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도에 발간한 스팁로키 회지입니다.
'만약, 캡틴아메리카가 70년대에 깨어났다면?' 이란 주제로 쓴 IF물.
The deep BLUE sea 中
(Steve Rogers X Loki)
4
전쟁은 계속 되었다. 로키는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했고 갑자기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나는 이 기묘한 동거인에 대해 익숙해져갔지만 전쟁은 그렇지 못했다.
이미 한 번의 전쟁을 치러봤으니 이제 전쟁에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으나 베트남전은 전혀 다른 종류의 전쟁이었다. 무기도 달랐지만 무엇보다 상대가 달랐다. 베트남에서 만난 적들은 레드스컬의 군대보다 더 무시무시했다. 그들에게 최신식 무기는 없었지만 길에서 만나는 모두가 적이 될 수 있었기에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젊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나 노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폭탄을 짊어지고 달려들었다. 순박하게만 보였던 사람들이 돌아서면 등에 칼을 꽂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무엇보다 용서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행동이었다. 무고한 민간인들을 방패로 삼아 위협했다. 그들의 비열한 방식은 우리 모두를 질리게 했고 끝내 나에게도 큰 상처를 입혔다. 그들이 성공한 것이었다.
* * *
막사로 돌아온 나는 손에 물든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잘 아는 소녀의 피였다. 소녀는 연합군에게 호의적이었던 이장의 손녀였다. 이제 막 열일곱이 되었는데 부대원들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녀가 가르쳐준 베트남어는 제법 쓸모가 있었기에 나는 간간히 소녀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었다. 부대원들은 소녀를 나의 현지처 정도로 생각한 듯 놀리곤 했다. 짓궂은 놀림에 얼굴을 붉히던 소녀가 나에게는 여동생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그랬기에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처음 보는 죽음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반군에게 잡혀 억지로 다이너마이트 조끼가 입혀졌을 때의 모습은 결코 쉽게 잊혀질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과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정당하다.(All´s fair in love and war) 좋은 말이야. 안 그래?
“내가 알던 전쟁은 이런 게 아니었어!”
나는 로키에게 소리치며 분노를 터트렸다. 그는 마치 죽음의 신처럼 전쟁터를 쏘다니며 사람들의 죽음을 기꺼워했다. 몇 번이나 그에게 그러지 말아달라며 부탁했으나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조차 태연한 그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오, 불쌍한 캡틴아메리카.
로키의 가느다랗고 섬세한 손이 내 눈물을 닦아주고 나서야 내가 언제부터인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쌍하고 미욱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얼굴이 나에게로 불쑥 다가왔다. 심해를 닮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키는 나를 위로하려는 듯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 곳곳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해주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내 눈물을 핥았지만 나는 거절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눈물만 흘렸다.
* * *
여전히 전쟁은 계속 되고 있었지만 나의 전투는 끝이 났다.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통지서를 받아든 뒤 겁쟁이처럼 안도감을 느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악몽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6
반년 만에 다시 찾아 온 조국은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보다 더 낯설게만 느껴졌다. 길어진 전쟁에 여론은 반년전과 판이하게 달라져있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독립기념일이었지만 기념일을 축하하는 이들보다는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거리행진이 더 눈에 띄었다. 그들 중 하나가 다가와 나에게 전단지를 주려고 다가왔다. 다리 한쪽은 없었고 양팔의 피부 모두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나에게 전단지를 내밀며 말했다.
“이게 다 망할 놈의 고엽제 때문이죠.”
나는 도망치듯 그 거리를 벗어났다. 고엽제의 사용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미로 같은 숲의 지형을 파악하기도 전에 게릴라들은 공격을 했고 나무들은 적의 몸을 숨겨주는 방패였다. 나와 부대원들은 나침반을 잃어버린 여행객들처럼 숲 속 이곳저곳을 헤매다 간신히 본부로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빌어먹을 놈의 나무들. 모두가 나무만 없어지기를 바래왔다. 그랬기에 정부에서 비행기로 고엽제를 뿌린다고 했을 때 우리는 모두 기뻐했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동료들이 피부를 벅벅 긁으며 기침이 잦아져도, 지나가던 여자들의 품에 안긴 아기의 기형적인 팔다리에도 자신은 몰랐다. 그것이 사람들을 좀먹는 독약인줄 정말로 몰랐다.
정말 몰랐어? 스티브?
언제나 그랬듯이 로키는 슬며시 나타나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로키가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상냥함에 울분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변명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정말로 몰랐어. 그들을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어.”
그래, 당신은 몰랐겠지. 그들이 원했던 것을 주었겠지.
로키는 교활한 앵무새처럼 말을 되풀이하며 나를 놀리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왔다고 말해도 믿지 않았어!”
로키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보는 얼굴로 혀를 찼다.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지 않아. 그것은 그들의 본성이 아니야.
“사람들은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전쟁은 끔찍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하지만 계속 반복되지. 예전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듯 말이야.
로키는 예전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듯 나의 입술에 키스했다.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이 끔찍하게 느껴졌지만 반대로 그것이 얼마나 유혹적이고 감미로운지 차마 떨쳐낼 수 없었다. 그의 손길을 뿌리치기는커녕 그의 얼굴을 잡고 키스에 응했다.
전쟁이 있는 한 사람들은 너를 원할 테지.
끔찍한 말이었다. 그리고 너무 듣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내가 너무 끔찍했다.
당신이 깨어나서 전쟁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아직도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로키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입을 막고 목을 조르고 싶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기쁘지 않았어?
나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화가 났다. 머리를 부여잡고 최대한 힘을 쥐어짜내어 간신히 말했다.
“제발. 사라져”
고지식하긴.
로키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자취조차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졌다. 방안에 나만이 홀로 남았다.
7
군사재판에 회부한다는 명령서를 받아든 뒤 나는 S.H.I.E.L.D 에 가기로 했다. 페기와 하워드가 만든 조직이었으며 이번 베트남 전쟁의 주축이 된 곳이었다.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았다. 그들이라면 내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대체 이 기사들은 뭐야? 어떻게 된 일이야?
나는 가판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사온 신문다발을 그들에게 내던지듯 펼쳤다. 제대한 군인들의 열악한 처우나 민간인에게 자행 된 가혹행위, 고엽제로 인한 피해사례들, 비인간적인 행위, 윤리에서 어긋난 참상.
사진은 대부분 참혹했다. 한눈에 보아도 피해자들이 군인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베트남군대에서 자행된 범죄행위인줄 알았으나 나 또한 참전한 군인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베트남전쟁을 발발시켰던 통킨만 사건이 사실은 미국의 조작이었다는 증거가 밝혀지고 있었다.
“나에게 설명을 해줘야지! 나를 그곳에 몰아넣었으면서!”
나의 질문에 그들은 답하지 못했다.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가혹한 비난에 어쩔 줄 모르는 듯 보였다. 페기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감추듯 쓸어내리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모두 사실입니다. 절 경멸해도 좋아요.”
확인사살과도 같은 말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맸다. 지금까지 정의라고 확신했던 일들이 모두 살인행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당장 이 모든 것들을 멈춰야 했다.
불쌍한 친구들의 얼굴을 보라지. 너에게 부끄러워하는 모습 말이야. 하지만 너도 그리 좋은 사람만은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할 텐데.
로키는 혀를 차며 비아냥댔다. 로키의 말대로 나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대공황의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살아왔으며 전쟁에서 크고 작은 전투들을 수없이 치러왔다. 생사를 넘는 일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성경의 십계명 중 반 이상은 어겼을 것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내 안의 기준이 되던 신념이나 정의가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자네가 모르는 게 있어!”
하워드가 다급하게 나를 뒤돌아 세웠다.
“우리는 자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믿었어. 헌데 발굴 작업에는 돈이 아니라 군대의 힘이 필요했어. 베트남 전쟁 덕분에 페기는 장군이 되었고 덕분에 자네를 찾을 수 있었어. 우리는 타협을 해야만 했다네.”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해라는 말이군. 그렇다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어? 타협이 타락이 되었는데!”
나는 씹어내듯 말했다. 그들을 믿었었고 그들은 나의 선택을 믿어 줬어야했다. 이럴 거였으면 깊은 바다에서 끌어내질 말았어야 했다. 나는 처음으로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에 후회했다.
“세상에는 절대 변하지도 변해서도 안 되는 일이 있어!”
지금까지 나를 슬프게 쳐다보던 페기는 입술을 한번 꾹 깨물고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 세상은 변했어요. 저도 더 이상 당신이 알던 페기카터가 아니고 당신만이 변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에 머리부터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갔고 자신은 도태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정답일지도 몰랐다. 나를 쳐다보는 페기의 눈길이 느껴졌다. 그녀는 나를 낯선 것을 대하듯 나를 보고 있었다.
“많은 일이 일어났다네. 스티브. 많은 일이.”
스타크 또한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젊은 과학자가 아니었다. 호기심으로 빛나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이 시커멓게 죽어있었다. 희끗희끗해진 머리나 세월의 풍파가 그의 육신만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 마모시킨 것을 알아차렸다. 두 번의 전쟁은 사람을 어떻게 황폐화 시켰는가. 나는 아주 조금 뒤늦은 것뿐인데 사람들은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자신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변했고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것을 이제는 모두 틀리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재빠르게 달아났다.
* * *
“스티브! 재판 말일세.”
나는 하워드의 방문을 거절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문 앞에 서서 말을 이어갔다.
“그들은 캡틴아메리카의 입으로 직접 베트남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답을 듣고 싶은 거야. 자네는 이 전쟁이 옳았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거네.”
하워드의 목소리는 절박해보였다. 이번 전쟁의 책임자는 그 둘이라는 것을 나 또한 알았다.
“하워드. 옳은 전쟁이란 건 어디에도 없다네.”
“우리를 위해서 모르는 척 해줄 수는 없는 거야?”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폭죽이 요란하게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은 어둠을 찢어냈다. 성조기가 눈에 들어왔다. 미국의 가치는, 자신이 배워오던 신념은. 자신이 지키려던 것은 무엇이었나. 자신의 고국. 영원한 정의의 수호자. 기회의 땅. 그 모든 것들이 미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어떻게 된 거지? 외로움이 한 가득 입안에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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