이 치러왔다생사를 넘는 일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만들었다성경의 십계명 중 반 이상은 어겼을 것이었다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었다그러나 단 한 번도 내 안의 기준이 되던 신념이나 정의가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자네가 모르는 게 있어!”


하워드가 다급하게 나를 뒤돌아 세웠다.


우리는 자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믿었어헌데 발굴 작업에는 돈이 아니라 군대의 힘이 필요했어베트남 전쟁 덕분에 페기는 장군이 되었고 덕분에 자네를 찾을 수 있었어우리는 타협을 해야만 했다네.”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해라는 말이군그렇다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어타협이 타락이 되었는데!”


나는 씹어내듯 말했다그들을 믿었었고 그들은 나의 선택을 믿어 줬어야했다이럴 거였으면 깊은 바다에서 끌어내질 말았어야 했다나는 처음으로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에 후회했다.


세상에는 절대 변하지도 변해서도 안 되는 일이 있어!”


지금까지 나를 슬프게 쳐다보던 페기는 입술을 한번 꾹 깨물고는 천천히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세상은 변했어요저도 더 이상 당신이 알던 페기카터가 아니고 당신만이 변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에 머리부터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세상은 빠르게 변해갔고 자신은 도태되고 있었다그녀의 말이 정답일지도 몰랐다나를 쳐다보는 페기의 눈길이 느껴졌다그녀는 나를 낯선 것을 대하듯 나를 보고 있었다.


많은 일이 일어났다네스티브많은 일이.”


스타크 또한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젊은 과학자가 아니었다호기심으로 빛나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이 시커멓게 죽어있었다희끗희끗해진 머리나 세월의 풍파가 그의 육신만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 마모시킨 것을 알아차렸다두 번의 전쟁은 사람을 어떻게 황폐화 시켰는가나는 아주 조금 뒤늦은 것뿐인데 사람들은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자신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변했고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것을 이제는 모두 틀리다고 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재빠르게 달아났다.

 



* * *




스티브재판 말일세.”


나는 하워드의 방문을 거절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문 앞에 서서 말을 이어갔다.


그들은 캡틴아메리카의 입으로 직접 베트남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답을 듣고 싶은 거야자네는 이 전쟁이 옳았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거네.”


하워드의 목소리는 절박해보였다이번 전쟁의 책임자는 그 둘이라는 것을 나 또한 알았다.


하워드옳은 전쟁이란 건 어디에도 없다네.”

우리를 위해서 모르는 척 해줄 수는 없는 거야?”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폭죽이 요란하게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은 어둠을 찢어냈다성조기가 눈에 들어왔다미국의 가치는자신이 배워오던 신념은자신이 지키려던 것은 무엇이었나자신의 고국영원한 정의의 수호자기회의 땅그 모든 것들이 미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그러나 지금은지금은 어떻게 된 거지외로움이 한 가득 입안에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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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

2014년도에 발간한 스팁로키 회지입니다.

'만약, 캡틴아메리카가 70년대에 깨어났다면?' 이란 주제로 쓴 IF물.




The deep BLUE sea 上

(Steve Rogers X Loki) 

 

 

 

 

 

 

 

 



 


1


 

 

 

 

 

  

1970년 12월 18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발키리호가 그린란드의 빙산아래에서 발견되었다스타크사의 CEO인 하워드 스타크는 기자회견을 통해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웅 캡틴아메리카가 25년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살아있다고 발표했다이 놀라운 소식은 미국 전역을 들끓게 만들기 충분했다.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 등 유명 일간지의 1면은 물론이며 라디오와 텔레비전 쇼할리우드의 영화까지 모든 언론에서는 영웅의 귀환’ 이란 제목으로 캡틴아메리카에 대해 다루었다월스트리트 저널만이 미국의 주가상승에 대한 예측 기사를 썼을 뿐이었으나 그 또한 모두 캡틴아메리카의 귀환덕분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영웅의 귀환은 미국에 수많은 변화를 일으켰다인플레이션과 연이은 주가폭락으로 인해 예측되던 제 2의 경제 대공황을 벗어날 수 있던 것은 물론소련과의 군비경쟁에서 간신히 우위를 점하던 미국은 그 격차를 벌려놓는데 성공했다.


특히나 전쟁영웅의 등장으로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공화당이었다길어지는 전쟁 때문에 곤두박질치던 닉슨대통령의 지지율을 단숨에 치솟게 했고 캡틴아메리카를 베트남으로 파병해 전쟁반대론자들의 여론을 불식시켰기에 닉슨대통령의 재임이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캡틴아메리카또 다시 미국을 구해낸 영웅이었다.

 



 


2

 

 

 

 

 

 

 

마리아 스타크라네.”


눈을 뜨자 잘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가 나를 향해 말했다폭탄을 실은 비행선이 뉴욕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린란드에 불시착을 시도 한 것이 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그리고 지금은 낯선 곳에 누워있었다얼떨떨하기만 해 멍하니 상대방을 쳐다보자 그런 나의 반응에 과장된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내 부인 이름이 마리아란 말일세마리아 스타크자네가 그랬지나는 평생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할 거라고?”


그제야 나는 눈앞의 남자가 하워드 스타크라는 것을 알아챘다기억 속 하워드 스타크’ 보다 더 깊게 패인 주름과 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있었고 입가에 걸려 있는 특유의자신만만하다 못해 종종 오만하다고까지 느껴지던 미소를 가진 것은 여전했다.


좋아기억력에는 문제없는 것 같군그럼 나한테 빚진 10달러도 잊지 않았겠지?”


그의 말에 예전에 지나가듯 한 내기가 떠올랐다당시에도 무례한 내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가 먼저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했던 것이 먼저였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워드가 결혼을 할지 안할지에 관한 내기를 했었다이것으로 그가 하워드 스타크라는 것을 확신했다방금 깨어난 사람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할 만큼 뻔뻔한 이는 내가 알기로는 하워드뿐이었다그래도 그의 행동이 나름의 배려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놀랍군이 내기는 내가 이길 줄 알았는데.”

“25년이나 흘렀으니까덕분에 나한테 빚진 10달러의 이자가 제법 된다네그러니 내 돈 내놓으시지.”


하워드의 재촉에 나도 모르게 바지주머니를 뒤져보지만 손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게다가 이제 보니 입고 있는 옷도 내 것이 아닌 가벼운 운동복이었다내가 난색을 표하며 나중에라도 꼭 갚겠다고 말하자 하워드는 기다렸다는 듯 두꺼운 파일 몇 개를 내게 던져주었다.


융통성 없는 건 여전하네그 말 잊지 말게나이제 자네는 부자야나보단 아니지만.”


파일 안에는 내가 전쟁영웅으로 인정되어 대위(captain)에서 소령(major)으로의 진급명령이 적힌 서류와 전쟁 당시 지급되었던 채권들의 높아진 가치에 관련한 보고서들이 몇 장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종과 고아였던 덕분에 가지고 있던 채권들과 연금이 내 명의의 연방은행에 고스란히 잠들어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하워드는 격렬한 반응을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저 “0이 많군.” 이라고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내 말에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하워드가 콧수염이 흔들릴 정도로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그런 하워드를 보며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다한참을 웃고 나서야 하워드가 이번에는 작고 네모난 상자를 흔들며 말했다.


자네가 잠들어있던 동안 일어난 중요사건들을 모아봤지비디오테이프라는 건데 영사기 없이도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네.”


그의 과학적인 설명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집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하워드는 열정적인 선생처럼 1970년까지의 역사나에게는 미래인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달을 걸었고 마틴 루터킹이라고 대단한 흑인이 있었지덕분에 이제 흑인과 백인이 결혼 할 수 있어좋은 일이지그리고 한국전쟁이 있었고 지금은 또 다른 전쟁이 한창이라네.”


한참을 줄줄 쏟아내던 하워드는 숨을 골라내더니 다른 서류파일을 꺼내들었다처음에 내밀었던 것 보다는 얇았지만 앞면에 써져 있는 이름을 읽은 순간 나는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마지막으로이게 자네가 가장 궁금해 하는 일이겠지페기카터 는 장군(General)이 되었다네최초의 여성장군이야.”


항상 그리워하던 그녀의 소식이었다스타크에게는 미안하지만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그녀페기카터였다그녀가 지금은 장군이 되었다니그녀가 지니고 있던 강인함이나 능력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었지만 내심 놀라웠다훌륭한 군인에 있어 남녀는 상관이 없음을 그녀가 증명한 것이다그녀야말로 하워드가 만들어 준 비디오테이프를 보지 않아도 시대가 점점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훌륭한 증거였다.


지금은 두 아들의 훌륭한 어머니이자 좋은 아내라네.”


파일 안에는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가족사진도 함께 있었다조금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페기와 부부를 반반씩 닮은 아이들그녀 옆에 꼭 붙어있는 남편까지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이상적인 가족처럼 보였다나는 파일을 덮고 애써 말을 돌렸다.


그보다 자네는 어떻게 지냈나?”

이제 유부남이지만 여전히 잘나가는 천재 무기개발업자이자 세계최대의 무기상이지.”

이상한 엑스포를 열던 취미는 버렸고?”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하워드는 입술만 끌어올린 미소를 보여주었다그를 안 뒤로 처음 보는 서글픈 얼굴이었다조금 전만해도 패기 넘치던 청년의 얼굴은 순식간에 쇠락의 길에 접어 든 중년의 얼굴로 변모했다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피어올라 재만 남은 열정이었다나는 그에게 많이 변했다고 해야 할지 여전해야하다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 * *



 

맨하탄의 빌딩 하나를 내주겠다는 하워드의 제안을 뿌리치고 브루클린의 작고 아담한 집을 골라 이사를 했다그의 호의는 고마웠으나 전구 하나까지 최신식으로 설계 되어있는 하워드의 빌딩은 불편하기만 했다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요즘 물건들에 영 익숙해지지가 않았다내가 잠들어있던 사이에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청소기세탁기의 발명으로 사람들이 할 일은 줄어들었고 컬러텔레비전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전쟁 전 즐겨보던 영화 몇 편이 떠올랐다화려하기는커녕 흑백에 조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직까지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런 옛날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나 또한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방안에 들어서자 낡은 건물의 냄새가 났다삐걱거리는 마룻바닥과 구식 라디에이터가 뿜어내는 열기에 마음이 편해졌다마음이 편해지자 피곤이 몰려왔다나는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그러나 다시 잠이 드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다잠은 이미 충분히 자두지 않았던가.


지난 25년간 끊임없이 꿈을 꾸었다버키와 놀던 어린 시절 꿈이나 레드스컬과 싸우는 꿈을 꾸기도 했다때로는 페기와 춤을 추기도 했다토요일 저녁의 스토크 클럽(stork club) 안은 종전의 기쁨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붐볐고 페기는 약속대로 나에게 춤을 가르쳐주었다어설픈 춤 솜씨에 그녀의 발을 몇 번이나 밟아도 그녀는 상냥하게 웃었다페기의 리드에 따라 블루스를 추었다곡이 끝나면 그녀는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날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말에 그제야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나는 여전히 깊고 차가운 바다 아래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그 꿈은 너무 달콤했지만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너무 잔인했다나는 아직도 자고 일어나면 지금 이순간이 꿈일까 무서웠다.






3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와 동시에 샴페인을 터트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새해 축하인사를 건넸다거리는 새해를 맞이하여 터지는 폭죽을 구경하는 가족들과 서로 껴안고 키스하는 연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미국은 전쟁 중이었지만 사람들은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보다는 지금 당장의 평화를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새해에도 행운이 있기를 빌게요로저스 대령.”


뒤를 돌아보자 감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린 페기 카터가 서 있었다눈가와 입가의 주름이 무색할 만큼 그녀는 여전히 우아하고 매력적이었다그녀를 공식석상이 아닌 곳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그녀를 향해 경례를 했다.


카터 장군님.”


격식을 갖춘 인사에 그녀는 살짝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경례가 아니라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받아주었다나는 실례를 범했다고 느끼며 다시 악수를 청해야하나 고민했지만 결국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나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해 그녀의 옷차림을 칭찬했다.


그런 로저스대령은 오늘도 군복을 입으셨군요.”

사실솔직히 말하자면 옷을 입는 것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페기는 나의 어설픈 변명을 쳐낼 만큼 모진 사람은 아니었다나의 장단에 맞추어 애써 활발한 척나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잡아주었다.


예전부터 당신 옷차림은 제 취향이 아니었죠."


그녀의 말에 시무룩한 얼굴을 지어보이자 페기가 웃음을 터트렸다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페기는 연회장 한가운데에 서있는 하워드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스타크씨는 당신은 벗고 다니는 게 낫겠다고 말했었죠.”


하워드와 페기는 좋은 친구이자 나의 옛 모습을 동시에 추억하고 있던 동지였다지금은 장군과 무기거래상으로 여전히 돈독한 관계였지만 그 밑바탕아래에는 아직도 친애적인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그들의 얼굴을 보니 예전 페기와 하워드의 사이를 오해했던 일이 떠올라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때는 어리고 어리석었기에 질투에 눈이 멀어 부끄러운 짓을 했었다하워드와 자신과 페기순간 25년 전의 그 날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아니요저도 이제 많이 늙었는걸요.”


페기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녀의 미소는 예전 그대로였다강인한 부드러움곧고 정직한 마음가짐외양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그 이상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웃음을 본 순간그녀에 대한 감정이 세월이 지나 옅어지기는커녕 더욱 공고해졌음을 알아차렸다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만약 발키리에 마지막까지 타고 있지 않았었다면 어쩌면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헛된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페기늦었지만 그때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지켜도 될까요?”


충동적인 감정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페기의 손을 잡았다페기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뿌리쳤다그러나 그 행동에 놀란 것은 도리어 페기인 것 같았다페기는 잡혔던 손을 감싸 쥐며 황급히 뒤로 감추었다방안에 갑작스러운 침묵이 찾아왔다허탈감과 상실감이 소용돌이 쳤다그녀와 나 사이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하워드가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어요저는 이만.”


그녀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채 감추지 못하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이미 당시의 약속은 흩어져 없어진지 오래였다나는 문득 그녀와 춤을 추던 꿈이 그리워졌다.




* * *

 



하워드를 따라 연회장 한견에 따로 마련 된 방안에 들어서자 매캐한 담배연기가 코끝을 찔렀다무리지어 있는 남자들은 끊임없이 시가를 피워댔고 하워드 또한 자연스럽게 탁자 위에 놓인 시가를 입에 물었다시가를 피우지 않은 것은 나만이 유일했다.


신문이나 TV에서 보던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지만 담배연기가 장막처럼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 확신할 수는 없었다.


캡틴아메리카이거 영광이로군자네를 만나게 되다니.”


몸이 다부진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 짐짓 친근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것은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미소 짓고 있는 얼굴과 별개로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노련한 사냥꾼을 떠올리게 했다그를 보며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워드는 남자를 미스터 피어스라고 불렀다공화당의 중추적인 인물로 나도 몇 번 들어본 이름이었다금세 그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피어스는 나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인사를 시켰다마치 예전의 춤추던 어릿광대 원숭이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그런 생각들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피어스는 한숨 돌리자며 나를 발코니로 데리고 갔다사람을 다루는데 능숙한 남자였다.


며칠 전 대통령님을 만났었지어떤가자네가 본 대통령님은.”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내가 만나 본 대통령은 전쟁에 대하여 반대했지만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을 했다물론피어스의 질문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그날 대통령은 나에게 넌지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대한 나의 의중을 물어봤다국민들은 캡틴아메리카가 직접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기를 원한다던 말에 당시에는 즉답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일지도 몰랐다어차피 잠에서 깨어난 뒤 하는 일은 대부분 라디오와 방송을 통해 청년들의 입대를 요청하는 것이었다예전에도 비슷한 일을 했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은 25년 전에도 안전한 후방보다는 나가서 싸우는 것을 원했던 터였기에 생각이 많아지던 찰나였다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있을까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피어스는 품안에서 시가를 하나 더 꺼내든 뒤 불을 붙였다.


자네도 하나 하지?”


피어스가 시가를 권유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혀를 찼다.


저 히피족들을 보게나저러니 전쟁에 이길 수 없지 않은가.”


피어스가 가리킨 곳에는 긴 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무리들이 있었다그들의 손에는 대부분 기타와 전쟁반대 피켓이 들려있었다전쟁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베트남의 선제공격에 선량한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고 군사독재에 의해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면 우리는 전쟁을 해야만 했다지난 날 레드스컬의 손아귀에서 사람들을 구해냈듯 말이다.


우리에게 자네가 필요하네조국을 위해 자네가 한 번 더 나서주길 바라네!”


피어스는 내 어깨를 붙잡았다좀처럼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 지리멸렬한 싸움을 끝내 줄 전쟁영웅을 원했다무엇보다 조국이 자신을 원했다그보다 더 큰 동기는 없었다.

 





4

 

 

 

 

 

 


베트남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맞이한 것은 가만히 있어도 숨 막히는 더위와 그보다 더 뜨거운 군인의 환영인사였다그들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앞 다퉈 나와 나에게 사인을 요구하는 이도 많았다나는 군인이었지 유명인사가 아니었기에 거절을 하고 싶었지만 내 뒤를 따라오던 공보장교가 속삭였다.


아버지 세대의 영웅이자 어린 시절의 영웅인 당신이 그 모습 그대로 눈앞에 나타났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승리를 거머쥔 듯 환호했다미국인만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다양한 국가에서 모인 다양한 인종을 보니 코만도즈 대원들이 생각났었다인종과 국가는 달랐지만 옳은 정의를 위해 함께 싸웠던 아군은 예나 지금이나 든든한 존재였다그들의 존재에 나는 당장이라도 전쟁에서 이길 것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랬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지 않아 무참히 꺾였다상상했던 것보다도 베트남은 무더웠고 한낮이면 몸은 불덩이처럼 느껴지고 아무 생각도 못할 정도로 머릿속까지 뜨거워졌다그저 서 있기만 해도혹은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내리쬐는 뜨거운 햇볕 속을 암담한 마음을 안고 억지로 걷곤 했다계속 되는 더위와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들에 우리는 점차 지쳐만 갔다무엇보다도 제일 최악이었던 것은 조국에서 들려오는 전쟁반대시위에 대한 소식이었다부정적인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나조차도 맥이 빠졌기에 부대에서의 신문과 라디오를 금지했다.




* * *



 

남자를 만난 곳은 전쟁의 한복판이었다사방에서 울리는 폭음과 그 폭음에 파묻힌 비명소리들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그 지옥 같은 곳에서 남자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운 얼굴로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등줄기로 긴장감 때문에 배어 나온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햇빛이 온 몸을 꿰뚫어 더위 때문에 옆구리와 목덜미에 땀이 배어나오는 와중에 등에 흐르는 땀은 그런 것들과 종류가 다른공포나 불안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남자는 6피트는 넘는 듯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가냘픈 느낌을 주었다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목덜미까지 내리덮은 장발을 하고 뺨이 옴폭 패인 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상한 것 투성이었지만 무엇보다 기이했던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그 깊고 짙은 녹색의 눈동자를 마주보는 순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암흑의 세계에 홀로 버려져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순간 혼란에 빠져 어슴푸레한 불안에 휩싸였다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그의 등장에 주목을 하거나 의문을 갖지 않았다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그는 유령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아니면 환상일까어쩌면 수퍼세럼의 부작용일지도 몰랐다어떤 것이 되든지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잔뜩 경계하는 나를 아랑곳 하지 않고 남자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녕다시 만나서 반가워내 이름은 로키야.


그 손을 잡은 순간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존재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로키는 실재했고 그 생각이 착각인 것 같지는 않았다나는 조용히 그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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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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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 blood

글/긴 2018. 5. 7. 14:12

2012년도에 발행했던 토르로키 단편 회지

뱀파이어AU

blood

(Thor X Loki)


 

 

 

 

 

 

 

옥은 당신의 오른편에 있다런던은 위대한 도시였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그 이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마들이 살 것 같은 빈민가처럼 충격적인 장소들도 함께 존재했다거리는 더러운 것들로 뒤덮여있으며 평생 한 번도 머리를 빗어 본 적 없는 추악한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그러니 도시의 동쪽 끝에 무엇이 있는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런던의 동쪽 끝에 있는 화이트 채플 가(White chapel Street)는 런던의 뒷모습 가운데서도 단연 지옥과 닮은 곳이었다골목마다 매음굴에서 새어 나오는 아편연기로 자욱했다창녀들은 밤안개를 베일처럼 두르고 산책로에 서서 치마를 펄럭이며 남자들을 유혹했다때때로 사교계에도 데뷔하지 못한 미숙하고 어리석은 청년혹은 군에서 막 제대해 세상물정 모르는 장교가 멋모르고 저속한 만남에 끌려들어가 타락한 향락에 속절없이 중독되기도 했다가장 점잖은 신사라도 오페라 무대의 뒤편을 기웃거리며 여배우의 대기실을 꽃과 보석으로 장식해 구애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였다. 19세기의 런던은 아름다웠지만 죄악이 몸을 숨기고 언제든지 덮칠 준비를 하고 있는 곳이었다지옥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


 

이사벨은 도시의 밤을 헤치며 걸었다마차의 등불들이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밤의 거리는 어둠보다 은밀하며 죄악보다 복잡한 곳이었다거리는 낮의 흥겨움을 잊어버리고 아예 새로운 장소로 탈바꿈했다가스등은 꺼진 지 오래였다진한 어둠이 주변을 삼킨 채 뱀처럼 도사리고 있었다이사벨은 처음 보는 도시의 이면에 두려움에 떨며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단언컨대 이사벨은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숙녀였다그녀의 어린 동생 안젤라가 아프지만 않았더라도 그녀가 이 야심한 시간에 일어날 일도사창가 뒷골목에 올 일도 없었으리라그러나 오늘 내내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던 안젤라는 결국 입에서 피를 쏟아냈다어쩌면 결핵일지도 몰랐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사벨은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최근 주변에서 떠돌고 있는 괴기한 소문 때문인지 거리는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살인마 잭의 이야기는 아니었다잭은 이미 일주일 전 체포당해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호사가들은 죽은 살인마에 대해서 더 이상 입을 놀리지 않았다이제 런던은 새로운 살인마에 대한 소문으로 들끓었다관을 끌고 다니는 남자의 이야기였다가장 깊고 어두운 밤달빛도 비추지 않는 밤이면 집채만 한 덩치의 남자가 쇠사슬을 감은 관을 끌며 관에 넣을 산 자를 찾아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했다소문은 전염병처럼 번졌다이사벨의 등 뒤로 무서운 예감이 차갑게 스쳐지나갔다그녀는 망토를 더욱 단단히 여민 뒤 거리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이제 이 골목만 돌면 창녀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의사의 집이 나왔다이사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이때 누군가에 의해서 이사벨은 맥없이 골목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갔다골목 안에서 이사벨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었다그들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이사벨은 알지 못했지만 이 근방에서도 행동거지가 거칠기로 소문난 자들이었다.


아가씨는 하룻밤에 얼마야?”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무리 중 한명이 이사벨의 손등에 입술을 비볐다사내에게서 악취가 풍겼다.


살려주세요.”

아니 우리가 아가씨를 죽인다고 했나그냥 좀 즐기자는 거지.”

이 시간에 나다니는 걸 보니까 꽤나 밝히는 아가씨 아니겠어안 그래?”


사내들이 저들끼리 웃고 떠드는 사이 이사벨이 황급히 몸을 틀어 밖을 향해 소리 쳤다.


도와주세요누가 좀……!”


그러나 무리 중 한 명이 거칠게 손을 휘둘러 이사벨의 뺨을 쳤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맺어지지 못했다.


씨발년거 말 한번 많네.”


그가 침을 뱉으며 욕을 했다사내들의 거침없는 빈정거림과 모욕에 이사벨은 턱을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그녀의 등 뒤로 차갑고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가장 키가 큰 사내가 이사벨의 희고 가는 목덜미를 혀로 핥으며 치마를 거칠게 헤집기 시작했다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먼 곳에서 빅벤의 종소리가 울렸다.


지이익-


종소리 사이로 무언가를 끄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기이한 소리와 함께 금발의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금발의 사내는 무심한 얼굴로 걸어 들어와 이사벨의 치마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자의 뒤에서 팔목을 잡아 비틀어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

시발저거 뭐야이 새끼야너 누구야!”


자존심이 상한 사내들이 소리를 지르며 남자를 향해 몸을 던졌지만 남자는 별 말없이 차례대로 사내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그 몸놀림이 너무도 빨라 사람 같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기세좋게 달려들던 그들은 금발의 남자에게 속절없이 당했다남자는 달려드는 사내들의 머리통을 커다란 손으로 갈겨 땅바닥 위에 나뒹굴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절룩거리는 다리와 부러진 코를 움켜쥔 무리들이 결국 꽁무니를 뺐다남자가 그들을 물리치는데 걸린 시간은 열두 번의 종소리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벨은 순결한 처녀답게 뺨을 물들이며 자신을 도와준 남자를 향해 수줍게 감사인사를 했다남자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배고파토르.”


이때 남자의 뒤에서 한 소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이사벨은 깜짝 놀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소년은 안젤라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소년은 마치 어둠으로 빚어낸 것 같았다창백한 피부와 그와 대조되는 까만 머리카락까지소년의 외모는 예술가가 정성을 기울여 만든 도자기 인형과 같은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어린아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법한 순진함과 사랑스러운 무지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사벨은 소년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자기보다 한 뼘은 작은 어린아이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러나 공포는 아주 거대해 그녀를 집어 삼켰다어쩌면 좀 전의 사내들과 마주한 것이 더 안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소년은 두려움에 떠는 이사벨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왔다소년의 녹색 눈이 기이한 빛을 냈다.


이 여자가 먹고 싶어.”


소년의 흰 손이 이사벨을 향해 뻗어왔다그녀는 피할 수 없었다고양이 앞에 놓인 쥐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서있는 것이 고작이었다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녀의 몸에 남자의 손이 닿았다남자는 이사벨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하오.”


그것이 이사벨이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우드득머리가 기괴하게 틀어진 그녀의 몸이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이상하게도 이사벨은 남자에게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죽음이 너무 순식간이었기도 했지만 그 순간 마주친 남자의 눈동자를 보며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수긍했다다만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동생안젤라가 걱정이 될 뿐이었다.

 


*


 

소년은 무언가 성에 차지 않는 듯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토르토르!”


그 모습은 영락없이 떼를 쓰는 어린아이였다.


너 그 계집이 맘에 들었구나그렇지그래서 그렇게 단번에 고통 없이 죽인거지그런 거지?”


토르라고 불린 남자는 답이 없었다그 침묵이 더욱 소년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소년은 쓰러져 있는 이사벨의 가냘픈 몸을 걷어찼다소년이 힘껏 걷어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체는 몇 번 들썩이고 말 뿐이었다토르는 소년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가녀린 어깨가 위 아래로 거칠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로키.”

너의 고귀한 연인에게 이런 대우는 부당하다고 느끼는 거야?”


로키의 비아냥거림에도 토르는 침묵을 지킨 채 품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날이 선 단도가 달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토르는 익숙한 솜씨로 이사벨의 가슴을 갈랐다토르는 무릎을 꿇고 벌어진 사이로 두 손을 밀어 넣었다토르의 손 가득 순결한 처녀의 피가 담겼다토르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로키를 향해 말했다.


피가 식어간다부패하기 전에 어서 마셔.”


그러나 로키는 고개를 돌린 채 샐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년의 피 따위는 마시지 않겠어.”

어서.”


토르는 로키의 코앞으로 손을 가져갔다로키의 코에 향긋한 처녀의 피 냄새가 스쳤다로키는 자신의 입술을 진주 같은 송곳니로 짓이겼다창백했던 입술이 금세 붉게 변했다결국 로키는 어리광을 부리듯 토르의 손목에 매달려 정신없이 피를 핥아 마셨다붉은 죄악의 증거가 로키의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 * *


 

토르는 동이 터오는 것을 바라보았다유리창으로 비쳐 드는 희끄무레한 빛은 물결처럼 출렁거리며 서서히 엷어져 갔다오늘따라 더욱 몸이 꽁꽁 묶인 채 캄캄한 바다 속으로 가라앉듯, 어둠 속으로 잦아드는 느낌이었다난로의 불은 꺼진지 오래였고 시계소리만 들렸다토르는 의자에 기대앉아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토르는 점점 나쁜 일에 무디어져갔지만 오늘 밤 같은 일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특히 그녀는 자신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토르는 방안 구석에 놓인 관을 바라보았다목단나무로 만들어졌고 뚜껑 위에는 십자가 모양이 새겨져 있는 평범한 관이었지만 사실 보통의 관과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그것은 크기였다관의 크기가 보통 관의 반만 했다아이를 위한 관이기 때문이었다아이의 관을 만드는 것은 간단했다보통의 관을 만든 뒤 반으로 자르는 것이 방법의 전부였다물론 이런 관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런던에서는 아이들이 죽으면 대부분 맨몸으로 땅에 묻혔다아이를 위한 관을 만들기에는 날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죽어나갔다하지만 토르는 로키의 육신을 벌레들에게 먹히게 내버려둘 수 없었기에 로키를 위해 특별히 주문한 관이었다.


그러나 이 관이 땅에 묻힌 적은 없었다토르는 로키가 죽었던이십 년 전의 그 날을 기억했다어찌 잊을 수 있으랴그 순간부터 이 모든 절망과 공허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 * *

 

이십 년 전런던에는 또 다른 전염병이 돌았다이로 인해 도시 인구 오분의 일이 죽어 나갔다로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로키는 무척이나 아팠다토르는 어린 동생의 숨결이 점점 미약해지는 것을 알았다백방으로 알아봤으나 만나는 의사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어머니는 로키를 낳으며 돌아가셨고 불과 삼 년 전에 토르는 아버지를 잃었었다로키는 토르에게 하나 남은 가족이었다토르는 로키마저 잃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약을 구하러 토르가 집을 비운 사이 로키는 죽음과 조우했다집으로 돌아온 토르를 기다린 것은 죽음의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는 로키였다움푹 팬 뺨과 창백하고 움직임 없는 얼굴조그맣고 섬약한 모습의 로키를 보며 토르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토르는 로키를 끌어안고 뻣뻣해지기 시작한 손발을 어루만졌다토르는 품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내어 로키의 입안으로 흘려보냈다런던의 뒷골목에서 구한 뱀파이어의 피였다혹시나 싶어서 집어온 것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로키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토르는 마지막으로 이 수상한 피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미처 삼키지 못한 피가 로키의 입가로 천천히 흘러내렸다토르는 그것들을 모아 다시 억지로 로키의 입안으로 집어넣었다덕분이었는지 로키의 심장이 잠시 멈추기는 했지만 로키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로키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순간이었다그날을 경계로 로키는 점점 야위어만 갔다분명 병은 모두 나았건만 음식을 입에 넣는 족족 게워냈고 종내에는 그렇게 좋아하던 호밀 빵의 냄새조차 질색했다낮 동안이면 깊은 잠에 빠졌다가 밤이면 몽유병 환자처럼 밖을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토르는 그런 로키를 보며 걱정했다.


두 뺨은 점차 창백해지고 검은 머리커다란 두 눈곧은 콧날작은 새와 같던 걸음걸이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던 로키는 다 사라지고 침묵에 잠겨 있는 모습은 마치 어떠한 숭고한 숙명에 의해 알 수 없는 표식을 이마에 새겨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그것은 너무나도 슬프고 차분하고 동시에 너무나도 부드럽고 또 안타까웠기 때문에 로키의 곁에 가까이 가는 사람은 겨울에 핀 꽃향기에 몸이 떨리듯 어떤 기괴한 매력에 사로잡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때문에 많은 이들이 로키의 매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로키는 조금씩 탐욕과 분노와 증오에 잠식당하고 있었다정숙해 보이는 입술은 마음의 고뇌를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로키 스스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사건은 일어나게 마련이었다토르는 그 날을 잊지 못했다사라진 로키를 찾은 곳은 이웃의 정원에서였다로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그 곁에는 바지춤을 채 추스르지 못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토르는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냈다욕정적인 눈으로 로키를 훔쳐보던 이웃집 남자였다남자의 목덜미는 짐승에게 물린 듯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토르는 황급히 다가가 자신의 셔츠로 로키의 얼굴을 닦아 냈다.그리고 로키에게 무슨 상처가 난 것이 아닌지를 확인했다몇 군데 옆집남자에게 입은 듯 생채기가 있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나 더 먹고 싶어.”


로키가 입맛을 다시며 토르에게 칭얼거렸다로키의 얼굴에서 죄의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다만 배고픔에 허덕이던 로키의 얼굴이 포만감으로 빛이 났다그 모습은 마치 인간이 소와 양을 죽일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생존을 위한 살해는 죄책감을 요구하지 않았다토르는 자신이 가지고 온 약이 진짜 뱀파이어 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제야 로키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다.


토르는 로키가 다치지 않은 것이그리고 이들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더군다나 로키에게 해를 입히려고 했던 나쁜 놈이 죽는 것이었다자신의 동생은 죄가 없었다토르는 정원 한켠에 있던 돌덩이를 주워들었다.


살려…….”


남자가 바짓단을 붙들고 애원했다토르는 눈을 감고 남자의 머리통을 내리쳤다꿈틀거리던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로키는 남자의 으깨어진 머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뒷목에 이를 박아 넣은 뒤 허겁지겁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토르의 눈시울이 촉촉이 젖는가 싶더니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로키에게 있어서 그날은 토르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본 날이자 마지막 날이었다로키는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토르의 눈물을 모두 받아내기에는 자신의 손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결국 로키는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 * *


 

살롱에 들어서자 꽃향기와 고기 냄새송로의 향기가 뒤섞인 따뜻한 공기에 감싸이는 것을 로키는 느꼈다촛대 위의 촛불들이 종 모양 은제 덮개 위에서 불꽃을 피워 올리고증기가 뽀얗게 낀 커트글라스들이 서로 창백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색색의 꽃다발들은 식탁의 끝에서 끝까지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훌륭한 연회장이 그러하듯 한쪽 구석에 놓인 카드놀이 테이블 위로 금화가 쏟아지는 맑은 소리가 들려오고 부인들의 부풀어 오른 스커트가 서로 스쳐지나가며 부채 너머로 상대를 흘깃거렸다.


열아홉 살부터 마흔 살 안팎의 남녀들이 춤추는 사람들 속에 섞이기도 하고 서로 담소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들의 나이옷차림얼굴 모습은 각각 달라도 어딘가 서로 공통된 데가 있었다그들은 외양은 젊었지만 어딘가 노숙한 격조가 느껴졌다눈빛에는 날마다 정념을 만족시킨 데서 오는 고요함이 감돌았고부드러운 거동 뒤에는 특유의 욕망이 엿보였다큼직하게 이니셜을 수놓은 손수건으로 입을 훔칠 때면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들은 종종 파티를 열어 교류했다겉모습은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그들은 인간처럼 구는 것을 유희로 삼았다인간이었던 때를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몰랐다때때로 그들은 인간들보다 욕망에 대해 솔직하게 굴었다.


육체의 뜨거운 흥분과 애정으로 가득한 거대한 발코니와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고 각양각색의 희귀한 꽃으로 가득한 바구니연인들의 밀회를 위해 비단 장막이 드리워진 규방이 모든 것들이 토니 스타크의 저택을 상징해주고 있음과 동시에 뱀파이어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었다.


로키는 오케스트라의 리듬에 몸을 싣고 가볍게 움직이면서 앞으로 미끄러져나갔다때때로 다른 악기들이 잠잠해진 사이에 혼자 연주되는 바이올린의 미묘한 선율을 들을 때면 로키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로키의 미소를 이 만찬의 주인인 토니 스타크가 긴 식탁의 상석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런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풍문에 따르면 그는 여왕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그것이 영 틀린 말이 아니었는지 오늘의 연회는 무척 화려했다.


이윽고 준비된 만찬이 나오기 시작했다토니 스타크의 명성에 맞게 파티는 화려했다스페인산 포도주가 잔뜩 나오고 새우와 아몬드 즙이 든 수프파인애플이나 석류 같은 진귀한 과일들트라팔가르 푸딩 그리고 온갖 종류의 고기들이 쟁반에 담겨 나오기 시작했다화려하고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스타크답게 공작고기까지 준비가 되어있었다.


로키는 토니의 악취미라며 혀를 차며 마라스키노 술이 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진짜 진주가 박혀있는 조개모양의 접시를 손에 들고 숟가락을 입에 넣은 채 눈을 반쯤 감았다.


아직 술은 좀 이른 나이가 아니던가?”


토니 스타크가 등 뒤에서 나와 로키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자신의 엄지로 닦아낸 뒤 입에 넣고 소리 나도록 빨았다.


달군.”


토니는 로키를 향해 명백히 유혹적인 동작을 해보였지만 로키는 영리하게도 그 이면에 자신의 어린애 취향의 입맛에 대해 놀리는 토니의 심중을 알아채고는 별다른 반응 없이 재빨리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아내었다그조차 토니의 눈에는 귀엽게 보였다.


여기는 혼자 온 건가보호자 없이?”

그럼 내가 누구와 함께 와야 하지?”


로키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토니는 예상대로 날을 세우는 로키의 반응에 속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로키에게 거짓 용서를 구했다.


사과의 의미로 재밌는 걸 보여주지.”


토니가 손가락을 튕기자 제복을 갖춰 입은 급사들이 은쟁반을 하나씩 들고 나왔다그 위에는 혀를 빼물고 죽은 자들의 목이 하나씩 담겨있었다부인네들은 들고 있던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작은 탄성을 내뱉었지만 호기심 어린 눈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어때저게 바로 그 잭’ 의 시체인데.”


토니는 로키에게 속삭이며 말했다온 런던시내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칼잡이 잭의 시체였지만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는 단순한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았다이번에는 벌거벗은 남녀 열 쌍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이것이 오늘 연회의 진짜 백미였다살아있는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토니 스타크의 파티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었다.


자 여러분만찬을 즐깁시다!”


토니의 선언에 여기저기서 비릿한 피 냄새가 여기저기서 퍼져나갔다오 분 전만해도 따뜻하고 아름답던 연회장은 광기와 살육의 장으로 변해버렸다뱀파이어들은 각자 눈에 보이는 대로 이를 박고 피를 마셔댔다.  로키 또한 허기를 느꼈다눈앞에는 훌륭한 먹잇감이 제공되고 있었고 로키는 가서 구미에 맞는 음식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그러나 로키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로키!”


이때 상기 된 얼굴을 한 토르가 연회장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토르의 몸 여기저기에는 생채기가 나있었다분명히 저택을 지키는 문지기나 토르와 안면이 있는 뱀파이어와 다툰 흔적이 틀림없었다토르는 로키를 망토로 감싸 안아 재빠르게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

 


로키의 심기가 불편 한 것처럼 보였다흥미로운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었으리라고 토르는 미루어 짐작했다로키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그래서 책을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었다다 지난 일이 되었지만.

무엇이 되었든 토니 스타크는 로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자임에는 분명했다토르는 외투를 걸어두고 거울 앞에 서 있는 로키에게 다가갔다.


토르도 거울 속에 비쳐진 로키의 모습을 등 뒤에서 바라보았다그러나 거울 속에는 오직 토르 혼자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로키는 거울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토르는 로키를 돌려세워 로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로키가 여기 실제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하듯 꼼꼼하게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반듯한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다시 넘겨주었다토르의 손이 로키의 머리에서 귀로아직 다부지지 않은 턱으로 그리고 로키의 섬세한 입술을 스쳤다로키의 입술 사이로 감춰지지 않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흥분했다는 증거였다토르는 로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초록색 눈이 한층 더 짙게 보였다토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토르는 로키의 손을 잡고 간곡하게 청했다.


다시는 저런 것들과 어울리지 말아라.”


로키는 토르의 손을 매섭게 쳐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저런 것누구를 말하는 거지?”


로키의 반문에 토르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로키의 눈동자에서 조용히 타고 있는 분노를 읽어낼 수 있었다토르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길길이 날뛰었다.


뭔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그들과 나는 똑같아나도 똑같은 뱀파이어라고!”

아니로키너는 다르다!”


이번에는 로키가 아닌 토르가 분노했다토르의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그러나 토르의 분노에도 로키는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도리어 토르에게 다가가 자신과 다른 단단하고 너른 등에 뺨을 문질렀다로키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외롭고 외로운 걸나를 상대해주는 거라고는 형이 그렇게 싫어하는 토니 밖에 없어.”

하지만 그것이 어떤 눈으로 너를 보는 줄 알아?”

어차피 변태들이나 나랑 어울려주지그래 보여도 토니는 신사라고아직 나와 동침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어째서 너는!”


토르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반대로 로키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키들거리며 방안을 천천히 걸으며 우아한 손놀림으로 셔츠와 바지속옷을 하나씩 벗었다.


이십 년 전만해도 형과 나의 키는 별로 차이가 없었잖아아니 내가 조금 더 컸었어기억나?”


점점 드러나는 로키의 몸은 기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미성숙한 성기와 옅은 체모가느다랗고 곧게 뻗은 다리우아하게 균형 잡힌 몸을 가진 로키는 토니 스타크가 탐낼 만도 했다토르는 고개를 돌리지만 로키는 허락하지 않는다집요하게 쫓아와 토르의 얼굴을 자신을 향하게 만든다.


잘 봐그때와 난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여전히 어린애에 불과해쥐새끼 죽일 힘 하나 없어.”

내가 있잖느냐.”

토르나는 형제가 아니라 연인이 필요해나를 어른으로 대해 주고 만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해.”

차라리 네 또래의 여자를 만나는 건!”


로키는 모욕이라도 당한 것 같은 얼굴을 했다로키의 속눈썹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당장이라도 장갑을 내던지고 결투를 신청할 기세였다그러나 로키는 자신이 들 수 있을만한 검 따위는 없다는 것을 서글플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우스웠다 제 또래의 여자는 어떤 여자를 말하는 걸까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토르만이 모르고 있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형이야.”

너는 몹시 아팠고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내가 너를 죽게 내버려둘 리 없잖느냐.”


토르가 로키의 뺨을 감싸 쥐었다로키의 가슴 깊은 곳에서 원망과 분노가 말갛게 솟아올라왔다자신의 비참함이 가슴을 도려내듯 아픈 통증을 일으켰던 것이다처참하게 망가진 젊음욕망을 억누르며 보내야 했던 기나긴 나날들욕망의 좌절 끝에 오는 이 한없는 굴욕감.


위선자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


로키는 토르를 향해 주위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던져댔다토르는 씁쓸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로키는 힘없이 주저앉아 토르가 나간 문을 향해 외쳤다.


이십년이야 토르이십 년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그러나 나는 여전히 어린애일 뿐이잖아그것도 앞으로 영원히.”


 

* * *


 

로키는 과자부스러기와 설탕으로 손이 온통 끈적끈적해 질 때까지 과자를 실컷 먹었다토니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로키의 앞에 저택의 디저트는 모두 들고 왔다로키는 신경질이 났다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이었다.


로키가 이런 기분을 처음 느껴본 것은 아니었다어릴 적이면 로키는 토르가 돌아올 때까지 어둠이 드리워지는 문밖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그를 기다리고는 했다그가 가지고 온 피를 허겁지겁 삼키면 그는 서글프고 낯선 것을 바라보는 눈을 했다로키는 결국 찻잔 하나를 깼다.


로키는 무릎에 턱을 괴고 가만히 생각했다어쩌면 토니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토르에 대한 혐오를 연인에 대한 동경으로 착각했고 불타오르는 증오를 뜨거워지는 애정으로 오해했는지도 몰랐다그러나 여전히 폭풍은 휘몰아쳤고 정열은 타오를 대로 타올라 재가 되었지만 아무런 구원도 오지 않았다빛은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았기에 어디를 향해도 캄캄한 밤이었으므로 로키는 뼛속까지 스미는 무서운 추위 속에서 길을 잃은 채 갈 곳을 모르고 있었다토르의 품안에 안기면 텅 비고 야윈 가슴이 한결 넉넉해졌다로키의 세계에는 오로지 토르가 전부였다그것이 증오든 애정이든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토니는 저 우울한 얼굴을 한 대 쳐준다면 속이 시원하리라고 생각했다눈앞의 소년은 악마였다물론 저 작은 몸 어디 때릴 곳이 있겠느냐마는 때때로 답답하게 굴적마다 때려주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태생인 양 이것저것 요구하는 꼴이 밉지 않았다토니는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들어두고 죽어버린 녀석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작은 악마 같으니토니는 로키의 뺨에 입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시무룩해서야애인이 달아난다고.”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걸이런 비정상적인 몸.”


로키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작고 섬세한 손으로 앞섬을 풀어헤쳤다달빛에 비춰진 로키의 몸은 어린아이의 몸도 어른의 몸도 아니었다어른과 아이그 미묘한 경계에서 서 있었다그것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필요하다면 내가 위로해줄까?”


토니는 이 한없이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몸을 조심스럽게 쓸어 내렸다로키의 존재는 뱀파이어 세계에서도 희귀한 존재였다토니는 이 작고 어린 것에게 무한한 애정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토니는 다정하고 섬세하지만 뜨겁고 탐욕스러운 손길로 로키의 아랫배를 더듬었다그러나 여전히 로키의 눈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토니는 쓰게 웃으며 로키의 동그란 정수리에 입맞춤을 했다어린 것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달큰하고 비릿한 향이 토니의 정욕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는 로키의 뺨에 살짝 키스를 한번 한 뒤 물러났다.


여기까지왕자님이 공주님을 구하러 오는 소리가 들리는군.”


토니가 과장되게 손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로키 또한 토니가 칭하는 왕자가 누군지는 알았지만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고 말았다예상했던 일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안으로 토르가 뛰어 들어왔다.


로키!”


토니는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으면서 토르에게 다가갔다.


이런토르이게 얼마만이지?”


토르는 토니의 인사는 모두 무시한 채 로키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그런 토르를 보며 토니는 비웃음을 던지며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 말라고너의 공주님은 순결한 처녀니까당장이라도 유니콘을 타고 가실 정도라고아직까지는 말이야.”

닥쳐!”


핏발선 눈이 칼날처럼 번득였다토르는 분노하며 토니를 향해 단도를 휘둘렀다아슬아슬하게 토니는 몸을 피했지만 입고 있던 옷자락이 잘려나갔다토니는 아끼던 옷이 상한 것에 화를 냈다갈색 눈동자에 안광이 번뜩이고 입에서 순식간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인간주제에 감히로키만 아니었다면 당장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텐데!”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둘 사이에 로키가 조용하게 걸어 나와 둘을 가로막았다.


토르돌아가자.”


로키의 한마디에 토르는 곧바로 토니를 향한 적개심을 버리고 로키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토르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로키의 작고 부드러운 발에 쪽빛 덧버선을 신겨주었다로키는 의자에 앉아 자연스럽게 토르의 시중을 받았다.


처음과 다름없는 완벽한 복장이 된 로키가 토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토르는 로키를 안아들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마치 둘 이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구는 모습을 바라보며 토니는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 * *



 

토르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토니 스타크의 앞에 알몸으로 선 로키를 본 순간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위안에 대한 갈구이자 저속함에 대한 갈구로키를 영원히 소유 하고 싶은 갈망과 동시에 한순간의 쾌락에 대한 갈증들이 뒤섞여 자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토르는 그전까지만 해도 구체화 되지 않은 감정 덩어리가 어느새 자신의 형상을 하고 제 안에 들어앉았음을 깨달았다그것을 부정할수록 점점 제 목줄을 옭아맬 것이었다이 감정에는 어떤 날카롭고 위험한 것이 숨어 있었다그것을 눈치 채고 달아나려고 했지만 결국 뒷덜미를 채여 허우적 되었다그것은 우연이었거나 혹은 필연이었을지 모르겠다그러나 운명은 거부 할 수 없기에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 이었다토르는 결국 그 운명에 굴복했다.


토르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로키를 끌어안아 입을 맞추었다토르가 로키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자 로키의 입술이 떨렸다오래도록 지속되어온 관능의 부재에 로키의 몸은 경직되어있었다그런 로키가 토르는 너무나 사랑스러워 우습게도 토르 또한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로키의 모든 것이 토르의 눈에는 한없이 매력적으로 보였다달빛을 받아 방안의 모든 것들이 순백색으로 빛났고 토르의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감동이 일었다.


토르는 로키의 목덜미를 이로 물었다가 입술로 가볍게 그 자리를 더듬었다로키도 열정적으로 그에 응하기 시작했다로키는 몸을 떨고 있었다토르는 로키를 두 팔로 끌어안고 그의 두 귀에 입을 맞추었다부드럽고 따뜻한 입맞춤이었다로키를 바닥 위에 눕힌 채 작고 부드러운 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러다가 로키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고 그의 입언저리에도 입을 맞추었다.


가지런한 이빨들과 날카로운 송곳니도 핥아주었다로키가 엉겁결에 토르의 혀를 살짝 깨물었다가 자신이 흥분했던 것을 아는지 새된 소리로 웃었다토르 역시 로키의 온몸을 구석구석 핥았다.

위험하고도 미래가 없는 초로의 욕정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토르에게 로키는 마치 매혹적인 괴물 같았다아니자신을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괴물이었다그러나 누가 괴물인 것일까그를 탐하는 자신인가 아니면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로키인가토르는 알 수 없었다.

 


*

 


로키는 어젯밤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기억들을 더듬어보았다몸의 깊은 곳까지 휘저어진 것 같은 달콤한 나른함희미한 위화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서서히 해가 뜨고 있었다로키는 잠든 토르의 등을 바라보며 곁에 앉아 있었다마치 연인 같다라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왔다로키는 토르를 부드럽게 깨웠다이제 단 한 가지의 소원만 이루어지면 되었다.


이제 내 피를 마셔줘.”


로키가 토르의 옷가지 사이에서 단도를 꺼내들어 자신의 손목을 있는 힘껏 그었다로키의 가녀린 손목을 타고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키!”


토르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지만 로키의 얼굴은 평온했다로키는 순식간에 아물어가는 상처를 들여다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거 보여토르형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어.”


로키는 팔을 들어 토르에게 들이밀었다로키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러니 마셔그리고 나와 함께 해줘.”


토르가 자신과 같은 뱀파이어가 되는 것 그것이 로키의 유일한 소망이었다그렇게만 된다면 어쩌면 로키는 이제는 더 이상 토르를 미워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그러나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No, Loki. no…….”


토르는 자신은 이미 너무 멀리까지 왔다는 것을 알았다로키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할 수 있었고 그와 함께 잠을 잘 수도 있었다그러나 뱀파이어가 되는 것만은 할 수 없었다토르의 단호한 말에 로키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로키의 뺨 위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너는 점점 죽어가고 있잖아그리고 곧 죽겠지그러면 누가 나의 갈증을 달래주지누가 나의 악몽을 물리쳐주지누가 나와 함께 있어주지?”


로키의 말이 옳았다토르는 점점 나이를 먹었고 로키는 언제까지나 무력하고 어린아이로 남아있을 것이었다그러나 토르는 그런 로키의 외침을 들어주지 않았다.


잔인해형은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야얼마나 나를 외롭게 만들어야 만족하겠어?”


로키는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며 몸을 떨었다토르는 로키를 진정시키려 다가가 어깨를 끌어안았다.


로키…….”


토르는 뱃가죽이 화끈해지는 고통을 느꼈다단도는 작았지만 날이 벼려있어 그 날카로움은 토르의 내장까지 헤집어 놓을 수 있었다그것을 누구보다도 토르는 잘 알고 있었다토르는 천천히 로키에게 떨어졌다배에 꽂힌 칼을 잡아 뽑았다.


맑은 쇳소리를 내며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날이 선 단도의 끝에는 피가 묻어있었다토르가 애써 상처를 막아보지만 손 틈새로 흘러나오는 피를 막을 수 없었다토르의 무릎이 꺾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로키는 점점 아물어가는 상처를 쓰러진 토르의 입으로 들이밀었다.


어서 마셔이 피를 마시면 살 수 있어영원히둘이 함께야.”


영생이 약속 된 붉은 피였다피에서 사과 향이 났다이브를 유혹하고 아담을 타락하게 만든 금단의 과실과 꼭 같은 향이었다토르는 이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저 피를 마시면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까무룩 해지는 시선 끝에 이십 년 전과 다름없는 얼굴을 한 자신의 어린 동생이 있었다소년으로 있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내가..못했다로키.”


토르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토르의 뜨거운 피가 로키의 발등을 적셨다토르의 체온이 점점 로키와 닮아갔다.


토르!”

나를 용서해주렴.”


로키는 피에 젖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 위를 덧대어 발랐다로키는 피처럼 붉은 입술로 토르의 입술을 천천히 마주했다입을 다문 채입술 그대로 오래도록 이어지는 그 순결한 입맞춤서로의 입술이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인 감각을 나누며 하나하나 헤아려 보는 시간이 로키는 황홀하도록 좋았다그러나 토르의 입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로키는 울음에 번지는 말로 토르를 저주했다.


나는 너를 증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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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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