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ep BLUE sea 下

2018. 6. 9.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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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ep BLUE sea 中

글/긴 2018. 6. 9. 17:47

 2014년도에 발간한 스팁로키 회지입니다. 

'만약, 캡틴아메리카가 70년대에 깨어났다면?' 이란 주제로 쓴 IF물.




The deep BLUE sea 中

(Steve Rogers X Loki) 

 

 

 

 

 

 

 

 



 


4


 

 

 

 

 

  

전쟁은 계속 되었다로키는 언제어디에서나 존재했고 갑자기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나기를 반복했다나는 이 기묘한 동거인에 대해 익숙해져갔지만 전쟁은 그렇지 못했다.


이미 한 번의 전쟁을 치러봤으니 이제 전쟁에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으나 베트남전은 전혀 다른 종류의 전쟁이었다무기도 달랐지만 무엇보다 상대가 달랐다베트남에서 만난 적들은 레드스컬의 군대보다 더 무시무시했다그들에게 최신식 무기는 없었지만 길에서 만나는 모두가 적이 될 수 있었기에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젊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나 노인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폭탄을 짊어지고 달려들었다순박하게만 보였던 사람들이 돌아서면 등에 칼을 꽂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무엇보다 용서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행동이었다무고한 민간인들을 방패로 삼아 위협했다그들의 비열한 방식은 우리 모두를 질리게 했고 끝내 나에게도 큰 상처를 입혔다그들이 성공한 것이었다.



 

* * *



 

막사로 돌아온 나는 손에 물든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내가 잘 아는 소녀의 피였다소녀는 연합군에게 호의적이었던 이장의 손녀였다이제 막 열일곱이 되었는데 부대원들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그녀가 가르쳐준 베트남어는 제법 쓸모가 있었기에 나는 간간히 소녀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었다부대원들은 소녀를 나의 현지처 정도로 생각한 듯 놀리곤 했다짓궂은 놀림에 얼굴을 붉히던 소녀가 나에게는 여동생처럼 느껴지기만 했다그랬기에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처음 보는 죽음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반군에게 잡혀 억지로 다이너마이트 조끼가 입혀졌을 때의 모습은 결코 쉽게 잊혀질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과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정당하다.(All´s fair in love and war) 좋은 말이야안 그래?

내가 알던 전쟁은 이런 게 아니었어!”


나는 로키에게 소리치며 분노를 터트렸다그는 마치 죽음의 신처럼 전쟁터를 쏘다니며 사람들의 죽음을 기꺼워했다몇 번이나 그에게 그러지 말아달라며 부탁했으나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이런 참혹한 상황에서조차 태연한 그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불쌍한 캡틴아메리카.


로키의 가느다랗고 섬세한 손이 내 눈물을 닦아주고 나서야 내가 언제부터인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불쌍하고 미욱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얼굴이 나에게로 불쑥 다가왔다심해를 닮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로키는 나를 위로하려는 듯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 곳곳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해주었다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내 눈물을 핥았지만 나는 거절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눈물만 흘렸다.


 


* * *



 

여전히 전쟁은 계속 되고 있었지만 나의 전투는 끝이 났다본국으로 귀환하라는 통지서를 받아든 뒤 겁쟁이처럼 안도감을 느꼈다한시라도 빨리 이 악몽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6

 

 

 

 

 


 

반년 만에 다시 찾아 온 조국은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보다 더 낯설게만 느껴졌다길어진 전쟁에 여론은 반년전과 판이하게 달라져있었다신문이나 라디오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제멋대로 떠들어댔다독립기념일이었지만 기념일을 축하하는 이들보다는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거리행진이 더 눈에 띄었다그들 중 하나가 다가와 나에게 전단지를 주려고 다가왔다다리 한쪽은 없었고 양팔의 피부 모두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그는 나에게 전단지를 내밀며 말했다.


이게 다 망할 놈의 고엽제 때문이죠.”


나는 도망치듯 그 거리를 벗어났다고엽제의 사용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당시 미로 같은 숲의 지형을 파악하기도 전에 게릴라들은 공격을 했고 나무들은 적의 몸을 숨겨주는 방패였다나와 부대원들은 나침반을 잃어버린 여행객들처럼 숲 속 이곳저곳을 헤매다 간신히 본부로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빌어먹을 놈의 나무들모두가 나무만 없어지기를 바래왔다그랬기에 정부에서 비행기로 고엽제를 뿌린다고 했을 때 우리는 모두 기뻐했었다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동료들이 피부를 벅벅 긁으며 기침이 잦아져도지나가던 여자들의 품에 안긴 아기의 기형적인 팔다리에도 자신은 몰랐다그것이 사람들을 좀먹는 독약인줄 정말로 몰랐다.


정말 몰랐어스티브?


언제나 그랬듯이 로키는 슬며시 나타나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로키가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렀다상냥함에 울분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변명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정말로 몰랐어그들을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어.”

그래당신은 몰랐겠지그들이 원했던 것을 주었겠지.


로키는 교활한 앵무새처럼 말을 되풀이하며 나를 놀리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왔다고 말해도 믿지 않았어!”


로키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보는 얼굴로 혀를 찼다.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지 않아그것은 그들의 본성이 아니야.

사람들은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전쟁은 끔찍해누구나 아는 사실이지하지만 계속 반복되지예전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듯 말이야.


로키는 예전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듯 나의 입술에 키스했다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이 끔찍하게 느껴졌지만 반대로 그것이 얼마나 유혹적이고 감미로운지 차마 떨쳐낼 수 없었다그의 손길을 뿌리치기는커녕 그의 얼굴을 잡고 키스에 응했다.


전쟁이 있는 한 사람들은 너를 원할 테지.


끔찍한 말이었다그리고 너무 듣고 싶은 말이었다나는내가 너무 끔찍했다.


당신이 깨어나서 전쟁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을 때사람들이 아직도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로키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그의 입을 막고 목을 조르고 싶었다그러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기쁘지 않았어?


나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화가 났다머리를 부여잡고 최대한 힘을 쥐어짜내어 간신히 말했다.


제발사라져

고지식하긴.


로키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자취조차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졌다방안에 나만이 홀로 남았다.






7

 

 

 

 

 

 

 

군사재판에 회부한다는 명령서를 받아든 뒤 나는 S.H.I.E.L.D 에 가기로 했다페기와 하워드가 만든 조직이었으며 이번 베트남 전쟁의 주축이 된 곳이었다물어볼 것이 너무 많았다그들이라면 내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대체 이 기사들은 뭐야어떻게 된 일이야?


나는 가판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사온 신문다발을 그들에게 내던지듯 펼쳤다제대한 군인들의 열악한 처우나 민간인에게 자행 된 가혹행위고엽제로 인한 피해사례들비인간적인 행위윤리에서 어긋난 참상


사진은 대부분 참혹했다한눈에 보아도 피해자들이 군인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처음에는 베트남군대에서 자행된 범죄행위인줄 알았으나 나 또한 참전한 군인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이뿐만이 아니었다베트남전쟁을 발발시켰던 통킨만 사건이 사실은 미국의 조작이었다는 증거가 밝혀지고 있었다


나에게 설명을 해줘야지나를 그곳에 몰아넣었으면서!”


나의 질문에 그들은 답하지 못했다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가혹한 비난에 어쩔 줄 모르는 듯 보였다페기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감추듯 쓸어내리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모두 사실입니다절 경멸해도 좋아요.”


확인사살과도 같은 말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맸다지금까지 정의라고 확신했던 일들이 모두 살인행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당장 이 모든 것들을 멈춰야 했다.


불쌍한 친구들의 얼굴을 보라지너에게 부끄러워하는 모습 말이야하지만 너도 그리 좋은 사람만은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할 텐데.


로키는 혀를 차며 비아냥댔다로키의 말대로 나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대공황의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살아왔으며 전쟁에서 크고 작은 전투들을 수없이 치러왔다생사를 넘는 일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만들었다성경의 십계명 중 반 이상은 어겼을 것이었다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었다그러나 단 한 번도 내 안의 기준이 되던 신념이나 정의가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자네가 모르는 게 있어!”


하워드가 다급하게 나를 뒤돌아 세웠다.


우리는 자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믿었어헌데 발굴 작업에는 돈이 아니라 군대의 힘이 필요했어베트남 전쟁 덕분에 페기는 장군이 되었고 덕분에 자네를 찾을 수 있었어우리는 타협을 해야만 했다네.”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해라는 말이군그렇다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어타협이 타락이 되었는데!”


나는 씹어내듯 말했다그들을 믿었었고 그들은 나의 선택을 믿어 줬어야했다이럴 거였으면 깊은 바다에서 끌어내질 말았어야 했다나는 처음으로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에 후회했다.


세상에는 절대 변하지도 변해서도 안 되는 일이 있어!”


지금까지 나를 슬프게 쳐다보던 페기는 입술을 한번 꾹 깨물고는 천천히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세상은 변했어요저도 더 이상 당신이 알던 페기카터가 아니고 당신만이 변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에 머리부터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세상은 빠르게 변해갔고 자신은 도태되고 있었다그녀의 말이 정답일지도 몰랐다나를 쳐다보는 페기의 눈길이 느껴졌다그녀는 나를 낯선 것을 대하듯 나를 보고 있었다.


많은 일이 일어났다네스티브많은 일이.”


스타크 또한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젊은 과학자가 아니었다호기심으로 빛나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이 시커멓게 죽어있었다희끗희끗해진 머리나 세월의 풍파가 그의 육신만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 마모시킨 것을 알아차렸다두 번의 전쟁은 사람을 어떻게 황폐화 시켰는가나는 아주 조금 뒤늦은 것뿐인데 사람들은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자신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변했고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것을 이제는 모두 틀리다고 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재빠르게 달아났다.

 



* * *




스티브재판 말일세.”


나는 하워드의 방문을 거절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문 앞에 서서 말을 이어갔다.


그들은 캡틴아메리카의 입으로 직접 베트남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답을 듣고 싶은 거야자네는 이 전쟁이 옳았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거네.”


하워드의 목소리는 절박해보였다이번 전쟁의 책임자는 그 둘이라는 것을 나 또한 알았다.


하워드옳은 전쟁이란 건 어디에도 없다네.”

우리를 위해서 모르는 척 해줄 수는 없는 거야?”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폭죽이 요란하게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은 어둠을 찢어냈다성조기가 눈에 들어왔다미국의 가치는자신이 배워오던 신념은자신이 지키려던 것은 무엇이었나자신의 고국영원한 정의의 수호자기회의 땅그 모든 것들이 미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그러나 지금은지금은 어떻게 된 거지외로움이 한 가득 입안에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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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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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도에 발간한 스팁로키 회지입니다.

'만약, 캡틴아메리카가 70년대에 깨어났다면?' 이란 주제로 쓴 IF물.




The deep BLUE sea 上

(Steve Rogers X Loki) 

 

 

 

 

 

 

 

 



 


1


 

 

 

 

 

  

1970년 12월 18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발키리호가 그린란드의 빙산아래에서 발견되었다스타크사의 CEO인 하워드 스타크는 기자회견을 통해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웅 캡틴아메리카가 25년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살아있다고 발표했다이 놀라운 소식은 미국 전역을 들끓게 만들기 충분했다.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 등 유명 일간지의 1면은 물론이며 라디오와 텔레비전 쇼할리우드의 영화까지 모든 언론에서는 영웅의 귀환’ 이란 제목으로 캡틴아메리카에 대해 다루었다월스트리트 저널만이 미국의 주가상승에 대한 예측 기사를 썼을 뿐이었으나 그 또한 모두 캡틴아메리카의 귀환덕분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영웅의 귀환은 미국에 수많은 변화를 일으켰다인플레이션과 연이은 주가폭락으로 인해 예측되던 제 2의 경제 대공황을 벗어날 수 있던 것은 물론소련과의 군비경쟁에서 간신히 우위를 점하던 미국은 그 격차를 벌려놓는데 성공했다.


특히나 전쟁영웅의 등장으로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공화당이었다길어지는 전쟁 때문에 곤두박질치던 닉슨대통령의 지지율을 단숨에 치솟게 했고 캡틴아메리카를 베트남으로 파병해 전쟁반대론자들의 여론을 불식시켰기에 닉슨대통령의 재임이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캡틴아메리카또 다시 미국을 구해낸 영웅이었다.

 



 


2

 

 

 

 

 

 

 

마리아 스타크라네.”


눈을 뜨자 잘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가 나를 향해 말했다폭탄을 실은 비행선이 뉴욕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린란드에 불시착을 시도 한 것이 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그리고 지금은 낯선 곳에 누워있었다얼떨떨하기만 해 멍하니 상대방을 쳐다보자 그런 나의 반응에 과장된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내 부인 이름이 마리아란 말일세마리아 스타크자네가 그랬지나는 평생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할 거라고?”


그제야 나는 눈앞의 남자가 하워드 스타크라는 것을 알아챘다기억 속 하워드 스타크’ 보다 더 깊게 패인 주름과 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있었고 입가에 걸려 있는 특유의자신만만하다 못해 종종 오만하다고까지 느껴지던 미소를 가진 것은 여전했다.


좋아기억력에는 문제없는 것 같군그럼 나한테 빚진 10달러도 잊지 않았겠지?”


그의 말에 예전에 지나가듯 한 내기가 떠올랐다당시에도 무례한 내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가 먼저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했던 것이 먼저였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워드가 결혼을 할지 안할지에 관한 내기를 했었다이것으로 그가 하워드 스타크라는 것을 확신했다방금 깨어난 사람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할 만큼 뻔뻔한 이는 내가 알기로는 하워드뿐이었다그래도 그의 행동이 나름의 배려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놀랍군이 내기는 내가 이길 줄 알았는데.”

“25년이나 흘렀으니까덕분에 나한테 빚진 10달러의 이자가 제법 된다네그러니 내 돈 내놓으시지.”


하워드의 재촉에 나도 모르게 바지주머니를 뒤져보지만 손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게다가 이제 보니 입고 있는 옷도 내 것이 아닌 가벼운 운동복이었다내가 난색을 표하며 나중에라도 꼭 갚겠다고 말하자 하워드는 기다렸다는 듯 두꺼운 파일 몇 개를 내게 던져주었다.


융통성 없는 건 여전하네그 말 잊지 말게나이제 자네는 부자야나보단 아니지만.”


파일 안에는 내가 전쟁영웅으로 인정되어 대위(captain)에서 소령(major)으로의 진급명령이 적힌 서류와 전쟁 당시 지급되었던 채권들의 높아진 가치에 관련한 보고서들이 몇 장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종과 고아였던 덕분에 가지고 있던 채권들과 연금이 내 명의의 연방은행에 고스란히 잠들어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하워드는 격렬한 반응을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저 “0이 많군.” 이라고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내 말에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하워드가 콧수염이 흔들릴 정도로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그런 하워드를 보며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다한참을 웃고 나서야 하워드가 이번에는 작고 네모난 상자를 흔들며 말했다.


자네가 잠들어있던 동안 일어난 중요사건들을 모아봤지비디오테이프라는 건데 영사기 없이도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네.”


그의 과학적인 설명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집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하워드는 열정적인 선생처럼 1970년까지의 역사나에게는 미래인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달을 걸었고 마틴 루터킹이라고 대단한 흑인이 있었지덕분에 이제 흑인과 백인이 결혼 할 수 있어좋은 일이지그리고 한국전쟁이 있었고 지금은 또 다른 전쟁이 한창이라네.”


한참을 줄줄 쏟아내던 하워드는 숨을 골라내더니 다른 서류파일을 꺼내들었다처음에 내밀었던 것 보다는 얇았지만 앞면에 써져 있는 이름을 읽은 순간 나는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마지막으로이게 자네가 가장 궁금해 하는 일이겠지페기카터 는 장군(General)이 되었다네최초의 여성장군이야.”


항상 그리워하던 그녀의 소식이었다스타크에게는 미안하지만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그녀페기카터였다그녀가 지금은 장군이 되었다니그녀가 지니고 있던 강인함이나 능력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었지만 내심 놀라웠다훌륭한 군인에 있어 남녀는 상관이 없음을 그녀가 증명한 것이다그녀야말로 하워드가 만들어 준 비디오테이프를 보지 않아도 시대가 점점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훌륭한 증거였다.


지금은 두 아들의 훌륭한 어머니이자 좋은 아내라네.”


파일 안에는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가족사진도 함께 있었다조금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페기와 부부를 반반씩 닮은 아이들그녀 옆에 꼭 붙어있는 남편까지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이상적인 가족처럼 보였다나는 파일을 덮고 애써 말을 돌렸다.


그보다 자네는 어떻게 지냈나?”

이제 유부남이지만 여전히 잘나가는 천재 무기개발업자이자 세계최대의 무기상이지.”

이상한 엑스포를 열던 취미는 버렸고?”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하워드는 입술만 끌어올린 미소를 보여주었다그를 안 뒤로 처음 보는 서글픈 얼굴이었다조금 전만해도 패기 넘치던 청년의 얼굴은 순식간에 쇠락의 길에 접어 든 중년의 얼굴로 변모했다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피어올라 재만 남은 열정이었다나는 그에게 많이 변했다고 해야 할지 여전해야하다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 * *



 

맨하탄의 빌딩 하나를 내주겠다는 하워드의 제안을 뿌리치고 브루클린의 작고 아담한 집을 골라 이사를 했다그의 호의는 고마웠으나 전구 하나까지 최신식으로 설계 되어있는 하워드의 빌딩은 불편하기만 했다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요즘 물건들에 영 익숙해지지가 않았다내가 잠들어있던 사이에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청소기세탁기의 발명으로 사람들이 할 일은 줄어들었고 컬러텔레비전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전쟁 전 즐겨보던 영화 몇 편이 떠올랐다화려하기는커녕 흑백에 조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직까지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런 옛날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나 또한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방안에 들어서자 낡은 건물의 냄새가 났다삐걱거리는 마룻바닥과 구식 라디에이터가 뿜어내는 열기에 마음이 편해졌다마음이 편해지자 피곤이 몰려왔다나는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그러나 다시 잠이 드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다잠은 이미 충분히 자두지 않았던가.


지난 25년간 끊임없이 꿈을 꾸었다버키와 놀던 어린 시절 꿈이나 레드스컬과 싸우는 꿈을 꾸기도 했다때로는 페기와 춤을 추기도 했다토요일 저녁의 스토크 클럽(stork club) 안은 종전의 기쁨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붐볐고 페기는 약속대로 나에게 춤을 가르쳐주었다어설픈 춤 솜씨에 그녀의 발을 몇 번이나 밟아도 그녀는 상냥하게 웃었다페기의 리드에 따라 블루스를 추었다곡이 끝나면 그녀는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날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말에 그제야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나는 여전히 깊고 차가운 바다 아래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그 꿈은 너무 달콤했지만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너무 잔인했다나는 아직도 자고 일어나면 지금 이순간이 꿈일까 무서웠다.






3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와 동시에 샴페인을 터트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새해 축하인사를 건넸다거리는 새해를 맞이하여 터지는 폭죽을 구경하는 가족들과 서로 껴안고 키스하는 연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미국은 전쟁 중이었지만 사람들은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보다는 지금 당장의 평화를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새해에도 행운이 있기를 빌게요로저스 대령.”


뒤를 돌아보자 감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린 페기 카터가 서 있었다눈가와 입가의 주름이 무색할 만큼 그녀는 여전히 우아하고 매력적이었다그녀를 공식석상이 아닌 곳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그녀를 향해 경례를 했다.


카터 장군님.”


격식을 갖춘 인사에 그녀는 살짝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경례가 아니라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받아주었다나는 실례를 범했다고 느끼며 다시 악수를 청해야하나 고민했지만 결국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나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해 그녀의 옷차림을 칭찬했다.


그런 로저스대령은 오늘도 군복을 입으셨군요.”

사실솔직히 말하자면 옷을 입는 것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페기는 나의 어설픈 변명을 쳐낼 만큼 모진 사람은 아니었다나의 장단에 맞추어 애써 활발한 척나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잡아주었다.


예전부터 당신 옷차림은 제 취향이 아니었죠."


그녀의 말에 시무룩한 얼굴을 지어보이자 페기가 웃음을 터트렸다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페기는 연회장 한가운데에 서있는 하워드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스타크씨는 당신은 벗고 다니는 게 낫겠다고 말했었죠.”


하워드와 페기는 좋은 친구이자 나의 옛 모습을 동시에 추억하고 있던 동지였다지금은 장군과 무기거래상으로 여전히 돈독한 관계였지만 그 밑바탕아래에는 아직도 친애적인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그들의 얼굴을 보니 예전 페기와 하워드의 사이를 오해했던 일이 떠올라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때는 어리고 어리석었기에 질투에 눈이 멀어 부끄러운 짓을 했었다하워드와 자신과 페기순간 25년 전의 그 날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아니요저도 이제 많이 늙었는걸요.”


페기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녀의 미소는 예전 그대로였다강인한 부드러움곧고 정직한 마음가짐외양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그 이상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웃음을 본 순간그녀에 대한 감정이 세월이 지나 옅어지기는커녕 더욱 공고해졌음을 알아차렸다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만약 발키리에 마지막까지 타고 있지 않았었다면 어쩌면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헛된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페기늦었지만 그때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지켜도 될까요?”


충동적인 감정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페기의 손을 잡았다페기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뿌리쳤다그러나 그 행동에 놀란 것은 도리어 페기인 것 같았다페기는 잡혔던 손을 감싸 쥐며 황급히 뒤로 감추었다방안에 갑작스러운 침묵이 찾아왔다허탈감과 상실감이 소용돌이 쳤다그녀와 나 사이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하워드가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어요저는 이만.”


그녀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채 감추지 못하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이미 당시의 약속은 흩어져 없어진지 오래였다나는 문득 그녀와 춤을 추던 꿈이 그리워졌다.




* * *

 



하워드를 따라 연회장 한견에 따로 마련 된 방안에 들어서자 매캐한 담배연기가 코끝을 찔렀다무리지어 있는 남자들은 끊임없이 시가를 피워댔고 하워드 또한 자연스럽게 탁자 위에 놓인 시가를 입에 물었다시가를 피우지 않은 것은 나만이 유일했다.


신문이나 TV에서 보던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지만 담배연기가 장막처럼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 확신할 수는 없었다.


캡틴아메리카이거 영광이로군자네를 만나게 되다니.”


몸이 다부진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 짐짓 친근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것은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미소 짓고 있는 얼굴과 별개로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노련한 사냥꾼을 떠올리게 했다그를 보며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워드는 남자를 미스터 피어스라고 불렀다공화당의 중추적인 인물로 나도 몇 번 들어본 이름이었다금세 그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피어스는 나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인사를 시켰다마치 예전의 춤추던 어릿광대 원숭이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그런 생각들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피어스는 한숨 돌리자며 나를 발코니로 데리고 갔다사람을 다루는데 능숙한 남자였다.


며칠 전 대통령님을 만났었지어떤가자네가 본 대통령님은.”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내가 만나 본 대통령은 전쟁에 대하여 반대했지만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을 했다물론피어스의 질문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그날 대통령은 나에게 넌지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대한 나의 의중을 물어봤다국민들은 캡틴아메리카가 직접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기를 원한다던 말에 당시에는 즉답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일지도 몰랐다어차피 잠에서 깨어난 뒤 하는 일은 대부분 라디오와 방송을 통해 청년들의 입대를 요청하는 것이었다예전에도 비슷한 일을 했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은 25년 전에도 안전한 후방보다는 나가서 싸우는 것을 원했던 터였기에 생각이 많아지던 찰나였다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있을까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피어스는 품안에서 시가를 하나 더 꺼내든 뒤 불을 붙였다.


자네도 하나 하지?”


피어스가 시가를 권유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혀를 찼다.


저 히피족들을 보게나저러니 전쟁에 이길 수 없지 않은가.”


피어스가 가리킨 곳에는 긴 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무리들이 있었다그들의 손에는 대부분 기타와 전쟁반대 피켓이 들려있었다전쟁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베트남의 선제공격에 선량한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고 군사독재에 의해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면 우리는 전쟁을 해야만 했다지난 날 레드스컬의 손아귀에서 사람들을 구해냈듯 말이다.


우리에게 자네가 필요하네조국을 위해 자네가 한 번 더 나서주길 바라네!”


피어스는 내 어깨를 붙잡았다좀처럼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 지리멸렬한 싸움을 끝내 줄 전쟁영웅을 원했다무엇보다 조국이 자신을 원했다그보다 더 큰 동기는 없었다.

 





4

 

 

 

 

 

 


베트남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맞이한 것은 가만히 있어도 숨 막히는 더위와 그보다 더 뜨거운 군인의 환영인사였다그들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앞 다퉈 나와 나에게 사인을 요구하는 이도 많았다나는 군인이었지 유명인사가 아니었기에 거절을 하고 싶었지만 내 뒤를 따라오던 공보장교가 속삭였다.


아버지 세대의 영웅이자 어린 시절의 영웅인 당신이 그 모습 그대로 눈앞에 나타났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승리를 거머쥔 듯 환호했다미국인만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다양한 국가에서 모인 다양한 인종을 보니 코만도즈 대원들이 생각났었다인종과 국가는 달랐지만 옳은 정의를 위해 함께 싸웠던 아군은 예나 지금이나 든든한 존재였다그들의 존재에 나는 당장이라도 전쟁에서 이길 것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랬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지 않아 무참히 꺾였다상상했던 것보다도 베트남은 무더웠고 한낮이면 몸은 불덩이처럼 느껴지고 아무 생각도 못할 정도로 머릿속까지 뜨거워졌다그저 서 있기만 해도혹은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내리쬐는 뜨거운 햇볕 속을 암담한 마음을 안고 억지로 걷곤 했다계속 되는 더위와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들에 우리는 점차 지쳐만 갔다무엇보다도 제일 최악이었던 것은 조국에서 들려오는 전쟁반대시위에 대한 소식이었다부정적인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나조차도 맥이 빠졌기에 부대에서의 신문과 라디오를 금지했다.




* * *



 

남자를 만난 곳은 전쟁의 한복판이었다사방에서 울리는 폭음과 그 폭음에 파묻힌 비명소리들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그 지옥 같은 곳에서 남자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운 얼굴로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등줄기로 긴장감 때문에 배어 나온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햇빛이 온 몸을 꿰뚫어 더위 때문에 옆구리와 목덜미에 땀이 배어나오는 와중에 등에 흐르는 땀은 그런 것들과 종류가 다른공포나 불안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남자는 6피트는 넘는 듯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가냘픈 느낌을 주었다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목덜미까지 내리덮은 장발을 하고 뺨이 옴폭 패인 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상한 것 투성이었지만 무엇보다 기이했던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그 깊고 짙은 녹색의 눈동자를 마주보는 순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암흑의 세계에 홀로 버려져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순간 혼란에 빠져 어슴푸레한 불안에 휩싸였다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그의 등장에 주목을 하거나 의문을 갖지 않았다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그는 유령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아니면 환상일까어쩌면 수퍼세럼의 부작용일지도 몰랐다어떤 것이 되든지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잔뜩 경계하는 나를 아랑곳 하지 않고 남자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녕다시 만나서 반가워내 이름은 로키야.


그 손을 잡은 순간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존재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로키는 실재했고 그 생각이 착각인 것 같지는 않았다나는 조용히 그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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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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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무렵 레인보우시리즈(...)로 낸 단편  회지

Mood in Indigo

Phil Coulson & Loki


 

 

 

 

 

 





 

 (커플성X 콜슨과 로키가 칭긔되는 연성, 에오쉴 봐주세요!)



정신을 차렸을 때엔 끝이 보이지 않은 드넓은 밀밭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아침 해가 밀밭 위로 천천히 떠오르자 온 세상이 황금물결로 일렁였다그 황홀한 광경은 유년시절의 어느 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괜히 감상적인 기분이 들어 눈을 감고 손을 뻗어 흔들자 잘 익은 밀알들이 손바닥을 스치며 간질였다한창을 그렇게 놀았을까나는 뒤늦게야 근본적인 물음을 떠올렸다여기는 어디지?


54년도 한정판 캡틴아메리카 피규어를 걸고 말하는데 뉴욕은 절대 아니었다나는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보았다분명히 로키의 무기에 가슴 한복판이 뚫렸었고 조퇴를 요구하는 나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던 퓨리국장님의 얼굴이 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그러나 이곳은 수술실이나 회복실도 아니었고 쉴드는 더더욱 아니었다뚫렸던 곳을 만져보았지만 아픔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상처는커녕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지금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꿈이거나 아니면 천국일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천국이라고지금까지 내가 해오던 일을 생각해보면 천국보다는 지옥이 어울릴 거였다일단은 유황불이나 뿔 달린 악마는 보이지 않으니 일단 최대한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결정했다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언덕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밀밭과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천국이라기엔 평범했다바닥이 구름으로 되어 있다든가 아기천사들이 날아다니는 곳을 상상해오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진짜 죽었구나우리는 죽음에 가까운 일들을 도맡아서 했기에 쉴드에 몸담으며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이미 십년도 더 전에 정리를 했다그 사이에 고치고 썼던 유서만 대략 몇 백 장일 것이다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은 당연히 있었지만 죽어가는 부하직원에게 퇴근을 허락하지 않는다던 상사의 한결같음이 그리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는 익숙해졌다.


사실 내 죽음이 영웅들을 하나로 모아 줄 계기가 된다면야나쁘지 않은 거래였다거기다 내 장례식에 참여해줄 어벤져스들을 생각하면 미국 대통령 부럽지 않은 장례식이 될 것이었다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족들은 내가 왜 죽었는지 평생 알 수 없다는 것그것 하나였다.


요원이 된 이후로 가족을 만난 적이 없었다나에게 있어 쉴드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몇 십년간 만나지 않았던 가족들보다 더욱 가족 같았다쉴드 요원들 외의 인간관계는 비정기적으로 만나던 연인들이 전부였다심지어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첼리스트의 얼굴을 떠오르기가 힘들었다이러니 그녀가 포틀랜드로 떠난 거겠지그래도 상황이 안 좋을 때 헤어져서 다행이었다나는 나쁜 남자친구였지만 이건 내 탓이 아니었다그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자신이 신이라고 칭하던 외계생명체의 침공아이언맨에 헐크에자신의 영웅인 캡틴아메리카의 부활까지아 맞아싸인을 받았어야 했는데캐비넷 안에 고이 모셔놓은 카드세트가 떠올랐지만 잊기로 했다.


그럼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자신의 어릴 적 영웅인 캡틴아메리카도 만나보았고 이루고 싶었던 건 모두 이뤘던 것 같다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갑자기 지평선 너머에서 큰 함성이 들려왔다소리가 너무 커서 앉아있던 땅을 울릴 정도였다들판의 동쪽과 서쪽에서 몰려오는 흙먼지가 마치 뉴멕시코에서 겪었던 기이한 자연현상을 떠올리게 했다뉴멕시코라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그 먼지구름이 점점 다가올수록 그 주체를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을 보자마자 어쩌면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꿈을 꾸고 있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뉴욕침공이니 지구를 침략하려는 뿔 투구를 쓴 우스운 악당도 다 꿈일지도 몰랐다자신은 간만의 휴가를 받아서 케이블에서 해주는 헐리우드 영화를 보다 잠든 것이 분명했다왜냐하면 바이킹 복장의 무기를 든 남자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우와아아아!”


고막을 찢으려고 작정한 듯 우렁찬 함성소리그들은 크게 웃으면서 상대방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한 대만 맞아도 죽을 것 같은데 맞으면 맞을수록 바이킹들은 더 크게 웃으며 다시 상대방을 향해 무기를 휘두른다저 웃는 모습이 어디서 본 것 같이 익숙한데나는 그 기억의 출처를 더듬기도 전에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곤봉을 피해야만 했다고개를 숙여 곤봉을 피한 뒤 남자의 복부에 주먹을 내지르자 사내는 제법이라는 얼굴로 더 거칠게 달려들었다자기보다 한뼘은 더 큰 남자에게 벗어나 무기로 삼을 만한 것을 찾았다그때 발밑으로 머리통이 하나가 굴러왔다거기까지는 많이 본 장면이었지만 정말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신참인가?”


젠장시체가 말하다니놀란 마음을 진정할 새도 없이 눈앞에 날아온 몽둥이를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 싸워대던 두 무리는 어느 새 뒤엉켜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빈 술통과 뼈들이 들판 위에 수북하게 쌓여갔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새알로 욱신거리는 눈가를 부비며 내게 몽둥이를 날린 사내를 붙들고 물었지만 정작 그는 내 옷차림이 신기한 듯 넥타이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결국 참지 못하고 사내의 손목을 잡고 엎어 메치자 그제야 내말에 대답해줄 마음이 든 것 같아 보였다.


어디긴발할라라네영웅들의 천국에 온 걸 환영함세!”


그렇게 말한 사내는 내 등을 세게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발할라들어본 적 있다뉴멕시코 사건 이후 북유럽신화를 공부했었다전쟁에서 죽은 영웅들만이 갈 수 있다는 천국의 이름이었다내가 천국에 온 것은 맞았군발할라는 아스가르드에 속한 곳이니여기는 아스가르드인가그러고 보니 주위의 사람들 모두가 토르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호쾌한 종족이군아스가르드는 모두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것인가그리고 머릿속에서 자신을 아스가르드에서 왔다고 말했지만 이들과는 정반대로 보이던 인물이 떠올랐다.


로키.”


자기도 모르게 로키의 이름이 튀어나왔다옆에 있던 사내가 갑작스레 마시고 있던 뿔잔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이번에는 침을 뱉었다마치 불결한 것을 들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로키를 아시나요?”


로키를 왜 모르나아스가르드의 둘째 왕자그리고 더러운 배반자불쌍한 패배자 아닌가.”


사내는 거기까지 말한 뒤 술로 입을 헹구었다로키에 대한 아스가르드인들의 평가가 어떤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럼 로키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아십니까?”


사내는 갈퀴 같은 손으로 턱에 난 수염을 벅벅 긁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글쎄정복에 실패하고 토르님에게 끌려온 뒤 어딘가에 유폐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난 관심 없소에잇술이 없잖아!”


사내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술통을 던지며 바닥에 벌러덩 눕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다더 이상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무리인 것처럼 보였다.


자꾸 뿔잔을 건네주는 무리에서 간신히 벗어나와 한적한 숲으로 걸어갔다아무리 죽음과 가까운 직업을 가졌다고 해도 잘린 머리통이 말을 하고 뼈가 다시 붙는 일들을 눈앞에 겪는 것은 지극히 보통사람인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말이지 아스가르드는 문명보다는 야만에 가까운 세계였다비록 그들의 기술력이나 신체 능력이 지구보다 월등하여도 기본적으로는 힘의 논리에 더 가치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사내가 말한 이야기를 다시 찬찬히 곱씹었다로키가 실패한 정복전쟁이 이번 뉴욕사태를 말한 것인가아니면 또 다른 전쟁이 있었던 것인가그것이 가장 궁금했다물론 죽기 전까지도 로키가 어벤져스들을 이기고 지구를 정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좀 더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 * *


 

콜의 아들.”


익숙한 호칭이었다토르도 저를 그렇게 불렀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부를 사람은 이 세상에 둘이었다토르와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나 또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키.”


검은머리를 한 빼빼마른 남자가 나무 위에 앉아 나른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 모습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고양이처럼 느껴져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저런 재주라면 어디 가서 굶어죽지는 않겠지만 놀라운 재주에 비해 피죽도 못 얻어먹은 모양새였다.


안녕콜의 아들.”


안녕하세요로키.”


로키는 정말 고양이처럼 사뿐한 걸음으로 나무에서 내려왔다사람을 내려다보는 특유의 시선처리는 여전해 보였다나는 미소 지으며 그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그리고그냥 콜슨입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로키는 크게 코웃음을 쳤다.


나도 알아다만 당신을 보니 토르가 미드가르드에 내려갔을 때의 꼬락서니가 떠올라서 말이지참 바보 같았지안 그래?”


그런가요다른 세계의 문명에 익숙하지 않다고 바보라고 할 수는 없죠지금 저도 딱 토르와 같은 상태인걸요.”


내말에 로키는 다시 눈썹을 찡그리며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그가 생각하기에 하찮은 인간이 자신의 말을 반박하는 것이 언짢은 것 같았다나는 로키가 내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입술을 축이며 말을 돌리려고 하는 것을 가로 막았다이런 말장난은 중요치 않았다.


로키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을 보니결국 뉴욕을 정복하겠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군요?”


정곡을 찔린 듯 매끄럽게 재잘거리던 입이 몇 번 들썩이다 결국 다물렸다계획을 실패한 악당의 얼굴이라기에는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꼴이 마치 할로윈 사탕을 뺏긴 아이처럼 하찮게만 느껴졌다.


그래너는 나에게 결코 이기지 못할 거라고 말했지어때네 말대로 돼서 기분이 어떤가인간?”


기분이요?”


그래네 말대로 이기지 못한 내가 우습겠지?”


글쎄요다행이다정도?”


로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그리고는 이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주문이라도 외우나 싶어 귀를 기울였지만 투덜거리는 소리가 대분이었다안 그래도 굉장히 말이 많은 외계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스가르드에서 본 로키는 더욱 심한 수다쟁이가 된 것 같았다.


그게 감상의 전부야나에게 복수를 원하지 않아?”


로키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자신도 그의 가슴을 총으로 뚫어버렸어야 했나하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었다게다가 그럴만한 무기도 없지 않은가아니면 무기를 가져다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분노가 일지 않았다어쩌면 자신을 쳐다보는 눈동자 때문일지도 몰랐다아니면 처음 보다 더 바싹 마른 얼굴이나 휘황찬란한 뿔 투구가 아닌 옷차림 때문에 동정심이라도 든 건지도.


그런데 밥은 먹었어요?”


뭐라고?”


로키가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듯 다시 한 번 물어봤다뭐라고?


저기 보니까 고기를 엄청 굽던데안 먹었으면 같이 먹어요.”


너는 내가 싫은 거 아니었나?”


글쎄요싫고 좋고를 떠나서 저는 지금 죽었잖아요?”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며 로키의 손을 잡아끌었다로키는 차갑게 손을 뿌리치더니 대꾸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내게서 거짓이나 다른 꿍꿍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하는 눈치였다경계하는 눈치가 정말 고양이 같았다당신이 남을 잘 속인다고 해서 저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죠라고 쏘아붙여주려던 것을 꾹 참고 로키의 손을 다시 잡으려고 뻗었다그러나 로키는 순식간에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 * *


 

자네가 여기 있는 줄 몰랐네!”


토르가 나를 보더니 숨이 막히도록 꽉 끌어안아주었다이러다간 한 번 더 죽는게 아닐까 걱정 될 정도로 열렬한 환영이었다.


하하토르숨이 막혀요.”


미안하네미드가르드식 인사는 이거였지.”


이번에 토르는 내 손을 잡고 위 아래로 크게 흔들었다몸이 위아래로 휘청거렸지만 나는 토르를 보며 반가움을 느꼈다아스가르드에 온 지 벌써 몇 주가 지났고 이곳 사람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란 걸 알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낯익은 얼굴을 보니 어딘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진작 알았다면 자네를 찾아왔을 것을그래발할라는 편한가?”


점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빌지스나입은 보았나시간이 되면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사냥을 나가보세마음껏 싸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너무 토르다운 말이라서 나는 웃음이 났다.


너무 싸워서 문제더군요.”


싸움은 아스가르드의 미덕이지자네 같은 전사라면 알잖은가.”


제가 전사인가요?”


내가 반문하자 토르는 나를 향해 다정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이미 훌륭한 전사일세.”


훌륭한 전사토르는 어리둥절해 하는 내 등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며 화통하게 웃었다진짜 전사의 몸을 가진 토르에게 훌륭한 전사라는 칭찬을 들으니 좀 쑥스러웠다훌륭한 전사는 어벤져스들이었다나는 조력자혹은 악당에게 죽은 엑스트라1쯤 이었다.


토르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가 말하길 로키가 바이프로스트를 파괴한 뒤 아홉 세계에 혼란이 와 바나헤임의 반란을 정리하러 출발해야한다고 했다토르는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헤임달을 불렀다나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토르를 향해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혹시 로키는 어떻게 됐나요?”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짓던 토르는 이내 웃어 보이며 안심시키듯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로키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지하 감옥에 갇혀있다네.”


로키가 순순히 갇혀있나요탈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테서렉트를 이용해서 지구로 왔듯 감옥에서 자꾸 빠져나오는 것이 아닐까로키라면 무언가 계략을 짜고 있을 것만 같았다그러나 토르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법능력까지 빼앗겨 도리가 없을 걸세로키의 마법은 어머니의 유산이기 때문에 거둬들일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자격이 되기 전에 마법을 쓴다면…….”


토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헤임달이 내린 빛기둥은 토르를 데리고 사라졌다토르의 답변에 나는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감옥에 갇힌 데다 마법을 쓸 수 없다면 자신의 앞에 자꾸만 나타나는 로키는 어떻게 된 거지토르에게 말해야하나그렇지만 왠지 고자질을 하는 것 같아 입을 다물기로 했다로키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보이지는 않았고 게다가 이미 자신은 죽지 않았는가상관없을 거라고 애써 생각했다.



* * *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언제보아도 발할라의 밤은 아름다웠다뉴욕의 밤과는 달리 눈부신 조명이 아닌 별무리들과 달이 은은하게 빛을 내며 포근한 적막이 주위에 내려앉았다우주와 가까이 있어서 그런가별과 달리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다하늘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자 옆에서 작게 코웃음이 들렸다역시나 로키였다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웃음소리였다.


비켜여기는 내 자리야.”


로키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슬며시 나타나서 자기를 알아달라는 듯 시위했다가 도망갔다나는 익숙하게 맞받아쳤다.


자리 넓잖아요조금만 양보해주시죠.”


로키가 비쭉이던 입매를 조금 더 누그러뜨렸다그때를 놓치지 않고 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조금 비좁았지만 쌀쌀한 날씨에 차가워진 몸이 타인의 체온으로 덥혀지는 것이 기분 좋았다.


생각보다 굉장히 넉살이 좋군.”


원래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는데전 한번 죽었으니까요.”


시끄러워.”


요새 들어 알게 된 사실인데 로키는 내가 죽음’ 이란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괴로운 얼굴을 했다아주 짧게 스쳐지나가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로키가 어떨 때 기뻐하고 어떨 때 슬퍼하는지무엇이 진심이고 거짓말인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그것은 제법 기분 좋은 일이었다심지어 토르가 로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라고 했을 때는 어처구니없게도 뿌듯함마저 느꼈다장난과 속임수의 신이라더니신도 별거 없네나는 침울해하고 있는 로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매번 하는 질문을 하기로 했다.


토르가 말하길 당신은 감옥에 갇혀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죠?”


그러자 로키는 금세 결코 마술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겠다고 하는 마술사처럼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바보 같긴내가 아무리 감옥에 있어도 이 정도도 못할 것 같아?”


얄밉게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로키는 또 다시 사라져버렸다영 솔직하지 못한 신이었다.

 


* * *


 

아스가르드로 올라온 영혼들은 다시 지구에 못 가는 거 알아?”


갑자기 나타난 로키는 이번에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내게 악담을 퍼부었다그것이 로키 나름의 안부인사라는 걸 이미 알아차린 지 오래였다잘 지내고 있냐는 말 한마디를 하는 게 힘들어서 항상 배배꼬아서 말하는 게 로키다웠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니까 괜찮아요물론 도넛이 그립긴 하지만요.”


로키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화를 냈다.


고작 그거야이 낯선 곳에 너 혼자 떨어졌는데 겨우 그거야?”


왜 로키가 화를 내는 것인지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아스가르드인들은 무신경하기도 했고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내게 친절했다와이파이가 터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원체 아날로그적인 사람이었으니 심심하지도 않았다게다가 이곳에는,


토르도 있고 그리고 로키 당신도 있으니까요.”


아무리 잘 적응하더라도보고 싶은 누군가가 없더라도 새로운 세계의 적응은 꽤나 힘든 일이다그것은 인정해야했다그랬기에 악연이었을지 몰라도 로키는 어느새 내 친구처럼 느껴졌다내 착각일지 몰라도 우리는 실제로 친구적어도 그 비슷한 관계였다로키는 내말에 모욕이라도 당한 듯 화를 내었지만 로키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그게 거짓말인 걸 눈치 챌 수 있을 것이었다.

 


* * *

 

이게 도넛인가?”


로키가 불쑥 들이민 것은 익숙한 그것이었다한손에 들어오는 동그란 빵기름에 튀긴 냄새그 위에 뿌려진 설탕까지그것도 누군가가 직접 손으로 만든 것 같은 수제도넛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봤지만 로키는 대꾸도 하지 않고 내 앞으로 도넛을 들이밀었다하긴어디서 난 게 중요하지는 않았지결국 도넛을 받아들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나 줄까요?”


도넛 중 하나를 집어 내 입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로키에게 건넸다처음에 주저했지만 입에 억지로 넣어주자 뱉어내지도 못하고 우물거렸다처음에는 인상을 쓰던 로키가 그래도 끝까지 다 씹어서 넘긴 뒤 간신히 한마디를 했다.


미드가르드인은 이런 걸 어떻게 먹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진심어린 말투에 크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제대로 안 익어서 그런 거예요.”


내가 요리사장에게 분명 제대로 만들라고 명했건만!”


며칠 전 도넛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물어보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나 보다로키의 방대한 지식에도 도넛을 만드는 방법 따위는 없었던 것 같았다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하는 것을 싫어하는 로키가 자신을 위해서 한 행위는 생각보다 더 감동적이었다작은 푸념이었는데 놓치지 않고 챙겨준 것이다로키는 내 웃음소리에 맞춰 점점 얼굴을 붉히더니 끝내는 벌떡 일어나 요리사를 찾아가 목을 날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이건 나를 우습게 보는 행위야!”


에이설마요처음 만들어보는 음식이니까 그렇죠.”


내가 마법만 쓸 수 있었다면이 정도야 금방 만드는데…….”


흥분을 했다가도 금세 시무룩해지는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로키를 달래주었다.


충분히 맛있었어요.”


진심이야?”


다행히도 로키는 자신의 머리에 얹혀있는 손에 짜증을 내기는커녕 도넛이 맛있었는지를 묻는 것에 집중했다.


거짓말이에요제가 만드는 게 낫겠네요.”


또 다시 시무룩한 표정이라니처음의 비웃음분노짜증 이외의 다채로워진 표정변화에 절로 웃음이 났다결국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어버리자 이번에는 로키의 얼굴이 사나워지더니 자신의 머리에서 내 손을 신경질적으로 내쳤다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로키의 손을 잡아 억지로 새끼손가락을 엮어 걸었다.


다음번엔 제가 진짜 맛있는 도넛을 만들어 줄게요약속해요.”


 

* * *

 

이제 제법 도넛다운 도넛을 만들어준 요리사장 덕분에 나와 로키는 사흘에 한번 꼴로 도넛을 먹는 시간을 가졌다죽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살찔 걱정은 접어뒀다는 거다원체 마른 체형인 듯한 로키는 더욱 그런 걱정 따위 없겠지도넛이 꽤나 제 취향이었는지 나와 로키는 매번 마지막 도넛을 먹기 위해 신경전을 펼쳤는데 오늘은 로키의 승리였다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을 짓는 로키였지만 칠칠맞게도 입가에 설탕가루가 잔뜩 묻은 꼴이 귀엽기까지 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로키의 입가에 묻은 설탕을 털어주기 위해 손을 뻗자 순간로키에게 뻗었던 오른팔 전체가 흐릿하게 사라졌다또 이러네무덤덤해진 나에 반해 로키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내 손을 홱 낚아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언제부터 이랬어?”


잘린 머리도 말을 하는 마당에 이까짓 손이 흐렸다 사라지는 걸로 웬 호들갑이냐고 타박을 놓고 싶었지만 제법 진지한 모습에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이렇게 손이 투명해지게 된 지는 며칠이 되었다처음에는 손끝이더니 이제는 팔까지 투명해진 것이다이것도 아스가르드인이 되는 단계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무심하게 넘겼는데 아니었나보다로키는 내 말을 듣더니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토르를 찾아가토르를 찾아가면 아버지께서 도와주시겠지.”



* * *

 


토르는 처음 보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로키의 예상대로 토르는 아버지인 오딘에게 보여줘야겠다며 아스가르드 궁의 치료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토르의 아버지오딘은 정말 신처럼 위엄이 느껴졌다한쪽 눈이 없는데도 그 기백이 대단했다토르에게는 미안했지만 토르와는 달리 정말로 ’ 같았다오딘은 나를 못마땅하게 보다 토르의 소개에 인자하게 웃으며 환영을 해주었다오딘은 나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육체는 미드가르드에 영혼은 아스가르드에 있어 둘의 연결고리가 약해진 탓이구나둘 중 어느 한곳에도 진정으로 속해있지 않으니 빨리 해결하지 않는다면 둘 다 소멸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영혼과 육체 둘 중 하나를 완전히 소멸시켜야 하지.”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다급한 내 질문에 오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영혼과 육체를 합치는 마법을 할 수 있는 건 현재는 아무도 없네.”


오딘의 말에 토르는 자신만 믿으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의 육체는 내가 처리해주지아프지 않게 하겠네약속하지.”


남을 죽이겠다는 말을 저렇게 친절하게 하다니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곁에 있던 오딘 또한 좋은 생각이라며 헤임달에게 내일 바이프로스트를 열어 놓으라고 명령하겠다며 나를 격려했다.


잘 되지 않았나콜슨이제 자네는 완전한 아스가르드인일세!”

 


* * *


 

콜슨!”


밤이 되지도 않았던만 로키는 우리가 매일 보던 장소에 이미 나와 있었다나는 누군가가 로키를 볼까 걱정이 되었지만 로키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나에게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오딘과의 대화를 말해주자 로키는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내게 질문했다.


콜슨솔직히 말해이곳에 있고 싶어?”


그걸 잘 모르겠어요.”


사실이었다나는 내가 돌아가고 싶은지 머물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언제부턴가 조금 지쳤던 것 같다매일같이 일어나는 동료들의 죽음보통사람들이라면 감당하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다쉴드는 나의 가족이자 삶이었으나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않았던 것 아니다그러나 어쩌면더 이상 아무도 죽을 일 없는 이곳이야말로 천국이 아닐까아스가르드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이 대책 없는 전쟁광들에게 언제 적응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벌써 제법 마음에 맞는 친구도 생기지 않았는가느긋하게 생각해서 한 백년 쯤 지나면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로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로키는 그런 나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다 무언가를 중얼거리고는 사라져버렸다나는 인사도 없이 사라진 로키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내일의 마지막 도넛은 내가 먹어버릴테다.


 

* * *

 

에이전트 콜슨내 말이 들리나?”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토르도 로키도 아니었다어딘가 핼쑥해진 닉 퓨리와 마리아 힐의 얼굴이었다흰색 벽지와 일정한 기계음몸 이곳저곳이 쑤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들어 간신히 얼굴의 호흡기를 치우자 소독약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정말로 돌아왔구나그러면 지금까지의 일들이 꿈이었을까믿겨지지 않아 주먹을 쥐었다 폈다했지만 손이 흐릿해지는 일은 없었다나는 좀 전부터 계속 머리에서 맴도는 이름을 내뱉었다.


로키.”


마리아는 로키가 토르와 함께 아스가르드로 돌아간 일스타크 타워가 어벤져스타워가 된 일그리고 퓨리가 어떻게 어벤져스를 하나로 모았는지 까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그러나 무슨 말을 해도 대꾸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나를 보고 힐과 국장님은 의아해하며 병실을 나섰다.


푹 쉬게당분간 휴가야.”


마리아와 국장님이 나가자마자 자꾸 한숨이 새어나왔다분명 나를 다시 지구로 내려 보낸 것은 로키였다현명한 신인 오딘은 육체와 영혼을 합칠 줄 아는 자가 현재는’ 없다고 했다그것은 현재는’ 마법을 쓸 수 없는 로키를 가리킨 것 일테지그렇다면 로키는 어떻게 된 걸까로키가 마법을 쓴 뒤 어떻게 되었을까자꾸만 걱정이 됐다로키는 마법을 금지 당했을텐데마법을 어떻게 쓴 거지쓴 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자꾸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상상력이 발휘됐다바보 같긴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돌려보내주지 않아도 됐는데아마도 로키는 내 거짓말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내가 로키의 거짓말을 알아차릴 수 있듯 말이다.


* * *


 

나는 무의식적으로 힐이 두고 간 카드 세트를 꺼내들었다그녀의 말대로라면 카드가 핏자국으로 엉망이어야 했는데 카드는 물론 상자까지 어디 한 군데 망가진 곳 없이 깨끗했다이리저리 상자를 흔들자 못 보던 메모지가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메모지에는 섬세하고 우아했지만 날카로워 보이는 글씨체로 딱 한 문장만 쓰여 있었다.

 

선물이야.


PS. 약속 잊지 마.


나는 곧 만나게 될 이 귀여운 친구를 위해 도넛을 만들 재료를 잔뜩 사두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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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

[토르로키] blood

글/긴 2018. 5. 7. 14:12

2012년도에 발행했던 토르로키 단편 회지

뱀파이어AU

blood

(Thor X Loki)


 

 

 

 

 

 

 

옥은 당신의 오른편에 있다런던은 위대한 도시였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그 이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마들이 살 것 같은 빈민가처럼 충격적인 장소들도 함께 존재했다거리는 더러운 것들로 뒤덮여있으며 평생 한 번도 머리를 빗어 본 적 없는 추악한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그러니 도시의 동쪽 끝에 무엇이 있는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런던의 동쪽 끝에 있는 화이트 채플 가(White chapel Street)는 런던의 뒷모습 가운데서도 단연 지옥과 닮은 곳이었다골목마다 매음굴에서 새어 나오는 아편연기로 자욱했다창녀들은 밤안개를 베일처럼 두르고 산책로에 서서 치마를 펄럭이며 남자들을 유혹했다때때로 사교계에도 데뷔하지 못한 미숙하고 어리석은 청년혹은 군에서 막 제대해 세상물정 모르는 장교가 멋모르고 저속한 만남에 끌려들어가 타락한 향락에 속절없이 중독되기도 했다가장 점잖은 신사라도 오페라 무대의 뒤편을 기웃거리며 여배우의 대기실을 꽃과 보석으로 장식해 구애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였다. 19세기의 런던은 아름다웠지만 죄악이 몸을 숨기고 언제든지 덮칠 준비를 하고 있는 곳이었다지옥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


 

이사벨은 도시의 밤을 헤치며 걸었다마차의 등불들이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밤의 거리는 어둠보다 은밀하며 죄악보다 복잡한 곳이었다거리는 낮의 흥겨움을 잊어버리고 아예 새로운 장소로 탈바꿈했다가스등은 꺼진 지 오래였다진한 어둠이 주변을 삼킨 채 뱀처럼 도사리고 있었다이사벨은 처음 보는 도시의 이면에 두려움에 떨며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단언컨대 이사벨은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숙녀였다그녀의 어린 동생 안젤라가 아프지만 않았더라도 그녀가 이 야심한 시간에 일어날 일도사창가 뒷골목에 올 일도 없었으리라그러나 오늘 내내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던 안젤라는 결국 입에서 피를 쏟아냈다어쩌면 결핵일지도 몰랐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사벨은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최근 주변에서 떠돌고 있는 괴기한 소문 때문인지 거리는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살인마 잭의 이야기는 아니었다잭은 이미 일주일 전 체포당해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호사가들은 죽은 살인마에 대해서 더 이상 입을 놀리지 않았다이제 런던은 새로운 살인마에 대한 소문으로 들끓었다관을 끌고 다니는 남자의 이야기였다가장 깊고 어두운 밤달빛도 비추지 않는 밤이면 집채만 한 덩치의 남자가 쇠사슬을 감은 관을 끌며 관에 넣을 산 자를 찾아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했다소문은 전염병처럼 번졌다이사벨의 등 뒤로 무서운 예감이 차갑게 스쳐지나갔다그녀는 망토를 더욱 단단히 여민 뒤 거리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이제 이 골목만 돌면 창녀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의사의 집이 나왔다이사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이때 누군가에 의해서 이사벨은 맥없이 골목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갔다골목 안에서 이사벨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었다그들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이사벨은 알지 못했지만 이 근방에서도 행동거지가 거칠기로 소문난 자들이었다.


아가씨는 하룻밤에 얼마야?”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무리 중 한명이 이사벨의 손등에 입술을 비볐다사내에게서 악취가 풍겼다.


살려주세요.”

아니 우리가 아가씨를 죽인다고 했나그냥 좀 즐기자는 거지.”

이 시간에 나다니는 걸 보니까 꽤나 밝히는 아가씨 아니겠어안 그래?”


사내들이 저들끼리 웃고 떠드는 사이 이사벨이 황급히 몸을 틀어 밖을 향해 소리 쳤다.


도와주세요누가 좀……!”


그러나 무리 중 한 명이 거칠게 손을 휘둘러 이사벨의 뺨을 쳤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맺어지지 못했다.


씨발년거 말 한번 많네.”


그가 침을 뱉으며 욕을 했다사내들의 거침없는 빈정거림과 모욕에 이사벨은 턱을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그녀의 등 뒤로 차갑고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가장 키가 큰 사내가 이사벨의 희고 가는 목덜미를 혀로 핥으며 치마를 거칠게 헤집기 시작했다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먼 곳에서 빅벤의 종소리가 울렸다.


지이익-


종소리 사이로 무언가를 끄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기이한 소리와 함께 금발의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금발의 사내는 무심한 얼굴로 걸어 들어와 이사벨의 치마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자의 뒤에서 팔목을 잡아 비틀어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

시발저거 뭐야이 새끼야너 누구야!”


자존심이 상한 사내들이 소리를 지르며 남자를 향해 몸을 던졌지만 남자는 별 말없이 차례대로 사내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그 몸놀림이 너무도 빨라 사람 같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기세좋게 달려들던 그들은 금발의 남자에게 속절없이 당했다남자는 달려드는 사내들의 머리통을 커다란 손으로 갈겨 땅바닥 위에 나뒹굴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절룩거리는 다리와 부러진 코를 움켜쥔 무리들이 결국 꽁무니를 뺐다남자가 그들을 물리치는데 걸린 시간은 열두 번의 종소리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벨은 순결한 처녀답게 뺨을 물들이며 자신을 도와준 남자를 향해 수줍게 감사인사를 했다남자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배고파토르.”


이때 남자의 뒤에서 한 소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이사벨은 깜짝 놀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소년은 안젤라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소년은 마치 어둠으로 빚어낸 것 같았다창백한 피부와 그와 대조되는 까만 머리카락까지소년의 외모는 예술가가 정성을 기울여 만든 도자기 인형과 같은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어린아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법한 순진함과 사랑스러운 무지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사벨은 소년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자기보다 한 뼘은 작은 어린아이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러나 공포는 아주 거대해 그녀를 집어 삼켰다어쩌면 좀 전의 사내들과 마주한 것이 더 안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소년은 두려움에 떠는 이사벨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왔다소년의 녹색 눈이 기이한 빛을 냈다.


이 여자가 먹고 싶어.”


소년의 흰 손이 이사벨을 향해 뻗어왔다그녀는 피할 수 없었다고양이 앞에 놓인 쥐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서있는 것이 고작이었다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녀의 몸에 남자의 손이 닿았다남자는 이사벨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하오.”


그것이 이사벨이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우드득머리가 기괴하게 틀어진 그녀의 몸이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이상하게도 이사벨은 남자에게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죽음이 너무 순식간이었기도 했지만 그 순간 마주친 남자의 눈동자를 보며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수긍했다다만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동생안젤라가 걱정이 될 뿐이었다.

 


*


 

소년은 무언가 성에 차지 않는 듯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토르토르!”


그 모습은 영락없이 떼를 쓰는 어린아이였다.


너 그 계집이 맘에 들었구나그렇지그래서 그렇게 단번에 고통 없이 죽인거지그런 거지?”


토르라고 불린 남자는 답이 없었다그 침묵이 더욱 소년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소년은 쓰러져 있는 이사벨의 가냘픈 몸을 걷어찼다소년이 힘껏 걷어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체는 몇 번 들썩이고 말 뿐이었다토르는 소년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가녀린 어깨가 위 아래로 거칠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로키.”

너의 고귀한 연인에게 이런 대우는 부당하다고 느끼는 거야?”


로키의 비아냥거림에도 토르는 침묵을 지킨 채 품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날이 선 단도가 달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토르는 익숙한 솜씨로 이사벨의 가슴을 갈랐다토르는 무릎을 꿇고 벌어진 사이로 두 손을 밀어 넣었다토르의 손 가득 순결한 처녀의 피가 담겼다토르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로키를 향해 말했다.


피가 식어간다부패하기 전에 어서 마셔.”


그러나 로키는 고개를 돌린 채 샐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년의 피 따위는 마시지 않겠어.”

어서.”


토르는 로키의 코앞으로 손을 가져갔다로키의 코에 향긋한 처녀의 피 냄새가 스쳤다로키는 자신의 입술을 진주 같은 송곳니로 짓이겼다창백했던 입술이 금세 붉게 변했다결국 로키는 어리광을 부리듯 토르의 손목에 매달려 정신없이 피를 핥아 마셨다붉은 죄악의 증거가 로키의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 * *


 

토르는 동이 터오는 것을 바라보았다유리창으로 비쳐 드는 희끄무레한 빛은 물결처럼 출렁거리며 서서히 엷어져 갔다오늘따라 더욱 몸이 꽁꽁 묶인 채 캄캄한 바다 속으로 가라앉듯, 어둠 속으로 잦아드는 느낌이었다난로의 불은 꺼진지 오래였고 시계소리만 들렸다토르는 의자에 기대앉아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토르는 점점 나쁜 일에 무디어져갔지만 오늘 밤 같은 일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특히 그녀는 자신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토르는 방안 구석에 놓인 관을 바라보았다목단나무로 만들어졌고 뚜껑 위에는 십자가 모양이 새겨져 있는 평범한 관이었지만 사실 보통의 관과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그것은 크기였다관의 크기가 보통 관의 반만 했다아이를 위한 관이기 때문이었다아이의 관을 만드는 것은 간단했다보통의 관을 만든 뒤 반으로 자르는 것이 방법의 전부였다물론 이런 관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런던에서는 아이들이 죽으면 대부분 맨몸으로 땅에 묻혔다아이를 위한 관을 만들기에는 날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죽어나갔다하지만 토르는 로키의 육신을 벌레들에게 먹히게 내버려둘 수 없었기에 로키를 위해 특별히 주문한 관이었다.


그러나 이 관이 땅에 묻힌 적은 없었다토르는 로키가 죽었던이십 년 전의 그 날을 기억했다어찌 잊을 수 있으랴그 순간부터 이 모든 절망과 공허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 * *

 

이십 년 전런던에는 또 다른 전염병이 돌았다이로 인해 도시 인구 오분의 일이 죽어 나갔다로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로키는 무척이나 아팠다토르는 어린 동생의 숨결이 점점 미약해지는 것을 알았다백방으로 알아봤으나 만나는 의사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어머니는 로키를 낳으며 돌아가셨고 불과 삼 년 전에 토르는 아버지를 잃었었다로키는 토르에게 하나 남은 가족이었다토르는 로키마저 잃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약을 구하러 토르가 집을 비운 사이 로키는 죽음과 조우했다집으로 돌아온 토르를 기다린 것은 죽음의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는 로키였다움푹 팬 뺨과 창백하고 움직임 없는 얼굴조그맣고 섬약한 모습의 로키를 보며 토르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토르는 로키를 끌어안고 뻣뻣해지기 시작한 손발을 어루만졌다토르는 품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내어 로키의 입안으로 흘려보냈다런던의 뒷골목에서 구한 뱀파이어의 피였다혹시나 싶어서 집어온 것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로키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토르는 마지막으로 이 수상한 피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미처 삼키지 못한 피가 로키의 입가로 천천히 흘러내렸다토르는 그것들을 모아 다시 억지로 로키의 입안으로 집어넣었다덕분이었는지 로키의 심장이 잠시 멈추기는 했지만 로키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로키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순간이었다그날을 경계로 로키는 점점 야위어만 갔다분명 병은 모두 나았건만 음식을 입에 넣는 족족 게워냈고 종내에는 그렇게 좋아하던 호밀 빵의 냄새조차 질색했다낮 동안이면 깊은 잠에 빠졌다가 밤이면 몽유병 환자처럼 밖을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토르는 그런 로키를 보며 걱정했다.


두 뺨은 점차 창백해지고 검은 머리커다란 두 눈곧은 콧날작은 새와 같던 걸음걸이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던 로키는 다 사라지고 침묵에 잠겨 있는 모습은 마치 어떠한 숭고한 숙명에 의해 알 수 없는 표식을 이마에 새겨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그것은 너무나도 슬프고 차분하고 동시에 너무나도 부드럽고 또 안타까웠기 때문에 로키의 곁에 가까이 가는 사람은 겨울에 핀 꽃향기에 몸이 떨리듯 어떤 기괴한 매력에 사로잡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때문에 많은 이들이 로키의 매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로키는 조금씩 탐욕과 분노와 증오에 잠식당하고 있었다정숙해 보이는 입술은 마음의 고뇌를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로키 스스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사건은 일어나게 마련이었다토르는 그 날을 잊지 못했다사라진 로키를 찾은 곳은 이웃의 정원에서였다로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그 곁에는 바지춤을 채 추스르지 못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토르는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냈다욕정적인 눈으로 로키를 훔쳐보던 이웃집 남자였다남자의 목덜미는 짐승에게 물린 듯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토르는 황급히 다가가 자신의 셔츠로 로키의 얼굴을 닦아 냈다.그리고 로키에게 무슨 상처가 난 것이 아닌지를 확인했다몇 군데 옆집남자에게 입은 듯 생채기가 있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나 더 먹고 싶어.”


로키가 입맛을 다시며 토르에게 칭얼거렸다로키의 얼굴에서 죄의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다만 배고픔에 허덕이던 로키의 얼굴이 포만감으로 빛이 났다그 모습은 마치 인간이 소와 양을 죽일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생존을 위한 살해는 죄책감을 요구하지 않았다토르는 자신이 가지고 온 약이 진짜 뱀파이어 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제야 로키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다.


토르는 로키가 다치지 않은 것이그리고 이들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더군다나 로키에게 해를 입히려고 했던 나쁜 놈이 죽는 것이었다자신의 동생은 죄가 없었다토르는 정원 한켠에 있던 돌덩이를 주워들었다.


살려…….”


남자가 바짓단을 붙들고 애원했다토르는 눈을 감고 남자의 머리통을 내리쳤다꿈틀거리던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로키는 남자의 으깨어진 머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뒷목에 이를 박아 넣은 뒤 허겁지겁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토르의 눈시울이 촉촉이 젖는가 싶더니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로키에게 있어서 그날은 토르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본 날이자 마지막 날이었다로키는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토르의 눈물을 모두 받아내기에는 자신의 손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결국 로키는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 * *


 

살롱에 들어서자 꽃향기와 고기 냄새송로의 향기가 뒤섞인 따뜻한 공기에 감싸이는 것을 로키는 느꼈다촛대 위의 촛불들이 종 모양 은제 덮개 위에서 불꽃을 피워 올리고증기가 뽀얗게 낀 커트글라스들이 서로 창백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색색의 꽃다발들은 식탁의 끝에서 끝까지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훌륭한 연회장이 그러하듯 한쪽 구석에 놓인 카드놀이 테이블 위로 금화가 쏟아지는 맑은 소리가 들려오고 부인들의 부풀어 오른 스커트가 서로 스쳐지나가며 부채 너머로 상대를 흘깃거렸다.


열아홉 살부터 마흔 살 안팎의 남녀들이 춤추는 사람들 속에 섞이기도 하고 서로 담소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들의 나이옷차림얼굴 모습은 각각 달라도 어딘가 서로 공통된 데가 있었다그들은 외양은 젊었지만 어딘가 노숙한 격조가 느껴졌다눈빛에는 날마다 정념을 만족시킨 데서 오는 고요함이 감돌았고부드러운 거동 뒤에는 특유의 욕망이 엿보였다큼직하게 이니셜을 수놓은 손수건으로 입을 훔칠 때면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들은 종종 파티를 열어 교류했다겉모습은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그들은 인간처럼 구는 것을 유희로 삼았다인간이었던 때를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몰랐다때때로 그들은 인간들보다 욕망에 대해 솔직하게 굴었다.


육체의 뜨거운 흥분과 애정으로 가득한 거대한 발코니와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고 각양각색의 희귀한 꽃으로 가득한 바구니연인들의 밀회를 위해 비단 장막이 드리워진 규방이 모든 것들이 토니 스타크의 저택을 상징해주고 있음과 동시에 뱀파이어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었다.


로키는 오케스트라의 리듬에 몸을 싣고 가볍게 움직이면서 앞으로 미끄러져나갔다때때로 다른 악기들이 잠잠해진 사이에 혼자 연주되는 바이올린의 미묘한 선율을 들을 때면 로키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로키의 미소를 이 만찬의 주인인 토니 스타크가 긴 식탁의 상석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런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풍문에 따르면 그는 여왕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그것이 영 틀린 말이 아니었는지 오늘의 연회는 무척 화려했다.


이윽고 준비된 만찬이 나오기 시작했다토니 스타크의 명성에 맞게 파티는 화려했다스페인산 포도주가 잔뜩 나오고 새우와 아몬드 즙이 든 수프파인애플이나 석류 같은 진귀한 과일들트라팔가르 푸딩 그리고 온갖 종류의 고기들이 쟁반에 담겨 나오기 시작했다화려하고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스타크답게 공작고기까지 준비가 되어있었다.


로키는 토니의 악취미라며 혀를 차며 마라스키노 술이 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진짜 진주가 박혀있는 조개모양의 접시를 손에 들고 숟가락을 입에 넣은 채 눈을 반쯤 감았다.


아직 술은 좀 이른 나이가 아니던가?”


토니 스타크가 등 뒤에서 나와 로키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자신의 엄지로 닦아낸 뒤 입에 넣고 소리 나도록 빨았다.


달군.”


토니는 로키를 향해 명백히 유혹적인 동작을 해보였지만 로키는 영리하게도 그 이면에 자신의 어린애 취향의 입맛에 대해 놀리는 토니의 심중을 알아채고는 별다른 반응 없이 재빨리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아내었다그조차 토니의 눈에는 귀엽게 보였다.


여기는 혼자 온 건가보호자 없이?”

그럼 내가 누구와 함께 와야 하지?”


로키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토니는 예상대로 날을 세우는 로키의 반응에 속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로키에게 거짓 용서를 구했다.


사과의 의미로 재밌는 걸 보여주지.”


토니가 손가락을 튕기자 제복을 갖춰 입은 급사들이 은쟁반을 하나씩 들고 나왔다그 위에는 혀를 빼물고 죽은 자들의 목이 하나씩 담겨있었다부인네들은 들고 있던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작은 탄성을 내뱉었지만 호기심 어린 눈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어때저게 바로 그 잭’ 의 시체인데.”


토니는 로키에게 속삭이며 말했다온 런던시내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칼잡이 잭의 시체였지만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는 단순한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았다이번에는 벌거벗은 남녀 열 쌍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이것이 오늘 연회의 진짜 백미였다살아있는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토니 스타크의 파티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었다.


자 여러분만찬을 즐깁시다!”


토니의 선언에 여기저기서 비릿한 피 냄새가 여기저기서 퍼져나갔다오 분 전만해도 따뜻하고 아름답던 연회장은 광기와 살육의 장으로 변해버렸다뱀파이어들은 각자 눈에 보이는 대로 이를 박고 피를 마셔댔다.  로키 또한 허기를 느꼈다눈앞에는 훌륭한 먹잇감이 제공되고 있었고 로키는 가서 구미에 맞는 음식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그러나 로키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로키!”


이때 상기 된 얼굴을 한 토르가 연회장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토르의 몸 여기저기에는 생채기가 나있었다분명히 저택을 지키는 문지기나 토르와 안면이 있는 뱀파이어와 다툰 흔적이 틀림없었다토르는 로키를 망토로 감싸 안아 재빠르게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

 


로키의 심기가 불편 한 것처럼 보였다흥미로운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었으리라고 토르는 미루어 짐작했다로키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그래서 책을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었다다 지난 일이 되었지만.

무엇이 되었든 토니 스타크는 로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자임에는 분명했다토르는 외투를 걸어두고 거울 앞에 서 있는 로키에게 다가갔다.


토르도 거울 속에 비쳐진 로키의 모습을 등 뒤에서 바라보았다그러나 거울 속에는 오직 토르 혼자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로키는 거울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토르는 로키를 돌려세워 로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로키가 여기 실제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하듯 꼼꼼하게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반듯한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다시 넘겨주었다토르의 손이 로키의 머리에서 귀로아직 다부지지 않은 턱으로 그리고 로키의 섬세한 입술을 스쳤다로키의 입술 사이로 감춰지지 않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흥분했다는 증거였다토르는 로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초록색 눈이 한층 더 짙게 보였다토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토르는 로키의 손을 잡고 간곡하게 청했다.


다시는 저런 것들과 어울리지 말아라.”


로키는 토르의 손을 매섭게 쳐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저런 것누구를 말하는 거지?”


로키의 반문에 토르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로키의 눈동자에서 조용히 타고 있는 분노를 읽어낼 수 있었다토르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길길이 날뛰었다.


뭔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그들과 나는 똑같아나도 똑같은 뱀파이어라고!”

아니로키너는 다르다!”


이번에는 로키가 아닌 토르가 분노했다토르의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그러나 토르의 분노에도 로키는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도리어 토르에게 다가가 자신과 다른 단단하고 너른 등에 뺨을 문질렀다로키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외롭고 외로운 걸나를 상대해주는 거라고는 형이 그렇게 싫어하는 토니 밖에 없어.”

하지만 그것이 어떤 눈으로 너를 보는 줄 알아?”

어차피 변태들이나 나랑 어울려주지그래 보여도 토니는 신사라고아직 나와 동침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어째서 너는!”


토르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반대로 로키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키들거리며 방안을 천천히 걸으며 우아한 손놀림으로 셔츠와 바지속옷을 하나씩 벗었다.


이십 년 전만해도 형과 나의 키는 별로 차이가 없었잖아아니 내가 조금 더 컸었어기억나?”


점점 드러나는 로키의 몸은 기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미성숙한 성기와 옅은 체모가느다랗고 곧게 뻗은 다리우아하게 균형 잡힌 몸을 가진 로키는 토니 스타크가 탐낼 만도 했다토르는 고개를 돌리지만 로키는 허락하지 않는다집요하게 쫓아와 토르의 얼굴을 자신을 향하게 만든다.


잘 봐그때와 난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여전히 어린애에 불과해쥐새끼 죽일 힘 하나 없어.”

내가 있잖느냐.”

토르나는 형제가 아니라 연인이 필요해나를 어른으로 대해 주고 만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해.”

차라리 네 또래의 여자를 만나는 건!”


로키는 모욕이라도 당한 것 같은 얼굴을 했다로키의 속눈썹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당장이라도 장갑을 내던지고 결투를 신청할 기세였다그러나 로키는 자신이 들 수 있을만한 검 따위는 없다는 것을 서글플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우스웠다 제 또래의 여자는 어떤 여자를 말하는 걸까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토르만이 모르고 있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형이야.”

너는 몹시 아팠고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내가 너를 죽게 내버려둘 리 없잖느냐.”


토르가 로키의 뺨을 감싸 쥐었다로키의 가슴 깊은 곳에서 원망과 분노가 말갛게 솟아올라왔다자신의 비참함이 가슴을 도려내듯 아픈 통증을 일으켰던 것이다처참하게 망가진 젊음욕망을 억누르며 보내야 했던 기나긴 나날들욕망의 좌절 끝에 오는 이 한없는 굴욕감.


위선자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


로키는 토르를 향해 주위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던져댔다토르는 씁쓸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로키는 힘없이 주저앉아 토르가 나간 문을 향해 외쳤다.


이십년이야 토르이십 년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그러나 나는 여전히 어린애일 뿐이잖아그것도 앞으로 영원히.”


 

* * *


 

로키는 과자부스러기와 설탕으로 손이 온통 끈적끈적해 질 때까지 과자를 실컷 먹었다토니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로키의 앞에 저택의 디저트는 모두 들고 왔다로키는 신경질이 났다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이었다.


로키가 이런 기분을 처음 느껴본 것은 아니었다어릴 적이면 로키는 토르가 돌아올 때까지 어둠이 드리워지는 문밖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그를 기다리고는 했다그가 가지고 온 피를 허겁지겁 삼키면 그는 서글프고 낯선 것을 바라보는 눈을 했다로키는 결국 찻잔 하나를 깼다.


로키는 무릎에 턱을 괴고 가만히 생각했다어쩌면 토니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토르에 대한 혐오를 연인에 대한 동경으로 착각했고 불타오르는 증오를 뜨거워지는 애정으로 오해했는지도 몰랐다그러나 여전히 폭풍은 휘몰아쳤고 정열은 타오를 대로 타올라 재가 되었지만 아무런 구원도 오지 않았다빛은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았기에 어디를 향해도 캄캄한 밤이었으므로 로키는 뼛속까지 스미는 무서운 추위 속에서 길을 잃은 채 갈 곳을 모르고 있었다토르의 품안에 안기면 텅 비고 야윈 가슴이 한결 넉넉해졌다로키의 세계에는 오로지 토르가 전부였다그것이 증오든 애정이든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토니는 저 우울한 얼굴을 한 대 쳐준다면 속이 시원하리라고 생각했다눈앞의 소년은 악마였다물론 저 작은 몸 어디 때릴 곳이 있겠느냐마는 때때로 답답하게 굴적마다 때려주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태생인 양 이것저것 요구하는 꼴이 밉지 않았다토니는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들어두고 죽어버린 녀석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작은 악마 같으니토니는 로키의 뺨에 입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시무룩해서야애인이 달아난다고.”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걸이런 비정상적인 몸.”


로키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작고 섬세한 손으로 앞섬을 풀어헤쳤다달빛에 비춰진 로키의 몸은 어린아이의 몸도 어른의 몸도 아니었다어른과 아이그 미묘한 경계에서 서 있었다그것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필요하다면 내가 위로해줄까?”


토니는 이 한없이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몸을 조심스럽게 쓸어 내렸다로키의 존재는 뱀파이어 세계에서도 희귀한 존재였다토니는 이 작고 어린 것에게 무한한 애정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토니는 다정하고 섬세하지만 뜨겁고 탐욕스러운 손길로 로키의 아랫배를 더듬었다그러나 여전히 로키의 눈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토니는 쓰게 웃으며 로키의 동그란 정수리에 입맞춤을 했다어린 것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달큰하고 비릿한 향이 토니의 정욕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는 로키의 뺨에 살짝 키스를 한번 한 뒤 물러났다.


여기까지왕자님이 공주님을 구하러 오는 소리가 들리는군.”


토니가 과장되게 손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로키 또한 토니가 칭하는 왕자가 누군지는 알았지만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고 말았다예상했던 일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안으로 토르가 뛰어 들어왔다.


로키!”


토니는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으면서 토르에게 다가갔다.


이런토르이게 얼마만이지?”


토르는 토니의 인사는 모두 무시한 채 로키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그런 토르를 보며 토니는 비웃음을 던지며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 말라고너의 공주님은 순결한 처녀니까당장이라도 유니콘을 타고 가실 정도라고아직까지는 말이야.”

닥쳐!”


핏발선 눈이 칼날처럼 번득였다토르는 분노하며 토니를 향해 단도를 휘둘렀다아슬아슬하게 토니는 몸을 피했지만 입고 있던 옷자락이 잘려나갔다토니는 아끼던 옷이 상한 것에 화를 냈다갈색 눈동자에 안광이 번뜩이고 입에서 순식간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인간주제에 감히로키만 아니었다면 당장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텐데!”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둘 사이에 로키가 조용하게 걸어 나와 둘을 가로막았다.


토르돌아가자.”


로키의 한마디에 토르는 곧바로 토니를 향한 적개심을 버리고 로키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토르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로키의 작고 부드러운 발에 쪽빛 덧버선을 신겨주었다로키는 의자에 앉아 자연스럽게 토르의 시중을 받았다.


처음과 다름없는 완벽한 복장이 된 로키가 토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토르는 로키를 안아들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마치 둘 이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구는 모습을 바라보며 토니는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 * *



 

토르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토니 스타크의 앞에 알몸으로 선 로키를 본 순간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위안에 대한 갈구이자 저속함에 대한 갈구로키를 영원히 소유 하고 싶은 갈망과 동시에 한순간의 쾌락에 대한 갈증들이 뒤섞여 자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토르는 그전까지만 해도 구체화 되지 않은 감정 덩어리가 어느새 자신의 형상을 하고 제 안에 들어앉았음을 깨달았다그것을 부정할수록 점점 제 목줄을 옭아맬 것이었다이 감정에는 어떤 날카롭고 위험한 것이 숨어 있었다그것을 눈치 채고 달아나려고 했지만 결국 뒷덜미를 채여 허우적 되었다그것은 우연이었거나 혹은 필연이었을지 모르겠다그러나 운명은 거부 할 수 없기에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 이었다토르는 결국 그 운명에 굴복했다.


토르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로키를 끌어안아 입을 맞추었다토르가 로키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자 로키의 입술이 떨렸다오래도록 지속되어온 관능의 부재에 로키의 몸은 경직되어있었다그런 로키가 토르는 너무나 사랑스러워 우습게도 토르 또한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로키의 모든 것이 토르의 눈에는 한없이 매력적으로 보였다달빛을 받아 방안의 모든 것들이 순백색으로 빛났고 토르의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감동이 일었다.


토르는 로키의 목덜미를 이로 물었다가 입술로 가볍게 그 자리를 더듬었다로키도 열정적으로 그에 응하기 시작했다로키는 몸을 떨고 있었다토르는 로키를 두 팔로 끌어안고 그의 두 귀에 입을 맞추었다부드럽고 따뜻한 입맞춤이었다로키를 바닥 위에 눕힌 채 작고 부드러운 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러다가 로키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고 그의 입언저리에도 입을 맞추었다.


가지런한 이빨들과 날카로운 송곳니도 핥아주었다로키가 엉겁결에 토르의 혀를 살짝 깨물었다가 자신이 흥분했던 것을 아는지 새된 소리로 웃었다토르 역시 로키의 온몸을 구석구석 핥았다.

위험하고도 미래가 없는 초로의 욕정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토르에게 로키는 마치 매혹적인 괴물 같았다아니자신을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괴물이었다그러나 누가 괴물인 것일까그를 탐하는 자신인가 아니면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로키인가토르는 알 수 없었다.

 


*

 


로키는 어젯밤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기억들을 더듬어보았다몸의 깊은 곳까지 휘저어진 것 같은 달콤한 나른함희미한 위화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서서히 해가 뜨고 있었다로키는 잠든 토르의 등을 바라보며 곁에 앉아 있었다마치 연인 같다라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왔다로키는 토르를 부드럽게 깨웠다이제 단 한 가지의 소원만 이루어지면 되었다.


이제 내 피를 마셔줘.”


로키가 토르의 옷가지 사이에서 단도를 꺼내들어 자신의 손목을 있는 힘껏 그었다로키의 가녀린 손목을 타고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키!”


토르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지만 로키의 얼굴은 평온했다로키는 순식간에 아물어가는 상처를 들여다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거 보여토르형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어.”


로키는 팔을 들어 토르에게 들이밀었다로키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러니 마셔그리고 나와 함께 해줘.”


토르가 자신과 같은 뱀파이어가 되는 것 그것이 로키의 유일한 소망이었다그렇게만 된다면 어쩌면 로키는 이제는 더 이상 토르를 미워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그러나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No, Loki. no…….”


토르는 자신은 이미 너무 멀리까지 왔다는 것을 알았다로키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할 수 있었고 그와 함께 잠을 잘 수도 있었다그러나 뱀파이어가 되는 것만은 할 수 없었다토르의 단호한 말에 로키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로키의 뺨 위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너는 점점 죽어가고 있잖아그리고 곧 죽겠지그러면 누가 나의 갈증을 달래주지누가 나의 악몽을 물리쳐주지누가 나와 함께 있어주지?”


로키의 말이 옳았다토르는 점점 나이를 먹었고 로키는 언제까지나 무력하고 어린아이로 남아있을 것이었다그러나 토르는 그런 로키의 외침을 들어주지 않았다.


잔인해형은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야얼마나 나를 외롭게 만들어야 만족하겠어?”


로키는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며 몸을 떨었다토르는 로키를 진정시키려 다가가 어깨를 끌어안았다.


로키…….”


토르는 뱃가죽이 화끈해지는 고통을 느꼈다단도는 작았지만 날이 벼려있어 그 날카로움은 토르의 내장까지 헤집어 놓을 수 있었다그것을 누구보다도 토르는 잘 알고 있었다토르는 천천히 로키에게 떨어졌다배에 꽂힌 칼을 잡아 뽑았다.


맑은 쇳소리를 내며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날이 선 단도의 끝에는 피가 묻어있었다토르가 애써 상처를 막아보지만 손 틈새로 흘러나오는 피를 막을 수 없었다토르의 무릎이 꺾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로키는 점점 아물어가는 상처를 쓰러진 토르의 입으로 들이밀었다.


어서 마셔이 피를 마시면 살 수 있어영원히둘이 함께야.”


영생이 약속 된 붉은 피였다피에서 사과 향이 났다이브를 유혹하고 아담을 타락하게 만든 금단의 과실과 꼭 같은 향이었다토르는 이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저 피를 마시면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까무룩 해지는 시선 끝에 이십 년 전과 다름없는 얼굴을 한 자신의 어린 동생이 있었다소년으로 있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내가..못했다로키.”


토르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토르의 뜨거운 피가 로키의 발등을 적셨다토르의 체온이 점점 로키와 닮아갔다.


토르!”

나를 용서해주렴.”


로키는 피에 젖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 위를 덧대어 발랐다로키는 피처럼 붉은 입술로 토르의 입술을 천천히 마주했다입을 다문 채입술 그대로 오래도록 이어지는 그 순결한 입맞춤서로의 입술이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인 감각을 나누며 하나하나 헤아려 보는 시간이 로키는 황홀하도록 좋았다그러나 토르의 입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로키는 울음에 번지는 말로 토르를 저주했다.


나는 너를 증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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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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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쯤? 레인보우시리즈(...)로 낸 호크로키 단편  회지

Purple Rain

Clint Barton X Loki









 


1


 


 


여자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창틀위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바깥세상은 소란스러웠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소란과 빗소리가 뒤섞여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여자의 세상은 더 없이 고요했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창문을 몇 번 톡톡 두드리다가 입김을 불었다. 유리창 위로 금세 김이 서렸고 여자는 그 위에 글자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Я хочу видеть(보고 싶어)”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자신의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알면서도 빨리 오지 않는 자신의 연인에게 여자는 괜히 심술이 났다. 여자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방 안으로 빗줄기가 들이닥쳤지만 전혀 상관없다는 듯 창밖으로 몸을 뻗었다. 빗줄기는 여자의 얼굴에서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여자의 젖은 머리카락이 흰 얼굴을 어지럽혔다. 여자는 그 감각을 마음껏 즐겼다.


“뭐하는 거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남자가 방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남자는 재빨리 창문을 닫은 뒤 큰 타월을 들어 여자의 몸을 감쌌다. 남자는 화가 잔뜩 난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지만 여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남자를 껴안았다.


“다녀왔어?”


여자는 서툰 영어로 말하며 남자의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남자는 흥건하게 젖은 바닥을 보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마워.” 치우는 것은 남자의 몫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심술을 알아차렸다. 여자가 웃으며 “별 말씀을.” 이라고 되받아쳤다.


남자는 코트 안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젖지 않도록 신경 쓴 덕분에 안의 물건은 젖은 곳 하나 없었다. 남자는 사온 과일들과 흰 약 봉투를 꺼내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약 봉투에 눈길이 멈춘 여자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남자가 여자를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НеЗачто.(별 말씀을)”


 


남자가 이층으로 올라간 사이 여자는 남자가 사온 약봉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스레 사과를 베어 물었다. 사과 하나를 다 먹고 난 뒤 그 밖의 다른 것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여자는 언제나 조금씩만 먹었다. 그녀의 오래 된 습관 중 하나였다.


여자는 이층을 힐끔거리다 또 다른 오래 된 습관을 실행했다. 여자는 바닥에 앉아 왼손의 손가락 끝과 오른손의 손가락 끝을 마주대고 허리를 굽혔다가 피기를 반복했다. 앞과 뒤, 옆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허리는 고양이처럼 유연했다. 여자는 남자가 그녀에게 ‘성격만 고양이를 닮은 게 아니군.’ 이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본격적으로 벽에 달린 긴 바를 잡고 탕듀(Tendu)동작을 취했다. 다리를 앞에서 옆으로, 옆에서 앞으로 계속 반복하며 다리의 움직임을 점검했다. 여기까지는 무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앙바(En bas).여자는 늘씬한 두 팔을 앞으로 뻗어져 원을 만들었다. 여자는 발레를 배운 뒤부터 매일 두 시간씩 기본동작을 연습했다. 십여 년을 해온 동작이었지만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여자의 손끝이 눈에 띄게 떨렸다. 여기까지였다. 자세를 여섯 번 바꾸기도 전에 여자의 숨이 가빠왔다.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을 마구잡이로 던졌다.


그 모든 일을 지켜보던 남자가 여자의 등 뒤로 다가가 조용히 여자를 안아주었다. 떨고 있던 여자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여자는 간신히 입 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을 해보였다. 남자가 여자의 무릎 밑에 손을 넣어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녀는 익숙한 듯 양팔을 남자의 목에 두르고 가슴팍에 살며시 기대었다. 여자는 새처럼 가벼웠다. 하긴 그렇게 멀리 뛰려면 가벼워야지. 남자는 여자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했다. 무대 위에서 춤추던 그녀의 모습은 날아오르는 새와 다름없었다. 그날 했던 공연이 백조의 호수였던가. 남자는 여자를 안고 계단을 올라갔다.


“아까 사과 하나밖에 안 먹었지? 더 먹어야지.”


“안 돼. 살찌면 발레리노한테 욕먹어.”


남자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자 여자도 따라 웃었다. 여자는 날이 갈수록 점점 말라갔다.


 


남자는 천천히 침대 위에 여자를 눕혔다. 그 잠깐의 목욕에 도 퍽 지쳤는지 여자는 어느새 잠이 들어있었다. 남자는 뻣뻣하게 굳은 여자의 팔을 최대한 부드럽게 주물렀다. 여자의 몸은 너무 말라 핏줄이 다 비칠 정도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몸이었다. 남자는 좀 더 시간을 들여 여자의 몸을 주물러주었다. 여자는 날이 갈수록 움직이기 힘들어 했다. 유연했던 몸은 점점 굳어져갔고 날씬했던 몸은 말라 비틀어져갔다. 근육은 이미 다 사라졌고 뼈 위에 살가죽만 간신이 붙어있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종아리를 문질러주다가 발을 바라보았다. 생채기 하나 없는 몸과 달리 여자의 발은 온통 상처투성이에 물집이 잡혀있었다. 제멋대로 곱은 안쓰러운 발등에 조심스레 키스를 했다. 여자의 발은 그녀의 지나온 삶의 증거였다. 그녀는 어디에서건 항상 춤을 췄다. 그녀가 춤을 추는 것은 단순한 춤이 아니었다. 하나의 생존법이었고 그래서 더욱 처절했다. 그래, 그녀는 나를 닮았어. 어쩌면 그녀는 나의 분신일지도 몰라. 남자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는데 여자는 남자의 말을 듣더니 소리까지 내며 크게 웃었다.


“분신이라고? 당신, 설마 환생 같은 걸 믿는 거야?”


“당신은 믿어?”


“그럼, 나는 믿어.”


“그럼 왜 웃는 거야?”


여자는 웃으며 불퉁한 표정의 남자의 입술에 살짝 입맞춤했다.


“그냥 당신 얼굴이 웃겨서.”


거기까지 떠올린 남자는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남자는 어린아이처럼 여자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젖무덤에 얼굴을 파묻고 심장소리를 들었다. 심장소리는 느리지만 정확하게 뛰었다. 메트로놈처럼 박자에 맞춰 뛰는 심장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남자에게 있어서 그녀의 심장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악처럼 들렸다. 그것은 빠르게 뛸 때도 천천히 뛸 때도 그녀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이제부터 조금씩 천천히 뛸 거야.”


여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여자는 평소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렇게 느리게 뛰다 갑자기 멈추겠지.”


남자는 애써 여자의 말을 듣지 못한 척 했다. 남자의 어설픈 연기가 여자는 우스웠다.


“내가 죽고 나면 나타샤와 만나는 건 어때?”


“…무슨 소리야. 냇은 동료일 뿐이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남자는 여자의 입에서 자신의 동료인 나타샤의 이름이 나온 것에 대해 조금 놀라워했다. 여자는 나타샤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면서도 남자의 입에서 나타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싫어했다. 나타샤 또한 그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를 만난 지 딱 한 달이 되던 날 러시아로 남자를 만나러 온 나타샤는 여자의 병명이 적힌 신상파일을 남자의 얼굴에 던지며 말했다.


“그 여자는 곧 죽어. 멍청아.”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하자 그녀는 러시아어로 뭐라고 소리치며 나갔다. 나중에 여자에게 물어봤지만 웃기만 하고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랬던 주제에 맘에도 없는 말을 하는 여자가 귀여워 남자는 여자의 콧잔등을 살짝 때리며 말했다.


“바보 같긴. 나타샤는 나보다 좀 더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야해.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럼 나는?”


여자는 마음이 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당신은.”


“나는 이미 정상이 아니라서?”


남자는 여자의 마른 팔을 거칠게 잡았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다는 생각에 금세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그 잠깐 사이에 희고 마른 팔뚝위에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버렸다. 남자는 벌써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손자국을 살살 어루만졌다.


“아니. 당신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니까.”


남자의 진지한 말투에 여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빗방울처럼 맑고 투명한 웃음이었다.


“역시, 당신은 여자를 기쁘게 하는 법을 알아.”


“처음 듣는 소리군.”


“다행이네.”


여자는 푸스스하고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남자가 사랑한다는 말에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언제 떠나든 잡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여자는 한 번도 남자의 고백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 * *


 


죽음은 천천히 그러나 갑작스러운 순간에 다가왔다. 죽음이란 것은 결코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는 갑작스럽게 죽어버렸다. 교통사고였다. 갑작스럽게 인도로 뛰어든 자동차를 피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의 몸이 예전처럼 재빠르기만 했더라면 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장례식조차 가지 못했다. 그의 직업이 직업인만큼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대신 멀리서 여자의 장례식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장례식은 조촐했다. 여자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여성은 목 놓아 울다 혼절을 했다. 그러나 남자는 울지 않았다. 그녀가 그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는 것은 지겨워.”


여자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여자의 관이 묻히고 가족들이 떠나고 난 뒤에서야 남자는 그녀의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 그녀의 다 낡은 발레슈즈를 비석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회색빛 비석 위에 놓인 분홍색 발레슈즈는 마치 돌 위에 핀 꽃처럼 보였다. 남자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2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남자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위로했다. 그러나 아마도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자를 믿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였는지 남자는 너무 지쳐보였다. 그리고 나는 누구였지?


차가운 빗방울이 콧잔등을 때렸다. 추위와 배고픔이 꿈에서 현실로 나를 끌어내렸다. 남자와 여자가 나온 꿈 따위는 쉽게 잊혀졌다.


런던의 날씨는 언제나 좋지 않았다. 러시아만큼은 아니겠지만 확실히 추웠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하얀 김이 솟았다. 나는 낡고 헤진 외투를 좀 더 단단히 여몄다.


“바트으…….”


동생은 여전히 꿈에서 깨지 못했는지 허리춤에 매달려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빗물을 손에 받아 동생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나도 나이가 많지는 않았지만 동생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어렸다. 동생은 몸이 좋지 않았다. 동생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결코 동생을 병신이나 멍청이로 불러본 적은 없었다. 만약 누군가 그딴 말을 내 앞에서 썼다면 그 새끼는 진작 얼굴이 아작 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동생은 ‘좀 느린 아이’였다. 그 대신이었을까, 동생은 노래를 잘 불렀다. 발음은 어눌했지만 노래를 무척이나 잘했다. 동생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면 동전 몇 개는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짓도 못하고 있었다. 이 더럽고 좁은 골목에도 다 주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빗물로 얼굴을 씻어내자 어느 정도 잠이 깼는지 동생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동생의 새까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기분이 좋았는지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며 녹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동생과 나는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같은 날 같은 곳에서 버려져있었다고 서커스 단장은 매일같이 말했다. 형제는 한 몸이라며 동생이 잘못을 한 날에는 나도 함께 맞고 굶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런 좋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서커스에서 배운 거라고는 활쏘기뿐이었다. 나는 매일 밤이면 동생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활을 쏘아야만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 동생의 이마를 맞출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한 번도 사과 대신 동생을 맞춘 적은 없었다. 주먹보다 작은 사과의 정중앙을 꿰뚫을 때마다 모두가 박수를 치며 돈이나 꽃을 던졌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 동생은 웃는 얼굴로 그것들을 주웠다. 돈은 모조리 단장의 주머니로 들어갔고 동생은 꽃을 엮어서 머리에 쓰기도 했다. 꽃은 먹을 수도 없지 않냐, 며 한마디를 쏘아붙이면 동생은 예뻐어. 라고 바보처럼 웃었다. 기집년도 아니고 뭐가 좋은지. 하지만 동생의 새까만 머리 위에 올라간 꽃들은 사과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단장의 폭행은 점점 더 심해졌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살만은 했다. 동생의 머리를 뚫어버리는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서커스단에서 계속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서커스단에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장님이 노래를 부르면 동정심을 얻어 돈을 더 잘 벌수 있다며 동생의 눈을 불로 지져버리려는 단장의 등 뒤에 화살을 쏘았다. 단장이 쓰러지고, 나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동생을 데리고 서커스단을 도망쳐 나왔다. 단장의 주머니에서 들고 온 그날의 입장료는 런던으로 오는 기차표로 다 써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거리에서 지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구걸을 하거나 좀도둑질을 했다. 동생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동생을 탓할 수 없었다. 동생이 귀찮아질 때도 있었지만 만약 동생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거리에서 약을 빨고 어디서 뒈졌을 것이었다. 동생이 있는 것이 나에게는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동생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내 다리에 매달려서 바아트 라며 내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평소보다 너무 힘들었다.


“바트으.”


오늘따라 동생은 내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매치기라도 하려면 시내로 가야하는데 나를 꼭 붙잡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는 동생 때문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변명을 하자면 배가 너무 고팠고 비에 젖어 너무 추웠다.


“잠깐이라도 너 혼자 있어봐!”


떨어지지 않으려는 동생을 밀쳤다. 비가 온 뒤라 동생은 물웅덩이에 빠졌다. 그 와중에도 계속 내 이름을 불렀다. 차라리 고아원에 보내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이 찾아올까 두려워 그 동안 떠돌아다닌 거였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동생은 상관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길거리에서 아사하느니 차라리 고아원에 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나는 동생을 옆구리에 끼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동생의 얼굴이 점점 파리해졌다. 벌써 며칠 째 입에 넣은 것이라고는 이 빌어먹을 빗물뿐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꾸 축축 쳐지는 동생의 몸이 느껴졌다. 동생은 너무 울어서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우는 것은 힘을 빠지게 했다. 동생에게 울지 말라고 윽박질렀지만 눈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봐두었던 고아원의 문 앞에 동생을 세워두고는 돌아섰다.


“바아트. 시러, 시러! 가지 마아..마..”


나는 동생의 외투를 한 번 더 여며 주었다.


“바트으. 가지 마. 가지 마. 혀엉.”


동생은 숨쉬기도 버거워 보였다. 그러나 숨을 헐떡대면서도 끊임없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가늘고 연약한 목소리는 빗줄기를 뚫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나는 귀를 막고 도망쳤다.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내가 없어지면 동생은 살아남을 수 없을 거였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거리의 죽음은 너무 흔했고 나까지 울어버리면 정말 흔한 죽음으로 남을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정말이지, 비가 오는 날은 정말 최악이었다.











3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꼬리처럼 연달아 이은 폭발음이 머리를 울렸다. 바튼은 귓구멍을 틀어막고 있던 귀마개를 꺼내 멀리 던지고는 혹시라도 신체에 이상이 생겼는지 점검을 했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자신의 눈앞에 광경은 이상하기만 했다.


폐허가 된 빈터에 어린 소녀가 홀로 서 있었다.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혹시 적의 함정인가 싶어졌지만 몸은 이미 소녀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보다는 눈앞의 사람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폭탄이 눈앞에서 터졌지만 간발의 차이로 소녀를 품에 안고 구덩이로 굴러 떨어졌다. 바튼은 품에 안긴 소녀를 향해 말했다.


“조금만 참아.”


저를 구해주셨군요.


소녀는 작은 손을 빠르게 팔랑거렸다. 수화였다. 폭음이 울리는 상황에도 아직도 대피하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녀는 귀머거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바튼은 재빠르게 무전기를 켰다.


“냇. 여기 민간인 생존자가 있어. 본부와는 일곱 블록 떨어진 곳이야. 지원 바란다.”


“뭐? 확실해?”


나타샤의 놀란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서도 똑똑히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생존자들은 대부분 대피소로 피신 시켰다. 특히나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였다. 굉장한 폭음들과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모두에게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으니 아직도 대피를 못한 민간인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지원이 어려운데. 빠져나올 수 있겠어?”


역시나 지원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아군의 지원도 없이 소녀를 들고 혼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적들의 저항은 거셌고 쉴드의 일손은 턱없이 부족했다. 바튼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먼지가 내려앉아 새카만 얼굴위에 겁에 질린 녹색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소녀가 바튼의 손을 꼭 쥐었다. 너무나도 작은 손이었다.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걱정 마. 버리지 않아.


어설픈 수화였지만 어떻게든 이해했는지 소녀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입술을 읽을 수 있어?”


조금요.


“수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부모님은?”


소녀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고아인가?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야?”


책을 사러 나왔는데…


소녀가 품안에서 점자책을 꺼내 보여주었다. 동화책이었다. 바튼도 아는 동화였다. ‘행복한 왕자.’ 동생이 가장 좋아하던 이야기였다. 동생의 나이가 소녀나이쯤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바튼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동생과 달리 소녀는 똑똑해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소녀의 얼굴에서 동생의 얼굴이 겹쳤다. 벌써 이십년도 더 되어가는 일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니었다. 특히 지금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사양해야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바튼은 소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 한 번 해보기로 하지 뭐. 바튼의 손끝에 뜨뜻한 것이 느껴졌다. 흘깃 내려다보니 소녀의 옆구리 쪽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상처가 꽤 깊은 듯 소녀의 원피스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빨리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소녀는 겁에 질린 나머지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바튼은 하얗게 질려있는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노래는 잘하니? 노래 한곡만 하다보면 금방 도착할걸.”


바튼은 아차 싶어져 소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말을 못하는 아이에게 노래를 하라고 하다니. 바튼은 바보같은 말이었다며 자책했으나 소녀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벙긋거리기 시작했다. 바튼은 소녀의 노랫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 * *


 


“이제 그만해.”


자꾸 나타나는 적들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래도 무사히 본부에 올 수 있었다. 바튼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구급대원을 찾아 소녀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소녀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소녀의 품안에서 동화책이 툭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그만해. 바튼.”


냇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그제야 바튼은 그녀가 뜻하는 표정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지키지 못했다. 바튼은 자책했다. 소녀는 이미 죽은 지 한참 지나있었다. 품안의 온기는 어느새 싸늘히 식어있었고 그것은 허망하리만큼 아득했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고 소녀의 가녀린 목은 꺾여 있었다. 바튼은 소녀를 한 번 더 꼭 안아 준 뒤 소녀를 대지 위에 뉘였다. 소녀의 붉은 원피스 위로 빗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적들의 진압이 완료 되었다는 무전이 들렸다. 비가 쏟아져 내렸다. 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다시 찾아 온 평화에 눈물을 흘렸다.


 


 


 


 


 

4


 


 


비가 내렸다. 황금빛 위대한 도시가 물안개에 휩싸였다. 물은 고요함을 불러일으켰다. 아스가르드인들은 간만에 찾아온 비에 긴 전쟁을 잠시 중단하고 고단한 몸을 달랬다. 비는 이둔의 사과를 살찌어줄 풍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비는 재수 없는 날의 상징일 뿐이었다.


비만 오면 나의 주인은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물에 젖으면 마법을 쓰지 못했던 주인은 비가 오는 날이면 하늘이 주인을 가둔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변함이 없는 듯 주인은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주인의 옆에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불호령이라도 떨어질 줄 알았는데 주인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질책하지 않으셨다. 다만 내 앞에 활을 던졌다.


“비가 그치면 갈 곳이 있다.”


드문 일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물론 비가 그친 뒤에도 주인은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반문하지 않고 활살 통을 등에 매며 나갈 차비를 했다.


주인은 남들의 이목을 피하려는 듯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서 산을 올라갔다. 산길이 너무 험해 산 중턱에 말을 묶어놓고 정상까지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나는 본디 천한 자라 험한 산행이 힘들지는 않았으나 주인은 힘이 드는 것 같았다. 나는 주인을 업고 갈 것을 제안했으나 주인은 도리어 버럭 화를 냈다. 한참을 올라가다보니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발견했다. 그냥 뛰어넘기에는 그 폭이 제법 넓어보였다. 나는 최대한 주인의 발에 물이 닿지 않도록 웅덩이 위에 바짝 엎드려 주인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청했다.


주인은 주저 없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갔다. 나는 진창에 얼굴이 처박혔지만 그것이 화가 나거나 하지 않았다. 너무 당연했다. 주인은 웅덩이를 건넌 뒤 나에게 고개를 들라고 명했다. 엉망진창인 내 얼굴이 우스웠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나의 충실한 신하인가?”


“네. 나의 주인이시여.”


주인은 몇 번이나 그렇게 물어보았다. 무언가를 확인받으려고 하는지는 몰랐지만 나는 그때마다 대답했다. 나는 당신의 신하라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다면 다음 비가 내릴 때까지 산에서 내려오지 마.”


남자는 그 한마디만을 명하고 마법을 이용해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마법을 쓰면 되는 것을 나의 주인은 왜 굳이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권한이 아니었다.


나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이 지나도 비는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 성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결국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나는 산을 내려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성은 불타올라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반역자의 부하다!” 라고 소리치며 나를 감옥에 처넣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며칠 사이에 주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언제나 단정하던 머리는 산발이었고 갑옷은 다 뜯겨 져 있었다. 언제나 부드러운 땅만 밟던 그가 맨발로 서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나는 주인을 계속 바라보았다.


“어리석긴. 너를 날려 보내주었는데도 자꾸 다시 돌아오는구나.”


“저는 이미 날개를 잃었습니다.”


“나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 너도 함께 불에 태워지고 싶어?”


“괜찮습니다.” 라고 답하려고 했으나 말하지 못했다. 주인이 나의 혀를 뽑아버렸기 때문이다. 주인은 가끔씩 심술을 부렸다. 그것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나 그것이 주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끔찍하리만큼 커다란 고통이었으나 참을 수 있었다. 주인은 피를 뚝뚝 흘리는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복면을 쓴 남자는 주인과 나를 끌고 갔다. 높은 단상 위에는 장작이 높다랗게 쌓여있었다. “반역자를 처단하라!” 군중은 외쳤다. 젊은 왕이 나를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너도 이 반역에 가담했는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려 했으나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으으, 하는 소리만 났다. 그제야 주인이 나의 혀를 뽑아버린 것을 기억해냈다. 왜 그러셨습니까, 주인이시여. 나는 처음으로 주인에게 반문했다.


“저 자는 내버려두지.”


나는 멍하니 주인이 끌려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광기에 휩싸인 관중들은 쉽게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고 그의 죽음은 쉽게 결정되었다. 기묘하게도 왕좌의 앉은 젊은 왕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의 주인은 묶여 있음에도 미소를 지었다.


이내 주인의 발아래에 불이 붙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입을 벌려 나를, 나의 주인과 함께 죽여달라 외쳤으나 그들은 나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나는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랬다. 비가 쏟아져서 저 불을 꺼트려주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불은 기세를 더했고 주인은 금세 화마에 잡아먹혀버렸다.


 


* * *


 


주인이 있던 자리에는 까만 재만 남아있었다. 나는 손톱이 빠질 것처럼 땅바닥을 긁었다. 손톱 아래에 주인의 흔적이 쌓였다. 주인이 왜 죽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가 반역을 꾀했다던가 하는 이유 같은 것은 나는 몰랐다. 나는 그저 그의 신하였으니. 나는 입을 열어 주인의 이름을 내뱉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5


 


 


사막에 비가 오는 날은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너무 거세고 세차게 내려서 내가 있는 곳이 사막이란 것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나는 빗줄기에 흐려지는 시야를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높은 곳에 올라가 크레이터 주위를 감시하던 도중 한 남자가 눈에 띠었다. 바로 콜슨에게 알려 어떤 경로로 침투를 했는지 알아보라고 했으나 돌아온 답은 ‘모른다’였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곳은 레벨 7구역이었다. 수백 대의 감시 카메라와 훈련 받은 수십 명의 요원들의 눈을 피해 출입금지 지역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나 나타샤, 콜슨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힘들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법을 썼던가. 하여튼 수상한 자임에 분명했다. 나는 활을 꺼내 남자를 향해 조준했다.


“명령해주십시오. 쏠까요?”


남자는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남자의 얼굴은 너무 익숙했다. 남자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온 세상에게 버림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남자를 향해 활을 쏠 뻔했지만 다행이 그러지 않았다. 아니 왜 다행이라고 생각한 거지? 스스로에게 반문했으나 알 수 없었다. 남자를 쏠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결국 그를 쏠 수 없었다.


남자는 요원들에 의해서 쉴드로 잡혀왔다. 잡혀 온 남자에게 콜슨이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으나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남자는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입이 없다는 듯 자신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수상하다는 이유하나로 사람을 오래 가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를 발견 했던 곳에서 큰 에너지 파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우연이기에는 너무 교묘했기에 함부로 보내줄 수도 없었다. 쉴드는 기묘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연구하고 세계를 지키는 정부기관이었다. 나와 콜슨은 심문실에서 나와 감시카메라로 그를 관찰했다. 우리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남자는 허공을 향해 몇 가지 알 수없는 말을 했다.


“내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아버지는 나를!”


“토르!”


“나는 돌아가지 않겠어!”


“아버지가 나를 버리셨구나…….”


남자를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쉴드의 힘으로도 신원조회가 되지 않는 이 남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골머리를 썩고 있던 신기한 현상들에 대한 조언들을 몇 마디씩 해주었다. 결국 쉴드의 결정은 그를 쉴드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나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을 쉴드에 들이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콜슨의 부탁에 의해 이 남자를 떠맡게 되었다.


남자는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어느새 토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만 그렇게 부르던 것이 점점 이름처럼 굳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에게 토르라고 했을 때 가장 큰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이름이 토르라는 것이 퍽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토르라고 부를 때마다 살짝 당황하면서도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이 그를 그렇게 부르게 만들었다.


토르는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그러니까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처럼 굴었다. 너무 간단한 것들도 이해하지 못하고 처음 겪어 본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그가 척척 설명 해내는 수학공식이나 물리현상에 대한 설명을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토르는 금세 적응해 도리어 나를 놀리곤 했다. 나타샤와는 앙숙이었고 콜슨에게는 건방지게 굴고는 했지만 금세 혼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냇이나 필이라고 부르며 그들과 사이가 좋았다.


나는 그의 친구, 그쯤이 된 것 같았다. 그가 현장요원이 아니라 사무직요원이라 많이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를 만날 때면 세계 각지에서 사 온 디저트들을 그의 자리에 말없이 놓았다. 그러면 어느새 내 자리에는 그가 만들었다는 연고가 놓여있었다. 신기하게도 연고는 상처를 빠르게 낫게 해주었다. 한 번은 토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사가지고 온 타르트를 콜슨이 먹어버려 그날 콜슨에게 로키가 꽤나 심한 장난을 쳤다고 했다. 내근직 주제에 그렇게 빠른 몸놀림이라니. 라며 콜슨이 투덜거렸지만 그 이후로 퇴근 후면 둘이서 종종 디저트가 맛있는 곳을 찾아다니게 되었다고 나타샤가 말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약간 소외감을 느꼈다. 둘은 셋이 되고 셋은 넷이 되고 어느 새 토르는 쉴드 안에서 동료로 인정받았다. 둘만 있게 되는 날은 더욱 드물게 되었지만 어쩌다 둘만 있을 때는 뉴멕시코 때의 일을 가끔씩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이야기일 뿐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것도 좋았다. 임무가 끝나고 가면 맞이해주는 친구, 그 비슷한 존재가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쉴드의 연구실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던 날, 사망자가 오직 그뿐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에는 그것이 참 원망스러웠다. 그의 시체도 찾지 못해 장례식은 치러지지 못했다. 모든 쉴드의 요원들이 그러하듯 그 또한 가족이 없었기에 그를 아는 쉴드의 사람들은 아주 잠깐의 묵념의 시간을 가지고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6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그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로키.”


그의 진짜 이름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다. 그 수많은 세월동안 단 한 번도 로키의 이름을 부른 적 없다는 듯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름을 불렀다.


“로키, 이제 그만 하자.”


“벌써 지친건가? 에이전트 바튼?”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정말 지쳐있었다. 로키는 자신의 앞에 나타났고 다시 사라졌다. 그는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 그리고 현실과 꿈까지 모두 다 지배했다. 나는 절망했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로키.”


“글쎄?”


로키의 질문은 나에게 너무 어려웠다. 로키는 몇 번이나 나의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에 나타나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달아났다.


“오, 나의 충직한 신하, 가족, 친우이며 사랑스러운 연인, 그리고 나의 구원자.”


로키는 나의 얼굴을 잡고 입술에 살포시 입맞춤했다.


“이제 포기해.”


그리고 다시 로키는 몸을 감추었다. 이번에는 과연 어디서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로키를 찾으러 따라다닐 것을 알았다. 그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내가 포기할 수 없어지잖아.”


비가 내렸다. 죽음과 생의 교차 속에 만남은 계속 되풀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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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

[스팁로키] 모순 3

2018. 2. 28.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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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로키] 모순 2

글/긴 2018. 2. 28. 17:48

2015.06 스팁로키 앤솔로지 <창과 방패>




* * *



웨스트 윙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잠깐이나마 활짝 열어뒀던 창문들은 다시 철문이 덧대어졌고 모두가 사태파악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근처 전력소가 파괴되기라도 한 건지 어느 곳보다 밝아야 할 백악관의 전등들은 깜빡이며 힘겹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움 사이에서 스티브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수석비서인 게리는 재빠르게 이번 사건에 대한 상황보고를 했다.


“…피해가 만만찮았지만 다행이 민간인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그 말은 즉, 그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린 경호원들은 살아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스티브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단호한 손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모두 다 이 방에서 나가주세요.”

“하지만 현재 상황의 위험함을 생각하면 혼자 계시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스티브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오래도록 군인으로 살아왔기에 말투가 딱딱하고 고지식한 사고방식을 가지긴 했어도 일적인 부분에서만 냉정했지 기본적으로는 따뜻하고 상냥한 남자였다. 아무리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화를 내기보다 체육관의 샌드백을 터트리는 것으로 해소 할 정도였다. 그러나 때로 스티브는 딴사람처럼 차갑게 굴었는데 대부분의 이유는 로키였다. 로키의 일방적인 살육이 끝나고 나면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혼자 있기를 원했고 이럴 때는 그의 뜻대로 홀로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 나름의 자기반성 시간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보좌관들은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났다. 그러나 태산과도 같던 어깨가 어둠 속에 잠기는 것을 볼 때마다 가끔씩, 그가 자살이라도 하는 것이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금세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할 헛된 망상으로 치부할 뿐이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캡틴아메리카였기에.


“이제 나와.”


허공을 쳐다보며 낮게 중얼거리는 스티브에게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흐트러진 윗옷을 아예 벗어버리고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바닥으로 던지고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휘휘 돌렸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가 취했다고 여겼겠지만 캡틴아메리카를 취하게 만드는 술은 없었다. 취할 수 없었지만 스티브는 오늘 같은 날이면 예전의 습관대로 술을 마셨다. 그 앞에는 자신의 잔과 오늘 자신을 막아섰던 경호원들의 숫자만큼의 술잔이 놓여있었다. 술은 누군가를 기리는데 좋은 도구였다. 잘은 몰랐지만 그들 가운데는 결혼을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었고 당연히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스티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당장 나와!”


스티브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위스키 병을 벽에 던졌다. 아니, 던졌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산산조각이 나야 할 병이 실로 매달아 놓은 것처럼 공중에서 멈추었다.


“이런, 조심해야지. 여기 가구들 대부분이 미국역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함부로 대하면 안 되지. 여기가 스미소니언박물관이나 다름없다는 걸 너도 잘 알면서. 오, 물론 너를 포함해서 말이야.”

“로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나타난 이는 몇 시간 전만해도 캡틴아메리카와 대치하던 그의 최대의 적, 로키였다. 항상 과장 된 뿔 투구와 단단한 갑옷을 입고 나타나던 로키였지만 지금은 제게 꼭 맞는 고급스러운 정장과 녹색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모델로 알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들만큼 로키에게 잘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로키는 허공에 떠있던 병을 잡아 스티브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는 그 곁에 앉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 스티브. 내가 보고 싶었어?”


로키와 마주 앉은 캡틴아메리카라니. 가장 의심이 많은 음모론자도 감히 꺼내지 못할 이야기였다. 세기의 악당과 세기의 영웅의 밀회였다. 스티브는 이를 악물고 로키를 향해 말했다. 


“왜 그들을 죽인거지? 너라면 죽이지 않을 수 있었잖아!”


마치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로키는 허리를 굽히며 크게 웃었다. 몇 번이나 파안대소한 로키는 혀를 끌끌 차며 스티브의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있는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오. 스티브 로저스. 아직도 이렇게 순진하다니!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선 공포심을! 공포를 얻기 위해선 죽음을 봐야하는 것쯤은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아?”


스티브는 로키의 손길을 거칠게 쳐낸 뒤 눈을 감고 그를 등졌다. 스티브에게 있어 침묵은 곧 무언의 동의란 것을 로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현재 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것도 잘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비웃던 로키는 갑자기 불안한 기색으로 스티브의 눈치를 살피는 듯 눈썹을 늘어뜨리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스티브. 아주 작은 실수였어. 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잖아?”


냉정히 돌아선 스티브의 등을 로키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리다 마치 굳게 닫힌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듯 톡톡 두드렸다. 그러나 스티브가 돌아서기는커녕 벌떡 일어나 아예 뒤돌아 나가려는 순간, 스티브의 소매 끝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스티브. 나를 내치지마.”


흔들리던 녹색 눈동자의 색이 흐릿해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해보였지만 로키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 다시 환하게 웃어보였다. 여전히 쳐진 눈썹과 잘게 떨리는 입 꼬리가 억지웃음이란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스티브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지난 번 눈물을 흘리던 로키에게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그의 눈물이라고 말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는 탓이었다. 


스티브는 강한 손길로 로키의 섬약해 보이는 턱을 그러잡았다. 아픔을 느꼈는지 로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한순간이었을 뿐, 이내 순종적인 태도로 스티브를 올려다보았다. 로키는 그의 처분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광기로 지독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어디로 사라지고 녹색눈동자에는 초식동물처럼 유순함을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좀 전까지 사람들의 피로 손을 물들인 채 웃어젖히던 악당은 어디로 가고 사랑받기 원하는 어린아이만 남았는가. 이 애정을 갈망하는 눈동자를 마주 할 때 마다, 스티브는 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자꾸 생겨서는 안 될 감정들이 피어났다. 


스티브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다른 한손으로 로키의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내리자 컥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울렁이는 로키의 목울대가 스티브의 눈에 들어왔다. 1인치만 손을 내려 지금 당장 곧게 뻗은, 연약하고 흰 네 목을 부러트리면,

“다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자신을 향한 명백한 살의에도 부구하고 로키는 스티브를 저지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로키의 까만 머리통이 스티브의 손길에 따라 거칠게 흔들렸다. 로키는 희게 질린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결국 애원의 말을 꺼냈다. 


“스티브, 제발…….”


하지만 로키의 애원이 자신을 상처 입히지 말아달라는 것이 아님을, 그 눈동자가 걱정하는 것은 온전히 스티브 자신이었음을 스티브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혼란스러웠다. 너는 악당이야. 그것도 아주 못되고 악마 같은. 지금은 내 앞에서 울면서 애정을 갈구하고 있지만 사실 너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그리고 나는.


“그만하고, 나를 안아줘. 스티브”


그리고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 * *



기이한 푸른색이 감도는 세계가 자신을 덮쳤다고 생각한 순간, 스티브는 자신이 처음 보는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무無의 공간이었다. 제 아무리 기이한일을 많이 겪어본 자신이라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모든 것이 암흑이었고 오로지 저만이 뚜렷이 보일 뿐이었다. 잠깐의 당황함을 뒤로 한 채 스티브는 이내 걱정하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은 떨어지고 있던 발키리호에 있었다. 간신히 레드스컬을 저지했지만 해결해야할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발키리호는 폭탄을 가득 실은 채 뉴욕으로 가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폭탄들이 터진다면 수만명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었다. 스티브는 당장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조건 앞을 향해 달렸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네 죄책감이 덜어진다면야.”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내는 중세시대에나 입을법한 옷차림을 하고서는 저를 향해서 웃고 있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의자에 앉은 것처럼 허공에 떠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떠있는 것이 놀라웠지만 이미 이상한 일은 충분히 겪은 참이었다. 스티브는 방패를 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남자는 스티브의 모습이 가당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코웃음을 쳤다. 남자가 레드스컬의 한편인가라고 생각했었건만 그의 관심 없어 보이는 태도에 자세를 풀고 질문했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시간과 공간의 틈. 세계와 세계를 연결해주는 통로. 그리고 존재해서도 안 되고 존재하지도 않는 장소.”

“그런 말도 안 되는! 여기에 당신과 내가 존재하는데?” 


스티브의 말을 들은 남자는 어리석은 것을 보는 듯 혀를 차다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왔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걸 보니 필멸자로군. 여기까지 온 인간은 처음 이야. 아니, 나 외에는 처음 온 존재지.”


그제야 흥미롭다는 듯 스티브의 눈을 쳐다보던 남자는 당당하게 가슴을 피며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아스가르드의 로키다.”


여유롭게 자기소개나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놀랍고 분명 제 인생에 있어서 처음 있는 기이한 일이었지만 관심을 둘만큼의 여유가 스티브에게는 없었다. 분명 뉴욕으로 가던 비행선의 방향을 틀어 남극으로 가고 있었고 페기와 대화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눈앞이 푸른색으로 물들더니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지금 비행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뉴욕? 아니면 바다 속으로? 이건 꿈일까? 하지만 아직도 전투의 여파로 욱씬거리는 몸의 통증이 현실임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이제 알았다. 테서렉트 때문이었군. 공간을 열어주는 물건이지.”


스티브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로키는 제 의문이 풀린 것에 퍽 즐거워했다. 보지 않고도 테서렉트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로키를 보며 아마도 이 곳을 빠져나가는 것도 그가 알 것이라고 여긴 스티브가 로키를 붙들고 캐물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 폭탄을 실은 비행선이 뉴욕을 향해 가고 있어요. 제가 그걸 막아야합니다. 혹시 돌아가는 방법을 아십니까?”


어느새 스티브에게서 빠져나온 로키는 스티브의 손이 닿았던 손목을 거칠게 닦아내며 화를 내었다.


“돌아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텐데? 너는 외롭게 죽을 거야!”


로키는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티브의 운명을 단언했다. 분명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신은 외롭게 죽지 않을 것이었다. 스티브는 제 품안에서 나침반을 꺼내들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사랑이 될 그녀의 사진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스티브는 로키를 향해 단언했다.


“제가 선택한 것이니. 그것이 제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것입니다.”


담담한 스티브의 말에 로키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는, 내가 아는 자들을 많이 닮았군.”


그 말을 내뱉은 로키는 살짝 고개를 모로 틀어 제 슬픔을 감추려는 듯 했다. 그러나 고전 명화처럼 그의 처연함이 스티브의 마음속에 깊게 새겨졌다. 깊고 짙은 녹색의 눈동자 속에서 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감정은 오래도록 켜켜이 쌓여 그 형태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 것처럼 보였다. 아마 눈앞의 남자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자칫하면 저 심연과도 같은 곳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었다. 스티브는 떨치고 나와야했다. 이곳에서 사로잡힐 수는 없었다.


“필멸자, 네 이름이 뭐지?”

“…스티브, 스티브 로저스.”

“좋아, 스티브. 네 소원을 들어주겠어. 소원을 말해봐.”


로키는 스티브를 바라보며 자비로운 신처럼 웃었다. 저 남자가 자신을 구해주고 세상을 구해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게 끝날 수 있지 않을까? 미련을 털었다고 생각했지만 실낱같은 가능성이 보이자 다시 희망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스티브는 로키를 향해 세 가지 소원을 빌었다.


“내가 타고 있던 비행선이 뉴욕이 아닌 곳으로 떨어지는 것. 전쟁이 끝나는 것. 그리고 페기를 만나는 것.”

“좋아, 네 소원을 들어주지.”


그가 손을 한번 휘두르자 사방이 밝아져왔다. 신이 빛이 있으리라 명한 것처럼 순간 사방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빛의 세계가 스티브와 로키를 덮쳤고 순식간에 그들을 집어삼켰다. 그것이 로키와 스티브의 첫 만남이었다.


스티브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페기와 약속했던 토요일 8시, 스토크 클럽 앞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 스티브를 발견한 페기는 그의 생환에 눈물을 흘렸고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들은 이 놀라운 기적을 마음껏 누렸다. 스티브는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음에 신이 진정 존재했음을 진실로 기뻐했다. 그러나 스티브의 소원은 지독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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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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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로키] 모순 1

글/긴 2018. 2. 23. 15:58

2015.06 스팁로키 앤솔로지 <창과 방패>



모순











거리엔 어둠이 떠다녔고 새벽이 오는 것은 머나 먼 일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숨죽인 채 집안에 웅크리고 누워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고된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것은 꿈이었으니 누구든 이 시간을 마음껏 즐기리라. 그러나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캡틴아메리카의 하루는 끝을 모르고 계속 되풀이되고 있었다. 


간단한 운동을 마치고 오벌 오피스(Oval Office)에 들어온 캡틴아메리카는 짙은 밤나무 색 책상 중앙에 독수리문양이 멋지게 새겨진 대통령 집무실 책상(The Resolute Desk)이 아닌 창가에 걸터앉아 손바닥 크기의 수첩을 펼쳤다. 화려하고 웅장한 집무실은 그에게 어색하고 불편한터라 그는 연설문을 쓰거나 사색을 할 때면 이렇게 종종 창가에 앉곤 했다. 보좌관들은 그런 그를 위해 그리고 선전용으로 써먹기 위해 좀 더 소박한 분위기의 새로운 집무실을 하나 짓자고 건의했으나 스티브는 천성적으로 검소함과 간편함을 추구했고 국가에서 대대적으로 절약캠페인을 펼치는 때였기에 단칼에 거절을 했었다. 입으로만 공약을 내세우는 것은 그의 성격이 못되었다. 게다가 캡틴아메리카에게만큼은 백악관 웨스트 윙이란 여전히 국가를 상징하는 곳이었기에 그런 곳을 차지하고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스티브는 충분히 제 손에 길들여져 익숙한 만년필의 무게를 느끼며 손을 놀렸다. 어린 시절 겪었던 대공황과 이후에 일어난 2차 대공황까지 견딘 그가 사치를 부리는 것은 오직 필기구뿐이었다. 모든 것이 자동화 된 세상인데다 버튼 한번만 누르면 당장이라도 달려와 일정을 달달 외워 불러줄 비서들이 옆방에 대기 중이었지만 캡틴아메리카는 예전부터 지금 대통령이란 자리에 오른 뒤에도 일정을 확인하고 다시 수첩에 쓰는 일을 남에게 맡긴 적이 단 한번 도 없었다. 그는 아날로그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시대의 사람이었고 자신의 할 일은 제 손으로 직접 해야 안심을 하곤 했다. 스티브는 뒤에서 자신을‘아무도 믿지 않는 노인네’라며 손가락질 하는 것은 알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사람들의 입방아 때문에 수작업이 주는 안정감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며 무언가를 직접 쓰는 행위는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옛날의‘스티브 로저스’의 유일한 흔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티브는 자신이 이제는 늙었다는 것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임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아침 생방송, 유럽전쟁 참전자들과의 조찬, 재개장한 전쟁박물관의 축하연설, 캐나다 연합군과의 회담, 내년도 국방부 예산 편성 논의, 새로운 선전영상 촬영….


벌써 노트를 몇 장이나 가득 채웠지만 끝나지 않는 일정들을 들여다보며 스티브는 문득 피로감을 느꼈다. 하루에 3시간도 자지 못하는 생활이 벌써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이제는 그만둘 때라고도 스티브는 생각했지만 재작년에 통과된 대통령의 연임 관련 법안은 연임의 제한을 기존의 두 번에서 그 제한횟수를 없앴다. 현재 선거일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지만 선거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거의 없었다. 결과를 아는 선거만큼 지루한 것도 없었다. 현재 미국은 선거제를 선택했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였지만 언제나 결론은 나있었다. 


캡틴아메리카가 당신을 지켜드립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영웅인 캡틴아메리카의 보호아래에 들어가길 원했다. 애석하게도 스티브는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매일의 업무는 과중했고 복잡하게 얽혀있었으며 그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허투루 넘길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랬기에 혼자 애쓰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선택 하나하나에 달려있는 목숨들을 생각하면 남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생활이 10년이 넘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미 나가떨어졌을 테지만 그를 수퍼솔져로 만들어준 혈청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이 신비로운 약물은 그에게 보통의 인간과 다른 신체능력을 주었고 그 덕분에 견뎌낼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 아브라함 박사가 연약하고 어린병사인 스티브에게 혈청을 권유했을 때 이런 일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왜 저죠?(why me?)’


스티브는 실험 전날 밤, 박사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왜 나였을까. 수 천 번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질문이었다. 아브라함 박사는 스티브를 바라보며 그가 좋은 사람이기에, 힘의 가치를 알고 연민을 느낄 줄 알기 때문이라고 답해주었다.


젠장. 스티브는 욕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빗어 넘겼다. 요즘 들어 과거를 그리워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모든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건만 사실은 아무것도 잊지 못했다. 아마 이제 정말로 늙고 지쳐 물러날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혈청은 노화를 느리게 해주었고 그에게 여전히 젊고 건강한 육체를 주었지만 영생을 주지는 못했다. 정말 늙은이가 다 되었군. 자꾸 옛 생각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스티브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수첩은 접어두고 이제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전쟁박물관 개관식에서의 연설문을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언론매체와 일반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오는 자리였으며 그것을 떠나 이번 연설은 중요했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티브는 잠시 연설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진을 찍는 기자들과 말간 얼굴을 한 어린아이부터 참전 군인으로 보이는 노인들까지 스티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스티브는 손을 한번 쥐었다 폈다. 단상 위에 서있노라면 사람들의 고통과 그 고통을 끝내주리란 자신을 향한 기대감이 손에 베일 듯 전해져왔다.


“만약 온 나라 전체에서 당신만이 한 방향의 길을 택하면, 그리고 당신의 신념이 그것을 옳은 길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조국에게 임무를 다한 것이다. 머리를 꼿꼿이 들어라. 부끄러워할 게 없다.”


오랜 시간동안 스티브의 삶의 지침이 되어준 말이었다. 지난 50년간 줄곧 해온 일들 전부가 모두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또 다시 시작 된 전쟁들 이후에도, 수많은 이들의 죽음에도, 페기와의 불화와 헤어짐 그리고 그녀의 죽음 뒤에도. 캡틴아메리카는 제 신념을 위해서 머리를 꼿꼿이 들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제 신념만은 가슴속에 남아 스티브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책임져야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조국과 제 동포를 지키는 것, 그것들은 저의 사사로운 것들은 모조리 뒤에 놓을 만큼 중요했다. 

현재 눈앞의 사람들은 모두 지쳐있었다. 수십 년간 많은 전쟁을 치렀기에 소중한 이들을 잃었고 적대적인 타국의 견제에 사람들은 오랜 기간 가난에 시달렸었다. 몰락, 상실, 고통이 발전시킨 비애감은 사람들을 새로운 패배와 다른 형태의 가난으로 몰아넣었기에 스티브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일어서라고, 나아가야한다고. 그의 진정성 깊은 연설에 사람들의 안색이 밝아지고 있었을 때, 공포에 젖은 새된 비명소리가 캡틴아메리카와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내리꽂혔다.


“끼야아아아악!”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새카만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기묘한 현상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숨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가장 가까운 방공호를 찾기 시작했다. 이내 사이렌이 왕왕거리며 울리자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집에서 귀하거나 값이 나가는 것을 챙길 틈도 없이 오직 자기 가족들의 손을 부여잡고 최대한 멀리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빛나는 황금빛 갑옷과 위협적으로 솟은 황금색 뿔 투구를 쓴 남자는 갑작스레 나타나 우아한 몸짓으로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튀어나왔고 아스팔트도로 위로 화염이 번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라도 하는 듯 손을 움직이며 불꽃을 뿜어냈다. 남자는 희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손이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나가떨어진 목숨이 수십이었고 지금껏 수천, 수만에 이르렀다. 남자는 공중에 뜬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 이름은 로키다. 너희들의 어둠이자 분노며 두려움이자 죽음이다.”


로키의 진한 녹색의 눈은 광기로 빛났으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커질 때마다 입 꼬리를 잔뜩 당겨 환히 웃었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접한 사람들은 마치 메두사의 눈을 마주한 것 마냥 공포에 몸을 굳히고 움직이지 못했다.


“로키!”


태연자약하게 공중에 떠 있던 로키의 몸이 흔들리며 땅 아래로 떨어졌다. 캡틴아메리카가 던진 방패가 로키의 투구 끝에 부딪혔다 다시 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스티브는 로키의 주의를 사람들이 아닌 자신에게로 돌리고자 했고 그의 작전대로 로키의 관심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스티브를 막아서는 것은 로키가 아닌 그의 곁에 있던 경호원들이었다.


“모두 대통령님을 보호해!”


모두 전직 군인으로 이루어졌으며 자신의 영웅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던 용감한 애국자들이 몸을 날려 스티브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들은 스티브를 로키에게서 보호하고자 했다. 


“이런, 캡틴아메리카. 이제는 방패가 아니라 사람들 뒤에 숨는 건가?”


로키는 스티브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비웃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힘을 제대로 쓴다면 경호원들을 제치고 로키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으나 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알았기에 차마 그들을 물릴 칠 수 없었다. 십년 전이었다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직접 방패를 들고 악당과 싸웠을 캡틴아메리카였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방패를 제대로 써먹어보지도 못한 채 캡틴아메리카는 자신의 보좌관들에게 떠밀려 물러나야만 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전히 강인했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지위는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제 캡틴아메리카는 미국 그 자체였다.


“캡틴아메리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캡틴아메리카를 보며 로키는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씨근덕거리며 영웅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로키가 자신의 창을 들어 사방으로 휘두르자 순식간에 건물들이 땅 아래로 무너졌고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이 위로 솟구쳤다 다시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먼 곳에서 가까운 곳까지 메아리쳤다. 좀 전까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던 거리의 풍경은 순식간에 지옥도로 변해버렸다. 


잔뜩 파괴를 즐기고 난 로키가 이내 자취를 감추었지만 공포심은 여전히 남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공포, 그것이 로키의 의도라는 것을 알았지만 두려움을 거두고 투쟁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사람들은 너무도 오랜 시간 죽음을 겪었다. 그나마 그들이 버틸 수 있던 건 그들의 영웅인 캡틴아메리카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그리고 그들의 영웅이자 희망인 캡틴아메리카에게 감사했다. 스티브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쳐다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나는 영웅이 아니야. 라고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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