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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ep BLUE sea 下

2018. 6. 9.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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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ep BLUE sea 中

글/긴 2018. 6. 9. 17:47

 2014년도에 발간한 스팁로키 회지입니다. 

'만약, 캡틴아메리카가 70년대에 깨어났다면?' 이란 주제로 쓴 IF물.




The deep BLUE sea 中

(Steve Rogers X Loki) 

 

 

 

 

 

 

 

 



 


4


 

 

 

 

 

  

전쟁은 계속 되었다로키는 언제어디에서나 존재했고 갑자기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나기를 반복했다나는 이 기묘한 동거인에 대해 익숙해져갔지만 전쟁은 그렇지 못했다.


이미 한 번의 전쟁을 치러봤으니 이제 전쟁에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으나 베트남전은 전혀 다른 종류의 전쟁이었다무기도 달랐지만 무엇보다 상대가 달랐다베트남에서 만난 적들은 레드스컬의 군대보다 더 무시무시했다그들에게 최신식 무기는 없었지만 길에서 만나는 모두가 적이 될 수 있었기에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젊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나 노인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폭탄을 짊어지고 달려들었다순박하게만 보였던 사람들이 돌아서면 등에 칼을 꽂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무엇보다 용서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행동이었다무고한 민간인들을 방패로 삼아 위협했다그들의 비열한 방식은 우리 모두를 질리게 했고 끝내 나에게도 큰 상처를 입혔다그들이 성공한 것이었다.



 

* * *



 

막사로 돌아온 나는 손에 물든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내가 잘 아는 소녀의 피였다소녀는 연합군에게 호의적이었던 이장의 손녀였다이제 막 열일곱이 되었는데 부대원들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그녀가 가르쳐준 베트남어는 제법 쓸모가 있었기에 나는 간간히 소녀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었다부대원들은 소녀를 나의 현지처 정도로 생각한 듯 놀리곤 했다짓궂은 놀림에 얼굴을 붉히던 소녀가 나에게는 여동생처럼 느껴지기만 했다그랬기에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처음 보는 죽음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반군에게 잡혀 억지로 다이너마이트 조끼가 입혀졌을 때의 모습은 결코 쉽게 잊혀질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과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정당하다.(All´s fair in love and war) 좋은 말이야안 그래?

내가 알던 전쟁은 이런 게 아니었어!”


나는 로키에게 소리치며 분노를 터트렸다그는 마치 죽음의 신처럼 전쟁터를 쏘다니며 사람들의 죽음을 기꺼워했다몇 번이나 그에게 그러지 말아달라며 부탁했으나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이런 참혹한 상황에서조차 태연한 그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불쌍한 캡틴아메리카.


로키의 가느다랗고 섬세한 손이 내 눈물을 닦아주고 나서야 내가 언제부터인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불쌍하고 미욱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얼굴이 나에게로 불쑥 다가왔다심해를 닮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로키는 나를 위로하려는 듯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 곳곳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해주었다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내 눈물을 핥았지만 나는 거절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눈물만 흘렸다.


 


* * *



 

여전히 전쟁은 계속 되고 있었지만 나의 전투는 끝이 났다본국으로 귀환하라는 통지서를 받아든 뒤 겁쟁이처럼 안도감을 느꼈다한시라도 빨리 이 악몽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6

 

 

 

 

 


 

반년 만에 다시 찾아 온 조국은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보다 더 낯설게만 느껴졌다길어진 전쟁에 여론은 반년전과 판이하게 달라져있었다신문이나 라디오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제멋대로 떠들어댔다독립기념일이었지만 기념일을 축하하는 이들보다는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거리행진이 더 눈에 띄었다그들 중 하나가 다가와 나에게 전단지를 주려고 다가왔다다리 한쪽은 없었고 양팔의 피부 모두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그는 나에게 전단지를 내밀며 말했다.


이게 다 망할 놈의 고엽제 때문이죠.”


나는 도망치듯 그 거리를 벗어났다고엽제의 사용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당시 미로 같은 숲의 지형을 파악하기도 전에 게릴라들은 공격을 했고 나무들은 적의 몸을 숨겨주는 방패였다나와 부대원들은 나침반을 잃어버린 여행객들처럼 숲 속 이곳저곳을 헤매다 간신히 본부로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빌어먹을 놈의 나무들모두가 나무만 없어지기를 바래왔다그랬기에 정부에서 비행기로 고엽제를 뿌린다고 했을 때 우리는 모두 기뻐했었다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동료들이 피부를 벅벅 긁으며 기침이 잦아져도지나가던 여자들의 품에 안긴 아기의 기형적인 팔다리에도 자신은 몰랐다그것이 사람들을 좀먹는 독약인줄 정말로 몰랐다.


정말 몰랐어스티브?


언제나 그랬듯이 로키는 슬며시 나타나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로키가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렀다상냥함에 울분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변명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정말로 몰랐어그들을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어.”

그래당신은 몰랐겠지그들이 원했던 것을 주었겠지.


로키는 교활한 앵무새처럼 말을 되풀이하며 나를 놀리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왔다고 말해도 믿지 않았어!”


로키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보는 얼굴로 혀를 찼다.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지 않아그것은 그들의 본성이 아니야.

사람들은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전쟁은 끔찍해누구나 아는 사실이지하지만 계속 반복되지예전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듯 말이야.


로키는 예전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듯 나의 입술에 키스했다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이 끔찍하게 느껴졌지만 반대로 그것이 얼마나 유혹적이고 감미로운지 차마 떨쳐낼 수 없었다그의 손길을 뿌리치기는커녕 그의 얼굴을 잡고 키스에 응했다.


전쟁이 있는 한 사람들은 너를 원할 테지.


끔찍한 말이었다그리고 너무 듣고 싶은 말이었다나는내가 너무 끔찍했다.


당신이 깨어나서 전쟁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을 때사람들이 아직도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로키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그의 입을 막고 목을 조르고 싶었다그러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기쁘지 않았어?


나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화가 났다머리를 부여잡고 최대한 힘을 쥐어짜내어 간신히 말했다.


제발사라져

고지식하긴.


로키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자취조차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졌다방안에 나만이 홀로 남았다.






7

 

 

 

 

 

 

 

군사재판에 회부한다는 명령서를 받아든 뒤 나는 S.H.I.E.L.D 에 가기로 했다페기와 하워드가 만든 조직이었으며 이번 베트남 전쟁의 주축이 된 곳이었다물어볼 것이 너무 많았다그들이라면 내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대체 이 기사들은 뭐야어떻게 된 일이야?


나는 가판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사온 신문다발을 그들에게 내던지듯 펼쳤다제대한 군인들의 열악한 처우나 민간인에게 자행 된 가혹행위고엽제로 인한 피해사례들비인간적인 행위윤리에서 어긋난 참상


사진은 대부분 참혹했다한눈에 보아도 피해자들이 군인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처음에는 베트남군대에서 자행된 범죄행위인줄 알았으나 나 또한 참전한 군인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이뿐만이 아니었다베트남전쟁을 발발시켰던 통킨만 사건이 사실은 미국의 조작이었다는 증거가 밝혀지고 있었다


나에게 설명을 해줘야지나를 그곳에 몰아넣었으면서!”


나의 질문에 그들은 답하지 못했다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가혹한 비난에 어쩔 줄 모르는 듯 보였다페기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감추듯 쓸어내리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모두 사실입니다절 경멸해도 좋아요.”


확인사살과도 같은 말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맸다지금까지 정의라고 확신했던 일들이 모두 살인행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당장 이 모든 것들을 멈춰야 했다.


불쌍한 친구들의 얼굴을 보라지너에게 부끄러워하는 모습 말이야하지만 너도 그리 좋은 사람만은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할 텐데.


로키는 혀를 차며 비아냥댔다로키의 말대로 나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대공황의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살아왔으며 전쟁에서 크고 작은 전투들을 수없이 치러왔다생사를 넘는 일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만들었다성경의 십계명 중 반 이상은 어겼을 것이었다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었다그러나 단 한 번도 내 안의 기준이 되던 신념이나 정의가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자네가 모르는 게 있어!”


하워드가 다급하게 나를 뒤돌아 세웠다.


우리는 자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믿었어헌데 발굴 작업에는 돈이 아니라 군대의 힘이 필요했어베트남 전쟁 덕분에 페기는 장군이 되었고 덕분에 자네를 찾을 수 있었어우리는 타협을 해야만 했다네.”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해라는 말이군그렇다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어타협이 타락이 되었는데!”


나는 씹어내듯 말했다그들을 믿었었고 그들은 나의 선택을 믿어 줬어야했다이럴 거였으면 깊은 바다에서 끌어내질 말았어야 했다나는 처음으로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에 후회했다.


세상에는 절대 변하지도 변해서도 안 되는 일이 있어!”


지금까지 나를 슬프게 쳐다보던 페기는 입술을 한번 꾹 깨물고는 천천히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세상은 변했어요저도 더 이상 당신이 알던 페기카터가 아니고 당신만이 변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에 머리부터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세상은 빠르게 변해갔고 자신은 도태되고 있었다그녀의 말이 정답일지도 몰랐다나를 쳐다보는 페기의 눈길이 느껴졌다그녀는 나를 낯선 것을 대하듯 나를 보고 있었다.


많은 일이 일어났다네스티브많은 일이.”


스타크 또한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젊은 과학자가 아니었다호기심으로 빛나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이 시커멓게 죽어있었다희끗희끗해진 머리나 세월의 풍파가 그의 육신만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 마모시킨 것을 알아차렸다두 번의 전쟁은 사람을 어떻게 황폐화 시켰는가나는 아주 조금 뒤늦은 것뿐인데 사람들은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자신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변했고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것을 이제는 모두 틀리다고 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재빠르게 달아났다.

 



* * *




스티브재판 말일세.”


나는 하워드의 방문을 거절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문 앞에 서서 말을 이어갔다.


그들은 캡틴아메리카의 입으로 직접 베트남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답을 듣고 싶은 거야자네는 이 전쟁이 옳았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거네.”


하워드의 목소리는 절박해보였다이번 전쟁의 책임자는 그 둘이라는 것을 나 또한 알았다.


하워드옳은 전쟁이란 건 어디에도 없다네.”

우리를 위해서 모르는 척 해줄 수는 없는 거야?”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폭죽이 요란하게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은 어둠을 찢어냈다성조기가 눈에 들어왔다미국의 가치는자신이 배워오던 신념은자신이 지키려던 것은 무엇이었나자신의 고국영원한 정의의 수호자기회의 땅그 모든 것들이 미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그러나 지금은지금은 어떻게 된 거지외로움이 한 가득 입안에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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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

2014년도에 발간한 스팁로키 회지입니다.

'만약, 캡틴아메리카가 70년대에 깨어났다면?' 이란 주제로 쓴 IF물.




The deep BLUE sea 上

(Steve Rogers X Loki) 

 

 

 

 

 

 

 

 



 


1


 

 

 

 

 

  

1970년 12월 18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발키리호가 그린란드의 빙산아래에서 발견되었다스타크사의 CEO인 하워드 스타크는 기자회견을 통해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웅 캡틴아메리카가 25년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살아있다고 발표했다이 놀라운 소식은 미국 전역을 들끓게 만들기 충분했다.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 등 유명 일간지의 1면은 물론이며 라디오와 텔레비전 쇼할리우드의 영화까지 모든 언론에서는 영웅의 귀환’ 이란 제목으로 캡틴아메리카에 대해 다루었다월스트리트 저널만이 미국의 주가상승에 대한 예측 기사를 썼을 뿐이었으나 그 또한 모두 캡틴아메리카의 귀환덕분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영웅의 귀환은 미국에 수많은 변화를 일으켰다인플레이션과 연이은 주가폭락으로 인해 예측되던 제 2의 경제 대공황을 벗어날 수 있던 것은 물론소련과의 군비경쟁에서 간신히 우위를 점하던 미국은 그 격차를 벌려놓는데 성공했다.


특히나 전쟁영웅의 등장으로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공화당이었다길어지는 전쟁 때문에 곤두박질치던 닉슨대통령의 지지율을 단숨에 치솟게 했고 캡틴아메리카를 베트남으로 파병해 전쟁반대론자들의 여론을 불식시켰기에 닉슨대통령의 재임이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캡틴아메리카또 다시 미국을 구해낸 영웅이었다.

 



 


2

 

 

 

 

 

 

 

마리아 스타크라네.”


눈을 뜨자 잘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가 나를 향해 말했다폭탄을 실은 비행선이 뉴욕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린란드에 불시착을 시도 한 것이 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그리고 지금은 낯선 곳에 누워있었다얼떨떨하기만 해 멍하니 상대방을 쳐다보자 그런 나의 반응에 과장된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내 부인 이름이 마리아란 말일세마리아 스타크자네가 그랬지나는 평생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할 거라고?”


그제야 나는 눈앞의 남자가 하워드 스타크라는 것을 알아챘다기억 속 하워드 스타크’ 보다 더 깊게 패인 주름과 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있었고 입가에 걸려 있는 특유의자신만만하다 못해 종종 오만하다고까지 느껴지던 미소를 가진 것은 여전했다.


좋아기억력에는 문제없는 것 같군그럼 나한테 빚진 10달러도 잊지 않았겠지?”


그의 말에 예전에 지나가듯 한 내기가 떠올랐다당시에도 무례한 내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가 먼저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했던 것이 먼저였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워드가 결혼을 할지 안할지에 관한 내기를 했었다이것으로 그가 하워드 스타크라는 것을 확신했다방금 깨어난 사람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할 만큼 뻔뻔한 이는 내가 알기로는 하워드뿐이었다그래도 그의 행동이 나름의 배려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놀랍군이 내기는 내가 이길 줄 알았는데.”

“25년이나 흘렀으니까덕분에 나한테 빚진 10달러의 이자가 제법 된다네그러니 내 돈 내놓으시지.”


하워드의 재촉에 나도 모르게 바지주머니를 뒤져보지만 손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게다가 이제 보니 입고 있는 옷도 내 것이 아닌 가벼운 운동복이었다내가 난색을 표하며 나중에라도 꼭 갚겠다고 말하자 하워드는 기다렸다는 듯 두꺼운 파일 몇 개를 내게 던져주었다.


융통성 없는 건 여전하네그 말 잊지 말게나이제 자네는 부자야나보단 아니지만.”


파일 안에는 내가 전쟁영웅으로 인정되어 대위(captain)에서 소령(major)으로의 진급명령이 적힌 서류와 전쟁 당시 지급되었던 채권들의 높아진 가치에 관련한 보고서들이 몇 장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종과 고아였던 덕분에 가지고 있던 채권들과 연금이 내 명의의 연방은행에 고스란히 잠들어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하워드는 격렬한 반응을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저 “0이 많군.” 이라고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내 말에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하워드가 콧수염이 흔들릴 정도로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그런 하워드를 보며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다한참을 웃고 나서야 하워드가 이번에는 작고 네모난 상자를 흔들며 말했다.


자네가 잠들어있던 동안 일어난 중요사건들을 모아봤지비디오테이프라는 건데 영사기 없이도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네.”


그의 과학적인 설명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집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하워드는 열정적인 선생처럼 1970년까지의 역사나에게는 미래인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달을 걸었고 마틴 루터킹이라고 대단한 흑인이 있었지덕분에 이제 흑인과 백인이 결혼 할 수 있어좋은 일이지그리고 한국전쟁이 있었고 지금은 또 다른 전쟁이 한창이라네.”


한참을 줄줄 쏟아내던 하워드는 숨을 골라내더니 다른 서류파일을 꺼내들었다처음에 내밀었던 것 보다는 얇았지만 앞면에 써져 있는 이름을 읽은 순간 나는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마지막으로이게 자네가 가장 궁금해 하는 일이겠지페기카터 는 장군(General)이 되었다네최초의 여성장군이야.”


항상 그리워하던 그녀의 소식이었다스타크에게는 미안하지만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그녀페기카터였다그녀가 지금은 장군이 되었다니그녀가 지니고 있던 강인함이나 능력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었지만 내심 놀라웠다훌륭한 군인에 있어 남녀는 상관이 없음을 그녀가 증명한 것이다그녀야말로 하워드가 만들어 준 비디오테이프를 보지 않아도 시대가 점점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훌륭한 증거였다.


지금은 두 아들의 훌륭한 어머니이자 좋은 아내라네.”


파일 안에는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가족사진도 함께 있었다조금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페기와 부부를 반반씩 닮은 아이들그녀 옆에 꼭 붙어있는 남편까지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이상적인 가족처럼 보였다나는 파일을 덮고 애써 말을 돌렸다.


그보다 자네는 어떻게 지냈나?”

이제 유부남이지만 여전히 잘나가는 천재 무기개발업자이자 세계최대의 무기상이지.”

이상한 엑스포를 열던 취미는 버렸고?”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하워드는 입술만 끌어올린 미소를 보여주었다그를 안 뒤로 처음 보는 서글픈 얼굴이었다조금 전만해도 패기 넘치던 청년의 얼굴은 순식간에 쇠락의 길에 접어 든 중년의 얼굴로 변모했다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피어올라 재만 남은 열정이었다나는 그에게 많이 변했다고 해야 할지 여전해야하다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 * *



 

맨하탄의 빌딩 하나를 내주겠다는 하워드의 제안을 뿌리치고 브루클린의 작고 아담한 집을 골라 이사를 했다그의 호의는 고마웠으나 전구 하나까지 최신식으로 설계 되어있는 하워드의 빌딩은 불편하기만 했다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요즘 물건들에 영 익숙해지지가 않았다내가 잠들어있던 사이에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청소기세탁기의 발명으로 사람들이 할 일은 줄어들었고 컬러텔레비전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전쟁 전 즐겨보던 영화 몇 편이 떠올랐다화려하기는커녕 흑백에 조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직까지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런 옛날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나 또한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방안에 들어서자 낡은 건물의 냄새가 났다삐걱거리는 마룻바닥과 구식 라디에이터가 뿜어내는 열기에 마음이 편해졌다마음이 편해지자 피곤이 몰려왔다나는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그러나 다시 잠이 드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다잠은 이미 충분히 자두지 않았던가.


지난 25년간 끊임없이 꿈을 꾸었다버키와 놀던 어린 시절 꿈이나 레드스컬과 싸우는 꿈을 꾸기도 했다때로는 페기와 춤을 추기도 했다토요일 저녁의 스토크 클럽(stork club) 안은 종전의 기쁨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붐볐고 페기는 약속대로 나에게 춤을 가르쳐주었다어설픈 춤 솜씨에 그녀의 발을 몇 번이나 밟아도 그녀는 상냥하게 웃었다페기의 리드에 따라 블루스를 추었다곡이 끝나면 그녀는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날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말에 그제야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나는 여전히 깊고 차가운 바다 아래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그 꿈은 너무 달콤했지만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너무 잔인했다나는 아직도 자고 일어나면 지금 이순간이 꿈일까 무서웠다.






3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와 동시에 샴페인을 터트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새해 축하인사를 건넸다거리는 새해를 맞이하여 터지는 폭죽을 구경하는 가족들과 서로 껴안고 키스하는 연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미국은 전쟁 중이었지만 사람들은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보다는 지금 당장의 평화를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새해에도 행운이 있기를 빌게요로저스 대령.”


뒤를 돌아보자 감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린 페기 카터가 서 있었다눈가와 입가의 주름이 무색할 만큼 그녀는 여전히 우아하고 매력적이었다그녀를 공식석상이 아닌 곳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그녀를 향해 경례를 했다.


카터 장군님.”


격식을 갖춘 인사에 그녀는 살짝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경례가 아니라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받아주었다나는 실례를 범했다고 느끼며 다시 악수를 청해야하나 고민했지만 결국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나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해 그녀의 옷차림을 칭찬했다.


그런 로저스대령은 오늘도 군복을 입으셨군요.”

사실솔직히 말하자면 옷을 입는 것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페기는 나의 어설픈 변명을 쳐낼 만큼 모진 사람은 아니었다나의 장단에 맞추어 애써 활발한 척나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잡아주었다.


예전부터 당신 옷차림은 제 취향이 아니었죠."


그녀의 말에 시무룩한 얼굴을 지어보이자 페기가 웃음을 터트렸다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페기는 연회장 한가운데에 서있는 하워드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스타크씨는 당신은 벗고 다니는 게 낫겠다고 말했었죠.”


하워드와 페기는 좋은 친구이자 나의 옛 모습을 동시에 추억하고 있던 동지였다지금은 장군과 무기거래상으로 여전히 돈독한 관계였지만 그 밑바탕아래에는 아직도 친애적인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그들의 얼굴을 보니 예전 페기와 하워드의 사이를 오해했던 일이 떠올라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때는 어리고 어리석었기에 질투에 눈이 멀어 부끄러운 짓을 했었다하워드와 자신과 페기순간 25년 전의 그 날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아니요저도 이제 많이 늙었는걸요.”


페기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녀의 미소는 예전 그대로였다강인한 부드러움곧고 정직한 마음가짐외양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그 이상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웃음을 본 순간그녀에 대한 감정이 세월이 지나 옅어지기는커녕 더욱 공고해졌음을 알아차렸다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만약 발키리에 마지막까지 타고 있지 않았었다면 어쩌면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헛된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페기늦었지만 그때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지켜도 될까요?”


충동적인 감정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페기의 손을 잡았다페기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뿌리쳤다그러나 그 행동에 놀란 것은 도리어 페기인 것 같았다페기는 잡혔던 손을 감싸 쥐며 황급히 뒤로 감추었다방안에 갑작스러운 침묵이 찾아왔다허탈감과 상실감이 소용돌이 쳤다그녀와 나 사이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하워드가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어요저는 이만.”


그녀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채 감추지 못하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이미 당시의 약속은 흩어져 없어진지 오래였다나는 문득 그녀와 춤을 추던 꿈이 그리워졌다.




* * *

 



하워드를 따라 연회장 한견에 따로 마련 된 방안에 들어서자 매캐한 담배연기가 코끝을 찔렀다무리지어 있는 남자들은 끊임없이 시가를 피워댔고 하워드 또한 자연스럽게 탁자 위에 놓인 시가를 입에 물었다시가를 피우지 않은 것은 나만이 유일했다.


신문이나 TV에서 보던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지만 담배연기가 장막처럼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 확신할 수는 없었다.


캡틴아메리카이거 영광이로군자네를 만나게 되다니.”


몸이 다부진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 짐짓 친근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것은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미소 짓고 있는 얼굴과 별개로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노련한 사냥꾼을 떠올리게 했다그를 보며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워드는 남자를 미스터 피어스라고 불렀다공화당의 중추적인 인물로 나도 몇 번 들어본 이름이었다금세 그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피어스는 나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인사를 시켰다마치 예전의 춤추던 어릿광대 원숭이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그런 생각들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피어스는 한숨 돌리자며 나를 발코니로 데리고 갔다사람을 다루는데 능숙한 남자였다.


며칠 전 대통령님을 만났었지어떤가자네가 본 대통령님은.”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내가 만나 본 대통령은 전쟁에 대하여 반대했지만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을 했다물론피어스의 질문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그날 대통령은 나에게 넌지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대한 나의 의중을 물어봤다국민들은 캡틴아메리카가 직접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기를 원한다던 말에 당시에는 즉답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일지도 몰랐다어차피 잠에서 깨어난 뒤 하는 일은 대부분 라디오와 방송을 통해 청년들의 입대를 요청하는 것이었다예전에도 비슷한 일을 했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은 25년 전에도 안전한 후방보다는 나가서 싸우는 것을 원했던 터였기에 생각이 많아지던 찰나였다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있을까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피어스는 품안에서 시가를 하나 더 꺼내든 뒤 불을 붙였다.


자네도 하나 하지?”


피어스가 시가를 권유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혀를 찼다.


저 히피족들을 보게나저러니 전쟁에 이길 수 없지 않은가.”


피어스가 가리킨 곳에는 긴 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무리들이 있었다그들의 손에는 대부분 기타와 전쟁반대 피켓이 들려있었다전쟁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베트남의 선제공격에 선량한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고 군사독재에 의해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면 우리는 전쟁을 해야만 했다지난 날 레드스컬의 손아귀에서 사람들을 구해냈듯 말이다.


우리에게 자네가 필요하네조국을 위해 자네가 한 번 더 나서주길 바라네!”


피어스는 내 어깨를 붙잡았다좀처럼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 지리멸렬한 싸움을 끝내 줄 전쟁영웅을 원했다무엇보다 조국이 자신을 원했다그보다 더 큰 동기는 없었다.

 





4

 

 

 

 

 

 


베트남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맞이한 것은 가만히 있어도 숨 막히는 더위와 그보다 더 뜨거운 군인의 환영인사였다그들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앞 다퉈 나와 나에게 사인을 요구하는 이도 많았다나는 군인이었지 유명인사가 아니었기에 거절을 하고 싶었지만 내 뒤를 따라오던 공보장교가 속삭였다.


아버지 세대의 영웅이자 어린 시절의 영웅인 당신이 그 모습 그대로 눈앞에 나타났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승리를 거머쥔 듯 환호했다미국인만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다양한 국가에서 모인 다양한 인종을 보니 코만도즈 대원들이 생각났었다인종과 국가는 달랐지만 옳은 정의를 위해 함께 싸웠던 아군은 예나 지금이나 든든한 존재였다그들의 존재에 나는 당장이라도 전쟁에서 이길 것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랬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지 않아 무참히 꺾였다상상했던 것보다도 베트남은 무더웠고 한낮이면 몸은 불덩이처럼 느껴지고 아무 생각도 못할 정도로 머릿속까지 뜨거워졌다그저 서 있기만 해도혹은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내리쬐는 뜨거운 햇볕 속을 암담한 마음을 안고 억지로 걷곤 했다계속 되는 더위와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들에 우리는 점차 지쳐만 갔다무엇보다도 제일 최악이었던 것은 조국에서 들려오는 전쟁반대시위에 대한 소식이었다부정적인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나조차도 맥이 빠졌기에 부대에서의 신문과 라디오를 금지했다.




* * *



 

남자를 만난 곳은 전쟁의 한복판이었다사방에서 울리는 폭음과 그 폭음에 파묻힌 비명소리들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그 지옥 같은 곳에서 남자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운 얼굴로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등줄기로 긴장감 때문에 배어 나온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햇빛이 온 몸을 꿰뚫어 더위 때문에 옆구리와 목덜미에 땀이 배어나오는 와중에 등에 흐르는 땀은 그런 것들과 종류가 다른공포나 불안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남자는 6피트는 넘는 듯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가냘픈 느낌을 주었다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목덜미까지 내리덮은 장발을 하고 뺨이 옴폭 패인 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상한 것 투성이었지만 무엇보다 기이했던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그 깊고 짙은 녹색의 눈동자를 마주보는 순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암흑의 세계에 홀로 버려져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순간 혼란에 빠져 어슴푸레한 불안에 휩싸였다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그의 등장에 주목을 하거나 의문을 갖지 않았다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그는 유령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아니면 환상일까어쩌면 수퍼세럼의 부작용일지도 몰랐다어떤 것이 되든지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잔뜩 경계하는 나를 아랑곳 하지 않고 남자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녕다시 만나서 반가워내 이름은 로키야.


그 손을 잡은 순간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존재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로키는 실재했고 그 생각이 착각인 것 같지는 않았다나는 조용히 그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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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로키] 모순 3

2018. 2. 28.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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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로키] 모순 2

글/긴 2018. 2. 28. 17:48

2015.06 스팁로키 앤솔로지 <창과 방패>




* * *



웨스트 윙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잠깐이나마 활짝 열어뒀던 창문들은 다시 철문이 덧대어졌고 모두가 사태파악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근처 전력소가 파괴되기라도 한 건지 어느 곳보다 밝아야 할 백악관의 전등들은 깜빡이며 힘겹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움 사이에서 스티브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수석비서인 게리는 재빠르게 이번 사건에 대한 상황보고를 했다.


“…피해가 만만찮았지만 다행이 민간인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그 말은 즉, 그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린 경호원들은 살아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스티브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단호한 손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모두 다 이 방에서 나가주세요.”

“하지만 현재 상황의 위험함을 생각하면 혼자 계시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스티브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오래도록 군인으로 살아왔기에 말투가 딱딱하고 고지식한 사고방식을 가지긴 했어도 일적인 부분에서만 냉정했지 기본적으로는 따뜻하고 상냥한 남자였다. 아무리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화를 내기보다 체육관의 샌드백을 터트리는 것으로 해소 할 정도였다. 그러나 때로 스티브는 딴사람처럼 차갑게 굴었는데 대부분의 이유는 로키였다. 로키의 일방적인 살육이 끝나고 나면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혼자 있기를 원했고 이럴 때는 그의 뜻대로 홀로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 나름의 자기반성 시간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보좌관들은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났다. 그러나 태산과도 같던 어깨가 어둠 속에 잠기는 것을 볼 때마다 가끔씩, 그가 자살이라도 하는 것이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금세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할 헛된 망상으로 치부할 뿐이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캡틴아메리카였기에.


“이제 나와.”


허공을 쳐다보며 낮게 중얼거리는 스티브에게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흐트러진 윗옷을 아예 벗어버리고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바닥으로 던지고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휘휘 돌렸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가 취했다고 여겼겠지만 캡틴아메리카를 취하게 만드는 술은 없었다. 취할 수 없었지만 스티브는 오늘 같은 날이면 예전의 습관대로 술을 마셨다. 그 앞에는 자신의 잔과 오늘 자신을 막아섰던 경호원들의 숫자만큼의 술잔이 놓여있었다. 술은 누군가를 기리는데 좋은 도구였다. 잘은 몰랐지만 그들 가운데는 결혼을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었고 당연히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스티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당장 나와!”


스티브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위스키 병을 벽에 던졌다. 아니, 던졌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산산조각이 나야 할 병이 실로 매달아 놓은 것처럼 공중에서 멈추었다.


“이런, 조심해야지. 여기 가구들 대부분이 미국역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함부로 대하면 안 되지. 여기가 스미소니언박물관이나 다름없다는 걸 너도 잘 알면서. 오, 물론 너를 포함해서 말이야.”

“로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나타난 이는 몇 시간 전만해도 캡틴아메리카와 대치하던 그의 최대의 적, 로키였다. 항상 과장 된 뿔 투구와 단단한 갑옷을 입고 나타나던 로키였지만 지금은 제게 꼭 맞는 고급스러운 정장과 녹색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모델로 알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들만큼 로키에게 잘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로키는 허공에 떠있던 병을 잡아 스티브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는 그 곁에 앉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 스티브. 내가 보고 싶었어?”


로키와 마주 앉은 캡틴아메리카라니. 가장 의심이 많은 음모론자도 감히 꺼내지 못할 이야기였다. 세기의 악당과 세기의 영웅의 밀회였다. 스티브는 이를 악물고 로키를 향해 말했다. 


“왜 그들을 죽인거지? 너라면 죽이지 않을 수 있었잖아!”


마치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로키는 허리를 굽히며 크게 웃었다. 몇 번이나 파안대소한 로키는 혀를 끌끌 차며 스티브의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있는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오. 스티브 로저스. 아직도 이렇게 순진하다니!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선 공포심을! 공포를 얻기 위해선 죽음을 봐야하는 것쯤은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아?”


스티브는 로키의 손길을 거칠게 쳐낸 뒤 눈을 감고 그를 등졌다. 스티브에게 있어 침묵은 곧 무언의 동의란 것을 로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현재 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것도 잘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비웃던 로키는 갑자기 불안한 기색으로 스티브의 눈치를 살피는 듯 눈썹을 늘어뜨리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스티브. 아주 작은 실수였어. 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잖아?”


냉정히 돌아선 스티브의 등을 로키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리다 마치 굳게 닫힌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듯 톡톡 두드렸다. 그러나 스티브가 돌아서기는커녕 벌떡 일어나 아예 뒤돌아 나가려는 순간, 스티브의 소매 끝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스티브. 나를 내치지마.”


흔들리던 녹색 눈동자의 색이 흐릿해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해보였지만 로키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 다시 환하게 웃어보였다. 여전히 쳐진 눈썹과 잘게 떨리는 입 꼬리가 억지웃음이란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스티브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지난 번 눈물을 흘리던 로키에게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그의 눈물이라고 말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는 탓이었다. 


스티브는 강한 손길로 로키의 섬약해 보이는 턱을 그러잡았다. 아픔을 느꼈는지 로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한순간이었을 뿐, 이내 순종적인 태도로 스티브를 올려다보았다. 로키는 그의 처분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광기로 지독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어디로 사라지고 녹색눈동자에는 초식동물처럼 유순함을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좀 전까지 사람들의 피로 손을 물들인 채 웃어젖히던 악당은 어디로 가고 사랑받기 원하는 어린아이만 남았는가. 이 애정을 갈망하는 눈동자를 마주 할 때 마다, 스티브는 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자꾸 생겨서는 안 될 감정들이 피어났다. 


스티브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다른 한손으로 로키의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내리자 컥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울렁이는 로키의 목울대가 스티브의 눈에 들어왔다. 1인치만 손을 내려 지금 당장 곧게 뻗은, 연약하고 흰 네 목을 부러트리면,

“다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자신을 향한 명백한 살의에도 부구하고 로키는 스티브를 저지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로키의 까만 머리통이 스티브의 손길에 따라 거칠게 흔들렸다. 로키는 희게 질린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결국 애원의 말을 꺼냈다. 


“스티브, 제발…….”


하지만 로키의 애원이 자신을 상처 입히지 말아달라는 것이 아님을, 그 눈동자가 걱정하는 것은 온전히 스티브 자신이었음을 스티브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혼란스러웠다. 너는 악당이야. 그것도 아주 못되고 악마 같은. 지금은 내 앞에서 울면서 애정을 갈구하고 있지만 사실 너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그리고 나는.


“그만하고, 나를 안아줘. 스티브”


그리고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 * *



기이한 푸른색이 감도는 세계가 자신을 덮쳤다고 생각한 순간, 스티브는 자신이 처음 보는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무無의 공간이었다. 제 아무리 기이한일을 많이 겪어본 자신이라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모든 것이 암흑이었고 오로지 저만이 뚜렷이 보일 뿐이었다. 잠깐의 당황함을 뒤로 한 채 스티브는 이내 걱정하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은 떨어지고 있던 발키리호에 있었다. 간신히 레드스컬을 저지했지만 해결해야할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발키리호는 폭탄을 가득 실은 채 뉴욕으로 가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폭탄들이 터진다면 수만명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었다. 스티브는 당장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조건 앞을 향해 달렸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네 죄책감이 덜어진다면야.”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내는 중세시대에나 입을법한 옷차림을 하고서는 저를 향해서 웃고 있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의자에 앉은 것처럼 허공에 떠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떠있는 것이 놀라웠지만 이미 이상한 일은 충분히 겪은 참이었다. 스티브는 방패를 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남자는 스티브의 모습이 가당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코웃음을 쳤다. 남자가 레드스컬의 한편인가라고 생각했었건만 그의 관심 없어 보이는 태도에 자세를 풀고 질문했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시간과 공간의 틈. 세계와 세계를 연결해주는 통로. 그리고 존재해서도 안 되고 존재하지도 않는 장소.”

“그런 말도 안 되는! 여기에 당신과 내가 존재하는데?” 


스티브의 말을 들은 남자는 어리석은 것을 보는 듯 혀를 차다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왔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걸 보니 필멸자로군. 여기까지 온 인간은 처음 이야. 아니, 나 외에는 처음 온 존재지.”


그제야 흥미롭다는 듯 스티브의 눈을 쳐다보던 남자는 당당하게 가슴을 피며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아스가르드의 로키다.”


여유롭게 자기소개나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놀랍고 분명 제 인생에 있어서 처음 있는 기이한 일이었지만 관심을 둘만큼의 여유가 스티브에게는 없었다. 분명 뉴욕으로 가던 비행선의 방향을 틀어 남극으로 가고 있었고 페기와 대화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눈앞이 푸른색으로 물들더니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지금 비행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뉴욕? 아니면 바다 속으로? 이건 꿈일까? 하지만 아직도 전투의 여파로 욱씬거리는 몸의 통증이 현실임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이제 알았다. 테서렉트 때문이었군. 공간을 열어주는 물건이지.”


스티브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로키는 제 의문이 풀린 것에 퍽 즐거워했다. 보지 않고도 테서렉트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로키를 보며 아마도 이 곳을 빠져나가는 것도 그가 알 것이라고 여긴 스티브가 로키를 붙들고 캐물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 폭탄을 실은 비행선이 뉴욕을 향해 가고 있어요. 제가 그걸 막아야합니다. 혹시 돌아가는 방법을 아십니까?”


어느새 스티브에게서 빠져나온 로키는 스티브의 손이 닿았던 손목을 거칠게 닦아내며 화를 내었다.


“돌아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텐데? 너는 외롭게 죽을 거야!”


로키는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티브의 운명을 단언했다. 분명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신은 외롭게 죽지 않을 것이었다. 스티브는 제 품안에서 나침반을 꺼내들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사랑이 될 그녀의 사진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스티브는 로키를 향해 단언했다.


“제가 선택한 것이니. 그것이 제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것입니다.”


담담한 스티브의 말에 로키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는, 내가 아는 자들을 많이 닮았군.”


그 말을 내뱉은 로키는 살짝 고개를 모로 틀어 제 슬픔을 감추려는 듯 했다. 그러나 고전 명화처럼 그의 처연함이 스티브의 마음속에 깊게 새겨졌다. 깊고 짙은 녹색의 눈동자 속에서 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감정은 오래도록 켜켜이 쌓여 그 형태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 것처럼 보였다. 아마 눈앞의 남자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자칫하면 저 심연과도 같은 곳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었다. 스티브는 떨치고 나와야했다. 이곳에서 사로잡힐 수는 없었다.


“필멸자, 네 이름이 뭐지?”

“…스티브, 스티브 로저스.”

“좋아, 스티브. 네 소원을 들어주겠어. 소원을 말해봐.”


로키는 스티브를 바라보며 자비로운 신처럼 웃었다. 저 남자가 자신을 구해주고 세상을 구해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게 끝날 수 있지 않을까? 미련을 털었다고 생각했지만 실낱같은 가능성이 보이자 다시 희망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스티브는 로키를 향해 세 가지 소원을 빌었다.


“내가 타고 있던 비행선이 뉴욕이 아닌 곳으로 떨어지는 것. 전쟁이 끝나는 것. 그리고 페기를 만나는 것.”

“좋아, 네 소원을 들어주지.”


그가 손을 한번 휘두르자 사방이 밝아져왔다. 신이 빛이 있으리라 명한 것처럼 순간 사방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빛의 세계가 스티브와 로키를 덮쳤고 순식간에 그들을 집어삼켰다. 그것이 로키와 스티브의 첫 만남이었다.


스티브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페기와 약속했던 토요일 8시, 스토크 클럽 앞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 스티브를 발견한 페기는 그의 생환에 눈물을 흘렸고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들은 이 놀라운 기적을 마음껏 누렸다. 스티브는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음에 신이 진정 존재했음을 진실로 기뻐했다. 그러나 스티브의 소원은 지독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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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로키] 모순 1

글/긴 2018. 2. 23. 15:58

2015.06 스팁로키 앤솔로지 <창과 방패>



모순











거리엔 어둠이 떠다녔고 새벽이 오는 것은 머나 먼 일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숨죽인 채 집안에 웅크리고 누워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고된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것은 꿈이었으니 누구든 이 시간을 마음껏 즐기리라. 그러나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캡틴아메리카의 하루는 끝을 모르고 계속 되풀이되고 있었다. 


간단한 운동을 마치고 오벌 오피스(Oval Office)에 들어온 캡틴아메리카는 짙은 밤나무 색 책상 중앙에 독수리문양이 멋지게 새겨진 대통령 집무실 책상(The Resolute Desk)이 아닌 창가에 걸터앉아 손바닥 크기의 수첩을 펼쳤다. 화려하고 웅장한 집무실은 그에게 어색하고 불편한터라 그는 연설문을 쓰거나 사색을 할 때면 이렇게 종종 창가에 앉곤 했다. 보좌관들은 그런 그를 위해 그리고 선전용으로 써먹기 위해 좀 더 소박한 분위기의 새로운 집무실을 하나 짓자고 건의했으나 스티브는 천성적으로 검소함과 간편함을 추구했고 국가에서 대대적으로 절약캠페인을 펼치는 때였기에 단칼에 거절을 했었다. 입으로만 공약을 내세우는 것은 그의 성격이 못되었다. 게다가 캡틴아메리카에게만큼은 백악관 웨스트 윙이란 여전히 국가를 상징하는 곳이었기에 그런 곳을 차지하고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스티브는 충분히 제 손에 길들여져 익숙한 만년필의 무게를 느끼며 손을 놀렸다. 어린 시절 겪었던 대공황과 이후에 일어난 2차 대공황까지 견딘 그가 사치를 부리는 것은 오직 필기구뿐이었다. 모든 것이 자동화 된 세상인데다 버튼 한번만 누르면 당장이라도 달려와 일정을 달달 외워 불러줄 비서들이 옆방에 대기 중이었지만 캡틴아메리카는 예전부터 지금 대통령이란 자리에 오른 뒤에도 일정을 확인하고 다시 수첩에 쓰는 일을 남에게 맡긴 적이 단 한번 도 없었다. 그는 아날로그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시대의 사람이었고 자신의 할 일은 제 손으로 직접 해야 안심을 하곤 했다. 스티브는 뒤에서 자신을‘아무도 믿지 않는 노인네’라며 손가락질 하는 것은 알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사람들의 입방아 때문에 수작업이 주는 안정감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며 무언가를 직접 쓰는 행위는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옛날의‘스티브 로저스’의 유일한 흔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티브는 자신이 이제는 늙었다는 것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임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아침 생방송, 유럽전쟁 참전자들과의 조찬, 재개장한 전쟁박물관의 축하연설, 캐나다 연합군과의 회담, 내년도 국방부 예산 편성 논의, 새로운 선전영상 촬영….


벌써 노트를 몇 장이나 가득 채웠지만 끝나지 않는 일정들을 들여다보며 스티브는 문득 피로감을 느꼈다. 하루에 3시간도 자지 못하는 생활이 벌써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이제는 그만둘 때라고도 스티브는 생각했지만 재작년에 통과된 대통령의 연임 관련 법안은 연임의 제한을 기존의 두 번에서 그 제한횟수를 없앴다. 현재 선거일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지만 선거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거의 없었다. 결과를 아는 선거만큼 지루한 것도 없었다. 현재 미국은 선거제를 선택했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였지만 언제나 결론은 나있었다. 


캡틴아메리카가 당신을 지켜드립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영웅인 캡틴아메리카의 보호아래에 들어가길 원했다. 애석하게도 스티브는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매일의 업무는 과중했고 복잡하게 얽혀있었으며 그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허투루 넘길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랬기에 혼자 애쓰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선택 하나하나에 달려있는 목숨들을 생각하면 남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생활이 10년이 넘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미 나가떨어졌을 테지만 그를 수퍼솔져로 만들어준 혈청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이 신비로운 약물은 그에게 보통의 인간과 다른 신체능력을 주었고 그 덕분에 견뎌낼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 아브라함 박사가 연약하고 어린병사인 스티브에게 혈청을 권유했을 때 이런 일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왜 저죠?(why me?)’


스티브는 실험 전날 밤, 박사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왜 나였을까. 수 천 번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질문이었다. 아브라함 박사는 스티브를 바라보며 그가 좋은 사람이기에, 힘의 가치를 알고 연민을 느낄 줄 알기 때문이라고 답해주었다.


젠장. 스티브는 욕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빗어 넘겼다. 요즘 들어 과거를 그리워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모든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건만 사실은 아무것도 잊지 못했다. 아마 이제 정말로 늙고 지쳐 물러날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혈청은 노화를 느리게 해주었고 그에게 여전히 젊고 건강한 육체를 주었지만 영생을 주지는 못했다. 정말 늙은이가 다 되었군. 자꾸 옛 생각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스티브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수첩은 접어두고 이제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전쟁박물관 개관식에서의 연설문을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언론매체와 일반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오는 자리였으며 그것을 떠나 이번 연설은 중요했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티브는 잠시 연설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진을 찍는 기자들과 말간 얼굴을 한 어린아이부터 참전 군인으로 보이는 노인들까지 스티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스티브는 손을 한번 쥐었다 폈다. 단상 위에 서있노라면 사람들의 고통과 그 고통을 끝내주리란 자신을 향한 기대감이 손에 베일 듯 전해져왔다.


“만약 온 나라 전체에서 당신만이 한 방향의 길을 택하면, 그리고 당신의 신념이 그것을 옳은 길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조국에게 임무를 다한 것이다. 머리를 꼿꼿이 들어라. 부끄러워할 게 없다.”


오랜 시간동안 스티브의 삶의 지침이 되어준 말이었다. 지난 50년간 줄곧 해온 일들 전부가 모두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또 다시 시작 된 전쟁들 이후에도, 수많은 이들의 죽음에도, 페기와의 불화와 헤어짐 그리고 그녀의 죽음 뒤에도. 캡틴아메리카는 제 신념을 위해서 머리를 꼿꼿이 들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제 신념만은 가슴속에 남아 스티브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책임져야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조국과 제 동포를 지키는 것, 그것들은 저의 사사로운 것들은 모조리 뒤에 놓을 만큼 중요했다. 

현재 눈앞의 사람들은 모두 지쳐있었다. 수십 년간 많은 전쟁을 치렀기에 소중한 이들을 잃었고 적대적인 타국의 견제에 사람들은 오랜 기간 가난에 시달렸었다. 몰락, 상실, 고통이 발전시킨 비애감은 사람들을 새로운 패배와 다른 형태의 가난으로 몰아넣었기에 스티브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일어서라고, 나아가야한다고. 그의 진정성 깊은 연설에 사람들의 안색이 밝아지고 있었을 때, 공포에 젖은 새된 비명소리가 캡틴아메리카와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내리꽂혔다.


“끼야아아아악!”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새카만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기묘한 현상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숨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가장 가까운 방공호를 찾기 시작했다. 이내 사이렌이 왕왕거리며 울리자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집에서 귀하거나 값이 나가는 것을 챙길 틈도 없이 오직 자기 가족들의 손을 부여잡고 최대한 멀리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빛나는 황금빛 갑옷과 위협적으로 솟은 황금색 뿔 투구를 쓴 남자는 갑작스레 나타나 우아한 몸짓으로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튀어나왔고 아스팔트도로 위로 화염이 번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라도 하는 듯 손을 움직이며 불꽃을 뿜어냈다. 남자는 희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손이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나가떨어진 목숨이 수십이었고 지금껏 수천, 수만에 이르렀다. 남자는 공중에 뜬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 이름은 로키다. 너희들의 어둠이자 분노며 두려움이자 죽음이다.”


로키의 진한 녹색의 눈은 광기로 빛났으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커질 때마다 입 꼬리를 잔뜩 당겨 환히 웃었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접한 사람들은 마치 메두사의 눈을 마주한 것 마냥 공포에 몸을 굳히고 움직이지 못했다.


“로키!”


태연자약하게 공중에 떠 있던 로키의 몸이 흔들리며 땅 아래로 떨어졌다. 캡틴아메리카가 던진 방패가 로키의 투구 끝에 부딪혔다 다시 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스티브는 로키의 주의를 사람들이 아닌 자신에게로 돌리고자 했고 그의 작전대로 로키의 관심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스티브를 막아서는 것은 로키가 아닌 그의 곁에 있던 경호원들이었다.


“모두 대통령님을 보호해!”


모두 전직 군인으로 이루어졌으며 자신의 영웅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던 용감한 애국자들이 몸을 날려 스티브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들은 스티브를 로키에게서 보호하고자 했다. 


“이런, 캡틴아메리카. 이제는 방패가 아니라 사람들 뒤에 숨는 건가?”


로키는 스티브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비웃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힘을 제대로 쓴다면 경호원들을 제치고 로키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으나 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알았기에 차마 그들을 물릴 칠 수 없었다. 십년 전이었다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직접 방패를 들고 악당과 싸웠을 캡틴아메리카였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방패를 제대로 써먹어보지도 못한 채 캡틴아메리카는 자신의 보좌관들에게 떠밀려 물러나야만 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전히 강인했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지위는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제 캡틴아메리카는 미국 그 자체였다.


“캡틴아메리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캡틴아메리카를 보며 로키는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씨근덕거리며 영웅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로키가 자신의 창을 들어 사방으로 휘두르자 순식간에 건물들이 땅 아래로 무너졌고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이 위로 솟구쳤다 다시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먼 곳에서 가까운 곳까지 메아리쳤다. 좀 전까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던 거리의 풍경은 순식간에 지옥도로 변해버렸다. 


잔뜩 파괴를 즐기고 난 로키가 이내 자취를 감추었지만 공포심은 여전히 남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공포, 그것이 로키의 의도라는 것을 알았지만 두려움을 거두고 투쟁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사람들은 너무도 오랜 시간 죽음을 겪었다. 그나마 그들이 버틸 수 있던 건 그들의 영웅인 캡틴아메리카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그리고 그들의 영웅이자 희망인 캡틴아메리카에게 감사했다. 스티브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쳐다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나는 영웅이 아니야. 라고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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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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