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도 쯤? 레인보우시리즈(...)로 낸 호크로키 단편  회지

Purple Rain

Clint Barton X Loki









 


1


 


 


여자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창틀위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바깥세상은 소란스러웠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소란과 빗소리가 뒤섞여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여자의 세상은 더 없이 고요했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창문을 몇 번 톡톡 두드리다가 입김을 불었다. 유리창 위로 금세 김이 서렸고 여자는 그 위에 글자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Я хочу видеть(보고 싶어)”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자신의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알면서도 빨리 오지 않는 자신의 연인에게 여자는 괜히 심술이 났다. 여자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방 안으로 빗줄기가 들이닥쳤지만 전혀 상관없다는 듯 창밖으로 몸을 뻗었다. 빗줄기는 여자의 얼굴에서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여자의 젖은 머리카락이 흰 얼굴을 어지럽혔다. 여자는 그 감각을 마음껏 즐겼다.


“뭐하는 거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남자가 방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남자는 재빨리 창문을 닫은 뒤 큰 타월을 들어 여자의 몸을 감쌌다. 남자는 화가 잔뜩 난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지만 여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남자를 껴안았다.


“다녀왔어?”


여자는 서툰 영어로 말하며 남자의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남자는 흥건하게 젖은 바닥을 보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마워.” 치우는 것은 남자의 몫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심술을 알아차렸다. 여자가 웃으며 “별 말씀을.” 이라고 되받아쳤다.


남자는 코트 안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젖지 않도록 신경 쓴 덕분에 안의 물건은 젖은 곳 하나 없었다. 남자는 사온 과일들과 흰 약 봉투를 꺼내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약 봉투에 눈길이 멈춘 여자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남자가 여자를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НеЗачто.(별 말씀을)”


 


남자가 이층으로 올라간 사이 여자는 남자가 사온 약봉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스레 사과를 베어 물었다. 사과 하나를 다 먹고 난 뒤 그 밖의 다른 것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여자는 언제나 조금씩만 먹었다. 그녀의 오래 된 습관 중 하나였다.


여자는 이층을 힐끔거리다 또 다른 오래 된 습관을 실행했다. 여자는 바닥에 앉아 왼손의 손가락 끝과 오른손의 손가락 끝을 마주대고 허리를 굽혔다가 피기를 반복했다. 앞과 뒤, 옆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허리는 고양이처럼 유연했다. 여자는 남자가 그녀에게 ‘성격만 고양이를 닮은 게 아니군.’ 이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본격적으로 벽에 달린 긴 바를 잡고 탕듀(Tendu)동작을 취했다. 다리를 앞에서 옆으로, 옆에서 앞으로 계속 반복하며 다리의 움직임을 점검했다. 여기까지는 무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앙바(En bas).여자는 늘씬한 두 팔을 앞으로 뻗어져 원을 만들었다. 여자는 발레를 배운 뒤부터 매일 두 시간씩 기본동작을 연습했다. 십여 년을 해온 동작이었지만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여자의 손끝이 눈에 띄게 떨렸다. 여기까지였다. 자세를 여섯 번 바꾸기도 전에 여자의 숨이 가빠왔다.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을 마구잡이로 던졌다.


그 모든 일을 지켜보던 남자가 여자의 등 뒤로 다가가 조용히 여자를 안아주었다. 떨고 있던 여자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여자는 간신히 입 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을 해보였다. 남자가 여자의 무릎 밑에 손을 넣어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녀는 익숙한 듯 양팔을 남자의 목에 두르고 가슴팍에 살며시 기대었다. 여자는 새처럼 가벼웠다. 하긴 그렇게 멀리 뛰려면 가벼워야지. 남자는 여자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했다. 무대 위에서 춤추던 그녀의 모습은 날아오르는 새와 다름없었다. 그날 했던 공연이 백조의 호수였던가. 남자는 여자를 안고 계단을 올라갔다.


“아까 사과 하나밖에 안 먹었지? 더 먹어야지.”


“안 돼. 살찌면 발레리노한테 욕먹어.”


남자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자 여자도 따라 웃었다. 여자는 날이 갈수록 점점 말라갔다.


 


남자는 천천히 침대 위에 여자를 눕혔다. 그 잠깐의 목욕에 도 퍽 지쳤는지 여자는 어느새 잠이 들어있었다. 남자는 뻣뻣하게 굳은 여자의 팔을 최대한 부드럽게 주물렀다. 여자의 몸은 너무 말라 핏줄이 다 비칠 정도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몸이었다. 남자는 좀 더 시간을 들여 여자의 몸을 주물러주었다. 여자는 날이 갈수록 움직이기 힘들어 했다. 유연했던 몸은 점점 굳어져갔고 날씬했던 몸은 말라 비틀어져갔다. 근육은 이미 다 사라졌고 뼈 위에 살가죽만 간신이 붙어있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종아리를 문질러주다가 발을 바라보았다. 생채기 하나 없는 몸과 달리 여자의 발은 온통 상처투성이에 물집이 잡혀있었다. 제멋대로 곱은 안쓰러운 발등에 조심스레 키스를 했다. 여자의 발은 그녀의 지나온 삶의 증거였다. 그녀는 어디에서건 항상 춤을 췄다. 그녀가 춤을 추는 것은 단순한 춤이 아니었다. 하나의 생존법이었고 그래서 더욱 처절했다. 그래, 그녀는 나를 닮았어. 어쩌면 그녀는 나의 분신일지도 몰라. 남자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는데 여자는 남자의 말을 듣더니 소리까지 내며 크게 웃었다.


“분신이라고? 당신, 설마 환생 같은 걸 믿는 거야?”


“당신은 믿어?”


“그럼, 나는 믿어.”


“그럼 왜 웃는 거야?”


여자는 웃으며 불퉁한 표정의 남자의 입술에 살짝 입맞춤했다.


“그냥 당신 얼굴이 웃겨서.”


거기까지 떠올린 남자는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남자는 어린아이처럼 여자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젖무덤에 얼굴을 파묻고 심장소리를 들었다. 심장소리는 느리지만 정확하게 뛰었다. 메트로놈처럼 박자에 맞춰 뛰는 심장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남자에게 있어서 그녀의 심장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악처럼 들렸다. 그것은 빠르게 뛸 때도 천천히 뛸 때도 그녀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이제부터 조금씩 천천히 뛸 거야.”


여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여자는 평소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렇게 느리게 뛰다 갑자기 멈추겠지.”


남자는 애써 여자의 말을 듣지 못한 척 했다. 남자의 어설픈 연기가 여자는 우스웠다.


“내가 죽고 나면 나타샤와 만나는 건 어때?”


“…무슨 소리야. 냇은 동료일 뿐이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남자는 여자의 입에서 자신의 동료인 나타샤의 이름이 나온 것에 대해 조금 놀라워했다. 여자는 나타샤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면서도 남자의 입에서 나타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싫어했다. 나타샤 또한 그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를 만난 지 딱 한 달이 되던 날 러시아로 남자를 만나러 온 나타샤는 여자의 병명이 적힌 신상파일을 남자의 얼굴에 던지며 말했다.


“그 여자는 곧 죽어. 멍청아.”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하자 그녀는 러시아어로 뭐라고 소리치며 나갔다. 나중에 여자에게 물어봤지만 웃기만 하고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랬던 주제에 맘에도 없는 말을 하는 여자가 귀여워 남자는 여자의 콧잔등을 살짝 때리며 말했다.


“바보 같긴. 나타샤는 나보다 좀 더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야해.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럼 나는?”


여자는 마음이 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당신은.”


“나는 이미 정상이 아니라서?”


남자는 여자의 마른 팔을 거칠게 잡았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다는 생각에 금세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그 잠깐 사이에 희고 마른 팔뚝위에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버렸다. 남자는 벌써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손자국을 살살 어루만졌다.


“아니. 당신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니까.”


남자의 진지한 말투에 여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빗방울처럼 맑고 투명한 웃음이었다.


“역시, 당신은 여자를 기쁘게 하는 법을 알아.”


“처음 듣는 소리군.”


“다행이네.”


여자는 푸스스하고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남자가 사랑한다는 말에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언제 떠나든 잡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여자는 한 번도 남자의 고백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 * *


 


죽음은 천천히 그러나 갑작스러운 순간에 다가왔다. 죽음이란 것은 결코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는 갑작스럽게 죽어버렸다. 교통사고였다. 갑작스럽게 인도로 뛰어든 자동차를 피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의 몸이 예전처럼 재빠르기만 했더라면 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장례식조차 가지 못했다. 그의 직업이 직업인만큼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대신 멀리서 여자의 장례식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장례식은 조촐했다. 여자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여성은 목 놓아 울다 혼절을 했다. 그러나 남자는 울지 않았다. 그녀가 그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는 것은 지겨워.”


여자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여자의 관이 묻히고 가족들이 떠나고 난 뒤에서야 남자는 그녀의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 그녀의 다 낡은 발레슈즈를 비석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회색빛 비석 위에 놓인 분홍색 발레슈즈는 마치 돌 위에 핀 꽃처럼 보였다. 남자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2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남자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위로했다. 그러나 아마도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자를 믿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였는지 남자는 너무 지쳐보였다. 그리고 나는 누구였지?


차가운 빗방울이 콧잔등을 때렸다. 추위와 배고픔이 꿈에서 현실로 나를 끌어내렸다. 남자와 여자가 나온 꿈 따위는 쉽게 잊혀졌다.


런던의 날씨는 언제나 좋지 않았다. 러시아만큼은 아니겠지만 확실히 추웠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하얀 김이 솟았다. 나는 낡고 헤진 외투를 좀 더 단단히 여몄다.


“바트으…….”


동생은 여전히 꿈에서 깨지 못했는지 허리춤에 매달려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빗물을 손에 받아 동생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나도 나이가 많지는 않았지만 동생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어렸다. 동생은 몸이 좋지 않았다. 동생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결코 동생을 병신이나 멍청이로 불러본 적은 없었다. 만약 누군가 그딴 말을 내 앞에서 썼다면 그 새끼는 진작 얼굴이 아작 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동생은 ‘좀 느린 아이’였다. 그 대신이었을까, 동생은 노래를 잘 불렀다. 발음은 어눌했지만 노래를 무척이나 잘했다. 동생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면 동전 몇 개는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짓도 못하고 있었다. 이 더럽고 좁은 골목에도 다 주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빗물로 얼굴을 씻어내자 어느 정도 잠이 깼는지 동생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동생의 새까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기분이 좋았는지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며 녹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동생과 나는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같은 날 같은 곳에서 버려져있었다고 서커스 단장은 매일같이 말했다. 형제는 한 몸이라며 동생이 잘못을 한 날에는 나도 함께 맞고 굶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런 좋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서커스에서 배운 거라고는 활쏘기뿐이었다. 나는 매일 밤이면 동생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활을 쏘아야만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 동생의 이마를 맞출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한 번도 사과 대신 동생을 맞춘 적은 없었다. 주먹보다 작은 사과의 정중앙을 꿰뚫을 때마다 모두가 박수를 치며 돈이나 꽃을 던졌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 동생은 웃는 얼굴로 그것들을 주웠다. 돈은 모조리 단장의 주머니로 들어갔고 동생은 꽃을 엮어서 머리에 쓰기도 했다. 꽃은 먹을 수도 없지 않냐, 며 한마디를 쏘아붙이면 동생은 예뻐어. 라고 바보처럼 웃었다. 기집년도 아니고 뭐가 좋은지. 하지만 동생의 새까만 머리 위에 올라간 꽃들은 사과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단장의 폭행은 점점 더 심해졌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살만은 했다. 동생의 머리를 뚫어버리는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서커스단에서 계속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서커스단에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장님이 노래를 부르면 동정심을 얻어 돈을 더 잘 벌수 있다며 동생의 눈을 불로 지져버리려는 단장의 등 뒤에 화살을 쏘았다. 단장이 쓰러지고, 나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동생을 데리고 서커스단을 도망쳐 나왔다. 단장의 주머니에서 들고 온 그날의 입장료는 런던으로 오는 기차표로 다 써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거리에서 지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구걸을 하거나 좀도둑질을 했다. 동생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동생을 탓할 수 없었다. 동생이 귀찮아질 때도 있었지만 만약 동생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거리에서 약을 빨고 어디서 뒈졌을 것이었다. 동생이 있는 것이 나에게는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동생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내 다리에 매달려서 바아트 라며 내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평소보다 너무 힘들었다.


“바트으.”


오늘따라 동생은 내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매치기라도 하려면 시내로 가야하는데 나를 꼭 붙잡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는 동생 때문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변명을 하자면 배가 너무 고팠고 비에 젖어 너무 추웠다.


“잠깐이라도 너 혼자 있어봐!”


떨어지지 않으려는 동생을 밀쳤다. 비가 온 뒤라 동생은 물웅덩이에 빠졌다. 그 와중에도 계속 내 이름을 불렀다. 차라리 고아원에 보내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이 찾아올까 두려워 그 동안 떠돌아다닌 거였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동생은 상관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길거리에서 아사하느니 차라리 고아원에 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나는 동생을 옆구리에 끼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동생의 얼굴이 점점 파리해졌다. 벌써 며칠 째 입에 넣은 것이라고는 이 빌어먹을 빗물뿐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꾸 축축 쳐지는 동생의 몸이 느껴졌다. 동생은 너무 울어서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우는 것은 힘을 빠지게 했다. 동생에게 울지 말라고 윽박질렀지만 눈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봐두었던 고아원의 문 앞에 동생을 세워두고는 돌아섰다.


“바아트. 시러, 시러! 가지 마아..마..”


나는 동생의 외투를 한 번 더 여며 주었다.


“바트으. 가지 마. 가지 마. 혀엉.”


동생은 숨쉬기도 버거워 보였다. 그러나 숨을 헐떡대면서도 끊임없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가늘고 연약한 목소리는 빗줄기를 뚫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나는 귀를 막고 도망쳤다.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내가 없어지면 동생은 살아남을 수 없을 거였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거리의 죽음은 너무 흔했고 나까지 울어버리면 정말 흔한 죽음으로 남을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정말이지, 비가 오는 날은 정말 최악이었다.











3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꼬리처럼 연달아 이은 폭발음이 머리를 울렸다. 바튼은 귓구멍을 틀어막고 있던 귀마개를 꺼내 멀리 던지고는 혹시라도 신체에 이상이 생겼는지 점검을 했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자신의 눈앞에 광경은 이상하기만 했다.


폐허가 된 빈터에 어린 소녀가 홀로 서 있었다.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혹시 적의 함정인가 싶어졌지만 몸은 이미 소녀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보다는 눈앞의 사람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폭탄이 눈앞에서 터졌지만 간발의 차이로 소녀를 품에 안고 구덩이로 굴러 떨어졌다. 바튼은 품에 안긴 소녀를 향해 말했다.


“조금만 참아.”


저를 구해주셨군요.


소녀는 작은 손을 빠르게 팔랑거렸다. 수화였다. 폭음이 울리는 상황에도 아직도 대피하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녀는 귀머거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바튼은 재빠르게 무전기를 켰다.


“냇. 여기 민간인 생존자가 있어. 본부와는 일곱 블록 떨어진 곳이야. 지원 바란다.”


“뭐? 확실해?”


나타샤의 놀란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서도 똑똑히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생존자들은 대부분 대피소로 피신 시켰다. 특히나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였다. 굉장한 폭음들과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모두에게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으니 아직도 대피를 못한 민간인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지원이 어려운데. 빠져나올 수 있겠어?”


역시나 지원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아군의 지원도 없이 소녀를 들고 혼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적들의 저항은 거셌고 쉴드의 일손은 턱없이 부족했다. 바튼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먼지가 내려앉아 새카만 얼굴위에 겁에 질린 녹색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소녀가 바튼의 손을 꼭 쥐었다. 너무나도 작은 손이었다.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걱정 마. 버리지 않아.


어설픈 수화였지만 어떻게든 이해했는지 소녀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입술을 읽을 수 있어?”


조금요.


“수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부모님은?”


소녀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고아인가?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야?”


책을 사러 나왔는데…


소녀가 품안에서 점자책을 꺼내 보여주었다. 동화책이었다. 바튼도 아는 동화였다. ‘행복한 왕자.’ 동생이 가장 좋아하던 이야기였다. 동생의 나이가 소녀나이쯤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바튼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동생과 달리 소녀는 똑똑해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소녀의 얼굴에서 동생의 얼굴이 겹쳤다. 벌써 이십년도 더 되어가는 일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니었다. 특히 지금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사양해야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바튼은 소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 한 번 해보기로 하지 뭐. 바튼의 손끝에 뜨뜻한 것이 느껴졌다. 흘깃 내려다보니 소녀의 옆구리 쪽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상처가 꽤 깊은 듯 소녀의 원피스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빨리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소녀는 겁에 질린 나머지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바튼은 하얗게 질려있는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노래는 잘하니? 노래 한곡만 하다보면 금방 도착할걸.”


바튼은 아차 싶어져 소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말을 못하는 아이에게 노래를 하라고 하다니. 바튼은 바보같은 말이었다며 자책했으나 소녀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벙긋거리기 시작했다. 바튼은 소녀의 노랫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 * *


 


“이제 그만해.”


자꾸 나타나는 적들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래도 무사히 본부에 올 수 있었다. 바튼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구급대원을 찾아 소녀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소녀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소녀의 품안에서 동화책이 툭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그만해. 바튼.”


냇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그제야 바튼은 그녀가 뜻하는 표정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지키지 못했다. 바튼은 자책했다. 소녀는 이미 죽은 지 한참 지나있었다. 품안의 온기는 어느새 싸늘히 식어있었고 그것은 허망하리만큼 아득했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고 소녀의 가녀린 목은 꺾여 있었다. 바튼은 소녀를 한 번 더 꼭 안아 준 뒤 소녀를 대지 위에 뉘였다. 소녀의 붉은 원피스 위로 빗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적들의 진압이 완료 되었다는 무전이 들렸다. 비가 쏟아져 내렸다. 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다시 찾아 온 평화에 눈물을 흘렸다.


 


 


 


 


 

4


 


 


비가 내렸다. 황금빛 위대한 도시가 물안개에 휩싸였다. 물은 고요함을 불러일으켰다. 아스가르드인들은 간만에 찾아온 비에 긴 전쟁을 잠시 중단하고 고단한 몸을 달랬다. 비는 이둔의 사과를 살찌어줄 풍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비는 재수 없는 날의 상징일 뿐이었다.


비만 오면 나의 주인은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물에 젖으면 마법을 쓰지 못했던 주인은 비가 오는 날이면 하늘이 주인을 가둔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변함이 없는 듯 주인은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주인의 옆에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불호령이라도 떨어질 줄 알았는데 주인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질책하지 않으셨다. 다만 내 앞에 활을 던졌다.


“비가 그치면 갈 곳이 있다.”


드문 일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물론 비가 그친 뒤에도 주인은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반문하지 않고 활살 통을 등에 매며 나갈 차비를 했다.


주인은 남들의 이목을 피하려는 듯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서 산을 올라갔다. 산길이 너무 험해 산 중턱에 말을 묶어놓고 정상까지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나는 본디 천한 자라 험한 산행이 힘들지는 않았으나 주인은 힘이 드는 것 같았다. 나는 주인을 업고 갈 것을 제안했으나 주인은 도리어 버럭 화를 냈다. 한참을 올라가다보니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발견했다. 그냥 뛰어넘기에는 그 폭이 제법 넓어보였다. 나는 최대한 주인의 발에 물이 닿지 않도록 웅덩이 위에 바짝 엎드려 주인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청했다.


주인은 주저 없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갔다. 나는 진창에 얼굴이 처박혔지만 그것이 화가 나거나 하지 않았다. 너무 당연했다. 주인은 웅덩이를 건넌 뒤 나에게 고개를 들라고 명했다. 엉망진창인 내 얼굴이 우스웠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나의 충실한 신하인가?”


“네. 나의 주인이시여.”


주인은 몇 번이나 그렇게 물어보았다. 무언가를 확인받으려고 하는지는 몰랐지만 나는 그때마다 대답했다. 나는 당신의 신하라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다면 다음 비가 내릴 때까지 산에서 내려오지 마.”


남자는 그 한마디만을 명하고 마법을 이용해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마법을 쓰면 되는 것을 나의 주인은 왜 굳이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권한이 아니었다.


나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이 지나도 비는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 성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결국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나는 산을 내려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성은 불타올라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반역자의 부하다!” 라고 소리치며 나를 감옥에 처넣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며칠 사이에 주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언제나 단정하던 머리는 산발이었고 갑옷은 다 뜯겨 져 있었다. 언제나 부드러운 땅만 밟던 그가 맨발로 서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나는 주인을 계속 바라보았다.


“어리석긴. 너를 날려 보내주었는데도 자꾸 다시 돌아오는구나.”


“저는 이미 날개를 잃었습니다.”


“나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 너도 함께 불에 태워지고 싶어?”


“괜찮습니다.” 라고 답하려고 했으나 말하지 못했다. 주인이 나의 혀를 뽑아버렸기 때문이다. 주인은 가끔씩 심술을 부렸다. 그것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나 그것이 주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끔찍하리만큼 커다란 고통이었으나 참을 수 있었다. 주인은 피를 뚝뚝 흘리는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복면을 쓴 남자는 주인과 나를 끌고 갔다. 높은 단상 위에는 장작이 높다랗게 쌓여있었다. “반역자를 처단하라!” 군중은 외쳤다. 젊은 왕이 나를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너도 이 반역에 가담했는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려 했으나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으으, 하는 소리만 났다. 그제야 주인이 나의 혀를 뽑아버린 것을 기억해냈다. 왜 그러셨습니까, 주인이시여. 나는 처음으로 주인에게 반문했다.


“저 자는 내버려두지.”


나는 멍하니 주인이 끌려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광기에 휩싸인 관중들은 쉽게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고 그의 죽음은 쉽게 결정되었다. 기묘하게도 왕좌의 앉은 젊은 왕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의 주인은 묶여 있음에도 미소를 지었다.


이내 주인의 발아래에 불이 붙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입을 벌려 나를, 나의 주인과 함께 죽여달라 외쳤으나 그들은 나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나는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랬다. 비가 쏟아져서 저 불을 꺼트려주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불은 기세를 더했고 주인은 금세 화마에 잡아먹혀버렸다.


 


* * *


 


주인이 있던 자리에는 까만 재만 남아있었다. 나는 손톱이 빠질 것처럼 땅바닥을 긁었다. 손톱 아래에 주인의 흔적이 쌓였다. 주인이 왜 죽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가 반역을 꾀했다던가 하는 이유 같은 것은 나는 몰랐다. 나는 그저 그의 신하였으니. 나는 입을 열어 주인의 이름을 내뱉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5


 


 


사막에 비가 오는 날은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너무 거세고 세차게 내려서 내가 있는 곳이 사막이란 것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나는 빗줄기에 흐려지는 시야를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높은 곳에 올라가 크레이터 주위를 감시하던 도중 한 남자가 눈에 띠었다. 바로 콜슨에게 알려 어떤 경로로 침투를 했는지 알아보라고 했으나 돌아온 답은 ‘모른다’였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곳은 레벨 7구역이었다. 수백 대의 감시 카메라와 훈련 받은 수십 명의 요원들의 눈을 피해 출입금지 지역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나 나타샤, 콜슨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힘들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법을 썼던가. 하여튼 수상한 자임에 분명했다. 나는 활을 꺼내 남자를 향해 조준했다.


“명령해주십시오. 쏠까요?”


남자는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남자의 얼굴은 너무 익숙했다. 남자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온 세상에게 버림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남자를 향해 활을 쏠 뻔했지만 다행이 그러지 않았다. 아니 왜 다행이라고 생각한 거지? 스스로에게 반문했으나 알 수 없었다. 남자를 쏠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결국 그를 쏠 수 없었다.


남자는 요원들에 의해서 쉴드로 잡혀왔다. 잡혀 온 남자에게 콜슨이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으나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남자는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입이 없다는 듯 자신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수상하다는 이유하나로 사람을 오래 가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를 발견 했던 곳에서 큰 에너지 파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우연이기에는 너무 교묘했기에 함부로 보내줄 수도 없었다. 쉴드는 기묘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연구하고 세계를 지키는 정부기관이었다. 나와 콜슨은 심문실에서 나와 감시카메라로 그를 관찰했다. 우리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남자는 허공을 향해 몇 가지 알 수없는 말을 했다.


“내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아버지는 나를!”


“토르!”


“나는 돌아가지 않겠어!”


“아버지가 나를 버리셨구나…….”


남자를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쉴드의 힘으로도 신원조회가 되지 않는 이 남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골머리를 썩고 있던 신기한 현상들에 대한 조언들을 몇 마디씩 해주었다. 결국 쉴드의 결정은 그를 쉴드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나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을 쉴드에 들이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콜슨의 부탁에 의해 이 남자를 떠맡게 되었다.


남자는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어느새 토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만 그렇게 부르던 것이 점점 이름처럼 굳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에게 토르라고 했을 때 가장 큰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이름이 토르라는 것이 퍽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토르라고 부를 때마다 살짝 당황하면서도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이 그를 그렇게 부르게 만들었다.


토르는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그러니까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처럼 굴었다. 너무 간단한 것들도 이해하지 못하고 처음 겪어 본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그가 척척 설명 해내는 수학공식이나 물리현상에 대한 설명을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토르는 금세 적응해 도리어 나를 놀리곤 했다. 나타샤와는 앙숙이었고 콜슨에게는 건방지게 굴고는 했지만 금세 혼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냇이나 필이라고 부르며 그들과 사이가 좋았다.


나는 그의 친구, 그쯤이 된 것 같았다. 그가 현장요원이 아니라 사무직요원이라 많이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를 만날 때면 세계 각지에서 사 온 디저트들을 그의 자리에 말없이 놓았다. 그러면 어느새 내 자리에는 그가 만들었다는 연고가 놓여있었다. 신기하게도 연고는 상처를 빠르게 낫게 해주었다. 한 번은 토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사가지고 온 타르트를 콜슨이 먹어버려 그날 콜슨에게 로키가 꽤나 심한 장난을 쳤다고 했다. 내근직 주제에 그렇게 빠른 몸놀림이라니. 라며 콜슨이 투덜거렸지만 그 이후로 퇴근 후면 둘이서 종종 디저트가 맛있는 곳을 찾아다니게 되었다고 나타샤가 말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약간 소외감을 느꼈다. 둘은 셋이 되고 셋은 넷이 되고 어느 새 토르는 쉴드 안에서 동료로 인정받았다. 둘만 있게 되는 날은 더욱 드물게 되었지만 어쩌다 둘만 있을 때는 뉴멕시코 때의 일을 가끔씩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이야기일 뿐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것도 좋았다. 임무가 끝나고 가면 맞이해주는 친구, 그 비슷한 존재가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쉴드의 연구실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던 날, 사망자가 오직 그뿐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에는 그것이 참 원망스러웠다. 그의 시체도 찾지 못해 장례식은 치러지지 못했다. 모든 쉴드의 요원들이 그러하듯 그 또한 가족이 없었기에 그를 아는 쉴드의 사람들은 아주 잠깐의 묵념의 시간을 가지고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6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그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로키.”


그의 진짜 이름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다. 그 수많은 세월동안 단 한 번도 로키의 이름을 부른 적 없다는 듯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름을 불렀다.


“로키, 이제 그만 하자.”


“벌써 지친건가? 에이전트 바튼?”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정말 지쳐있었다. 로키는 자신의 앞에 나타났고 다시 사라졌다. 그는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 그리고 현실과 꿈까지 모두 다 지배했다. 나는 절망했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로키.”


“글쎄?”


로키의 질문은 나에게 너무 어려웠다. 로키는 몇 번이나 나의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에 나타나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달아났다.


“오, 나의 충직한 신하, 가족, 친우이며 사랑스러운 연인, 그리고 나의 구원자.”


로키는 나의 얼굴을 잡고 입술에 살포시 입맞춤했다.


“이제 포기해.”


그리고 다시 로키는 몸을 감추었다. 이번에는 과연 어디서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로키를 찾으러 따라다닐 것을 알았다. 그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내가 포기할 수 없어지잖아.”


비가 내렸다. 죽음과 생의 교차 속에 만남은 계속 되풀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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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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