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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5.14 [콜슨&로키] mood in Indigo

2013년도 무렵 레인보우시리즈(...)로 낸 단편  회지

Mood in Indigo

Phil Coulson & Loki


 

 

 

 

 

 





 

 (커플성X 콜슨과 로키가 칭긔되는 연성, 에오쉴 봐주세요!)



정신을 차렸을 때엔 끝이 보이지 않은 드넓은 밀밭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아침 해가 밀밭 위로 천천히 떠오르자 온 세상이 황금물결로 일렁였다그 황홀한 광경은 유년시절의 어느 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괜히 감상적인 기분이 들어 눈을 감고 손을 뻗어 흔들자 잘 익은 밀알들이 손바닥을 스치며 간질였다한창을 그렇게 놀았을까나는 뒤늦게야 근본적인 물음을 떠올렸다여기는 어디지?


54년도 한정판 캡틴아메리카 피규어를 걸고 말하는데 뉴욕은 절대 아니었다나는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보았다분명히 로키의 무기에 가슴 한복판이 뚫렸었고 조퇴를 요구하는 나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던 퓨리국장님의 얼굴이 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그러나 이곳은 수술실이나 회복실도 아니었고 쉴드는 더더욱 아니었다뚫렸던 곳을 만져보았지만 아픔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상처는커녕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지금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꿈이거나 아니면 천국일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천국이라고지금까지 내가 해오던 일을 생각해보면 천국보다는 지옥이 어울릴 거였다일단은 유황불이나 뿔 달린 악마는 보이지 않으니 일단 최대한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결정했다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언덕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밀밭과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천국이라기엔 평범했다바닥이 구름으로 되어 있다든가 아기천사들이 날아다니는 곳을 상상해오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진짜 죽었구나우리는 죽음에 가까운 일들을 도맡아서 했기에 쉴드에 몸담으며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이미 십년도 더 전에 정리를 했다그 사이에 고치고 썼던 유서만 대략 몇 백 장일 것이다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은 당연히 있었지만 죽어가는 부하직원에게 퇴근을 허락하지 않는다던 상사의 한결같음이 그리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는 익숙해졌다.


사실 내 죽음이 영웅들을 하나로 모아 줄 계기가 된다면야나쁘지 않은 거래였다거기다 내 장례식에 참여해줄 어벤져스들을 생각하면 미국 대통령 부럽지 않은 장례식이 될 것이었다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족들은 내가 왜 죽었는지 평생 알 수 없다는 것그것 하나였다.


요원이 된 이후로 가족을 만난 적이 없었다나에게 있어 쉴드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몇 십년간 만나지 않았던 가족들보다 더욱 가족 같았다쉴드 요원들 외의 인간관계는 비정기적으로 만나던 연인들이 전부였다심지어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첼리스트의 얼굴을 떠오르기가 힘들었다이러니 그녀가 포틀랜드로 떠난 거겠지그래도 상황이 안 좋을 때 헤어져서 다행이었다나는 나쁜 남자친구였지만 이건 내 탓이 아니었다그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자신이 신이라고 칭하던 외계생명체의 침공아이언맨에 헐크에자신의 영웅인 캡틴아메리카의 부활까지아 맞아싸인을 받았어야 했는데캐비넷 안에 고이 모셔놓은 카드세트가 떠올랐지만 잊기로 했다.


그럼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자신의 어릴 적 영웅인 캡틴아메리카도 만나보았고 이루고 싶었던 건 모두 이뤘던 것 같다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갑자기 지평선 너머에서 큰 함성이 들려왔다소리가 너무 커서 앉아있던 땅을 울릴 정도였다들판의 동쪽과 서쪽에서 몰려오는 흙먼지가 마치 뉴멕시코에서 겪었던 기이한 자연현상을 떠올리게 했다뉴멕시코라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그 먼지구름이 점점 다가올수록 그 주체를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을 보자마자 어쩌면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꿈을 꾸고 있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뉴욕침공이니 지구를 침략하려는 뿔 투구를 쓴 우스운 악당도 다 꿈일지도 몰랐다자신은 간만의 휴가를 받아서 케이블에서 해주는 헐리우드 영화를 보다 잠든 것이 분명했다왜냐하면 바이킹 복장의 무기를 든 남자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우와아아아!”


고막을 찢으려고 작정한 듯 우렁찬 함성소리그들은 크게 웃으면서 상대방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한 대만 맞아도 죽을 것 같은데 맞으면 맞을수록 바이킹들은 더 크게 웃으며 다시 상대방을 향해 무기를 휘두른다저 웃는 모습이 어디서 본 것 같이 익숙한데나는 그 기억의 출처를 더듬기도 전에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곤봉을 피해야만 했다고개를 숙여 곤봉을 피한 뒤 남자의 복부에 주먹을 내지르자 사내는 제법이라는 얼굴로 더 거칠게 달려들었다자기보다 한뼘은 더 큰 남자에게 벗어나 무기로 삼을 만한 것을 찾았다그때 발밑으로 머리통이 하나가 굴러왔다거기까지는 많이 본 장면이었지만 정말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신참인가?”


젠장시체가 말하다니놀란 마음을 진정할 새도 없이 눈앞에 날아온 몽둥이를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 싸워대던 두 무리는 어느 새 뒤엉켜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빈 술통과 뼈들이 들판 위에 수북하게 쌓여갔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새알로 욱신거리는 눈가를 부비며 내게 몽둥이를 날린 사내를 붙들고 물었지만 정작 그는 내 옷차림이 신기한 듯 넥타이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결국 참지 못하고 사내의 손목을 잡고 엎어 메치자 그제야 내말에 대답해줄 마음이 든 것 같아 보였다.


어디긴발할라라네영웅들의 천국에 온 걸 환영함세!”


그렇게 말한 사내는 내 등을 세게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발할라들어본 적 있다뉴멕시코 사건 이후 북유럽신화를 공부했었다전쟁에서 죽은 영웅들만이 갈 수 있다는 천국의 이름이었다내가 천국에 온 것은 맞았군발할라는 아스가르드에 속한 곳이니여기는 아스가르드인가그러고 보니 주위의 사람들 모두가 토르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호쾌한 종족이군아스가르드는 모두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것인가그리고 머릿속에서 자신을 아스가르드에서 왔다고 말했지만 이들과는 정반대로 보이던 인물이 떠올랐다.


로키.”


자기도 모르게 로키의 이름이 튀어나왔다옆에 있던 사내가 갑작스레 마시고 있던 뿔잔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이번에는 침을 뱉었다마치 불결한 것을 들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로키를 아시나요?”


로키를 왜 모르나아스가르드의 둘째 왕자그리고 더러운 배반자불쌍한 패배자 아닌가.”


사내는 거기까지 말한 뒤 술로 입을 헹구었다로키에 대한 아스가르드인들의 평가가 어떤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럼 로키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아십니까?”


사내는 갈퀴 같은 손으로 턱에 난 수염을 벅벅 긁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글쎄정복에 실패하고 토르님에게 끌려온 뒤 어딘가에 유폐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난 관심 없소에잇술이 없잖아!”


사내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술통을 던지며 바닥에 벌러덩 눕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다더 이상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무리인 것처럼 보였다.


자꾸 뿔잔을 건네주는 무리에서 간신히 벗어나와 한적한 숲으로 걸어갔다아무리 죽음과 가까운 직업을 가졌다고 해도 잘린 머리통이 말을 하고 뼈가 다시 붙는 일들을 눈앞에 겪는 것은 지극히 보통사람인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말이지 아스가르드는 문명보다는 야만에 가까운 세계였다비록 그들의 기술력이나 신체 능력이 지구보다 월등하여도 기본적으로는 힘의 논리에 더 가치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사내가 말한 이야기를 다시 찬찬히 곱씹었다로키가 실패한 정복전쟁이 이번 뉴욕사태를 말한 것인가아니면 또 다른 전쟁이 있었던 것인가그것이 가장 궁금했다물론 죽기 전까지도 로키가 어벤져스들을 이기고 지구를 정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좀 더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 * *


 

콜의 아들.”


익숙한 호칭이었다토르도 저를 그렇게 불렀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부를 사람은 이 세상에 둘이었다토르와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나 또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키.”


검은머리를 한 빼빼마른 남자가 나무 위에 앉아 나른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 모습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고양이처럼 느껴져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저런 재주라면 어디 가서 굶어죽지는 않겠지만 놀라운 재주에 비해 피죽도 못 얻어먹은 모양새였다.


안녕콜의 아들.”


안녕하세요로키.”


로키는 정말 고양이처럼 사뿐한 걸음으로 나무에서 내려왔다사람을 내려다보는 특유의 시선처리는 여전해 보였다나는 미소 지으며 그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그리고그냥 콜슨입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로키는 크게 코웃음을 쳤다.


나도 알아다만 당신을 보니 토르가 미드가르드에 내려갔을 때의 꼬락서니가 떠올라서 말이지참 바보 같았지안 그래?”


그런가요다른 세계의 문명에 익숙하지 않다고 바보라고 할 수는 없죠지금 저도 딱 토르와 같은 상태인걸요.”


내말에 로키는 다시 눈썹을 찡그리며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그가 생각하기에 하찮은 인간이 자신의 말을 반박하는 것이 언짢은 것 같았다나는 로키가 내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입술을 축이며 말을 돌리려고 하는 것을 가로 막았다이런 말장난은 중요치 않았다.


로키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을 보니결국 뉴욕을 정복하겠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군요?”


정곡을 찔린 듯 매끄럽게 재잘거리던 입이 몇 번 들썩이다 결국 다물렸다계획을 실패한 악당의 얼굴이라기에는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꼴이 마치 할로윈 사탕을 뺏긴 아이처럼 하찮게만 느껴졌다.


그래너는 나에게 결코 이기지 못할 거라고 말했지어때네 말대로 돼서 기분이 어떤가인간?”


기분이요?”


그래네 말대로 이기지 못한 내가 우습겠지?”


글쎄요다행이다정도?”


로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그리고는 이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주문이라도 외우나 싶어 귀를 기울였지만 투덜거리는 소리가 대분이었다안 그래도 굉장히 말이 많은 외계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스가르드에서 본 로키는 더욱 심한 수다쟁이가 된 것 같았다.


그게 감상의 전부야나에게 복수를 원하지 않아?”


로키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자신도 그의 가슴을 총으로 뚫어버렸어야 했나하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었다게다가 그럴만한 무기도 없지 않은가아니면 무기를 가져다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분노가 일지 않았다어쩌면 자신을 쳐다보는 눈동자 때문일지도 몰랐다아니면 처음 보다 더 바싹 마른 얼굴이나 휘황찬란한 뿔 투구가 아닌 옷차림 때문에 동정심이라도 든 건지도.


그런데 밥은 먹었어요?”


뭐라고?”


로키가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듯 다시 한 번 물어봤다뭐라고?


저기 보니까 고기를 엄청 굽던데안 먹었으면 같이 먹어요.”


너는 내가 싫은 거 아니었나?”


글쎄요싫고 좋고를 떠나서 저는 지금 죽었잖아요?”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며 로키의 손을 잡아끌었다로키는 차갑게 손을 뿌리치더니 대꾸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내게서 거짓이나 다른 꿍꿍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하는 눈치였다경계하는 눈치가 정말 고양이 같았다당신이 남을 잘 속인다고 해서 저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죠라고 쏘아붙여주려던 것을 꾹 참고 로키의 손을 다시 잡으려고 뻗었다그러나 로키는 순식간에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 * *


 

자네가 여기 있는 줄 몰랐네!”


토르가 나를 보더니 숨이 막히도록 꽉 끌어안아주었다이러다간 한 번 더 죽는게 아닐까 걱정 될 정도로 열렬한 환영이었다.


하하토르숨이 막혀요.”


미안하네미드가르드식 인사는 이거였지.”


이번에 토르는 내 손을 잡고 위 아래로 크게 흔들었다몸이 위아래로 휘청거렸지만 나는 토르를 보며 반가움을 느꼈다아스가르드에 온 지 벌써 몇 주가 지났고 이곳 사람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란 걸 알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낯익은 얼굴을 보니 어딘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진작 알았다면 자네를 찾아왔을 것을그래발할라는 편한가?”


점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빌지스나입은 보았나시간이 되면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사냥을 나가보세마음껏 싸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너무 토르다운 말이라서 나는 웃음이 났다.


너무 싸워서 문제더군요.”


싸움은 아스가르드의 미덕이지자네 같은 전사라면 알잖은가.”


제가 전사인가요?”


내가 반문하자 토르는 나를 향해 다정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이미 훌륭한 전사일세.”


훌륭한 전사토르는 어리둥절해 하는 내 등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며 화통하게 웃었다진짜 전사의 몸을 가진 토르에게 훌륭한 전사라는 칭찬을 들으니 좀 쑥스러웠다훌륭한 전사는 어벤져스들이었다나는 조력자혹은 악당에게 죽은 엑스트라1쯤 이었다.


토르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가 말하길 로키가 바이프로스트를 파괴한 뒤 아홉 세계에 혼란이 와 바나헤임의 반란을 정리하러 출발해야한다고 했다토르는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헤임달을 불렀다나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토르를 향해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혹시 로키는 어떻게 됐나요?”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짓던 토르는 이내 웃어 보이며 안심시키듯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로키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지하 감옥에 갇혀있다네.”


로키가 순순히 갇혀있나요탈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테서렉트를 이용해서 지구로 왔듯 감옥에서 자꾸 빠져나오는 것이 아닐까로키라면 무언가 계략을 짜고 있을 것만 같았다그러나 토르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법능력까지 빼앗겨 도리가 없을 걸세로키의 마법은 어머니의 유산이기 때문에 거둬들일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자격이 되기 전에 마법을 쓴다면…….”


토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헤임달이 내린 빛기둥은 토르를 데리고 사라졌다토르의 답변에 나는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감옥에 갇힌 데다 마법을 쓸 수 없다면 자신의 앞에 자꾸만 나타나는 로키는 어떻게 된 거지토르에게 말해야하나그렇지만 왠지 고자질을 하는 것 같아 입을 다물기로 했다로키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보이지는 않았고 게다가 이미 자신은 죽지 않았는가상관없을 거라고 애써 생각했다.



* * *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언제보아도 발할라의 밤은 아름다웠다뉴욕의 밤과는 달리 눈부신 조명이 아닌 별무리들과 달이 은은하게 빛을 내며 포근한 적막이 주위에 내려앉았다우주와 가까이 있어서 그런가별과 달리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다하늘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자 옆에서 작게 코웃음이 들렸다역시나 로키였다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웃음소리였다.


비켜여기는 내 자리야.”


로키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슬며시 나타나서 자기를 알아달라는 듯 시위했다가 도망갔다나는 익숙하게 맞받아쳤다.


자리 넓잖아요조금만 양보해주시죠.”


로키가 비쭉이던 입매를 조금 더 누그러뜨렸다그때를 놓치지 않고 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조금 비좁았지만 쌀쌀한 날씨에 차가워진 몸이 타인의 체온으로 덥혀지는 것이 기분 좋았다.


생각보다 굉장히 넉살이 좋군.”


원래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는데전 한번 죽었으니까요.”


시끄러워.”


요새 들어 알게 된 사실인데 로키는 내가 죽음’ 이란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괴로운 얼굴을 했다아주 짧게 스쳐지나가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로키가 어떨 때 기뻐하고 어떨 때 슬퍼하는지무엇이 진심이고 거짓말인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그것은 제법 기분 좋은 일이었다심지어 토르가 로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라고 했을 때는 어처구니없게도 뿌듯함마저 느꼈다장난과 속임수의 신이라더니신도 별거 없네나는 침울해하고 있는 로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매번 하는 질문을 하기로 했다.


토르가 말하길 당신은 감옥에 갇혀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죠?”


그러자 로키는 금세 결코 마술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겠다고 하는 마술사처럼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바보 같긴내가 아무리 감옥에 있어도 이 정도도 못할 것 같아?”


얄밉게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로키는 또 다시 사라져버렸다영 솔직하지 못한 신이었다.

 


* * *


 

아스가르드로 올라온 영혼들은 다시 지구에 못 가는 거 알아?”


갑자기 나타난 로키는 이번에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내게 악담을 퍼부었다그것이 로키 나름의 안부인사라는 걸 이미 알아차린 지 오래였다잘 지내고 있냐는 말 한마디를 하는 게 힘들어서 항상 배배꼬아서 말하는 게 로키다웠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니까 괜찮아요물론 도넛이 그립긴 하지만요.”


로키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화를 냈다.


고작 그거야이 낯선 곳에 너 혼자 떨어졌는데 겨우 그거야?”


왜 로키가 화를 내는 것인지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아스가르드인들은 무신경하기도 했고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내게 친절했다와이파이가 터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원체 아날로그적인 사람이었으니 심심하지도 않았다게다가 이곳에는,


토르도 있고 그리고 로키 당신도 있으니까요.”


아무리 잘 적응하더라도보고 싶은 누군가가 없더라도 새로운 세계의 적응은 꽤나 힘든 일이다그것은 인정해야했다그랬기에 악연이었을지 몰라도 로키는 어느새 내 친구처럼 느껴졌다내 착각일지 몰라도 우리는 실제로 친구적어도 그 비슷한 관계였다로키는 내말에 모욕이라도 당한 듯 화를 내었지만 로키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그게 거짓말인 걸 눈치 챌 수 있을 것이었다.

 


* * *

 

이게 도넛인가?”


로키가 불쑥 들이민 것은 익숙한 그것이었다한손에 들어오는 동그란 빵기름에 튀긴 냄새그 위에 뿌려진 설탕까지그것도 누군가가 직접 손으로 만든 것 같은 수제도넛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봤지만 로키는 대꾸도 하지 않고 내 앞으로 도넛을 들이밀었다하긴어디서 난 게 중요하지는 않았지결국 도넛을 받아들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나 줄까요?”


도넛 중 하나를 집어 내 입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로키에게 건넸다처음에 주저했지만 입에 억지로 넣어주자 뱉어내지도 못하고 우물거렸다처음에는 인상을 쓰던 로키가 그래도 끝까지 다 씹어서 넘긴 뒤 간신히 한마디를 했다.


미드가르드인은 이런 걸 어떻게 먹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진심어린 말투에 크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제대로 안 익어서 그런 거예요.”


내가 요리사장에게 분명 제대로 만들라고 명했건만!”


며칠 전 도넛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물어보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나 보다로키의 방대한 지식에도 도넛을 만드는 방법 따위는 없었던 것 같았다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하는 것을 싫어하는 로키가 자신을 위해서 한 행위는 생각보다 더 감동적이었다작은 푸념이었는데 놓치지 않고 챙겨준 것이다로키는 내 웃음소리에 맞춰 점점 얼굴을 붉히더니 끝내는 벌떡 일어나 요리사를 찾아가 목을 날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이건 나를 우습게 보는 행위야!”


에이설마요처음 만들어보는 음식이니까 그렇죠.”


내가 마법만 쓸 수 있었다면이 정도야 금방 만드는데…….”


흥분을 했다가도 금세 시무룩해지는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로키를 달래주었다.


충분히 맛있었어요.”


진심이야?”


다행히도 로키는 자신의 머리에 얹혀있는 손에 짜증을 내기는커녕 도넛이 맛있었는지를 묻는 것에 집중했다.


거짓말이에요제가 만드는 게 낫겠네요.”


또 다시 시무룩한 표정이라니처음의 비웃음분노짜증 이외의 다채로워진 표정변화에 절로 웃음이 났다결국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어버리자 이번에는 로키의 얼굴이 사나워지더니 자신의 머리에서 내 손을 신경질적으로 내쳤다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로키의 손을 잡아 억지로 새끼손가락을 엮어 걸었다.


다음번엔 제가 진짜 맛있는 도넛을 만들어 줄게요약속해요.”


 

* * *

 

이제 제법 도넛다운 도넛을 만들어준 요리사장 덕분에 나와 로키는 사흘에 한번 꼴로 도넛을 먹는 시간을 가졌다죽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살찔 걱정은 접어뒀다는 거다원체 마른 체형인 듯한 로키는 더욱 그런 걱정 따위 없겠지도넛이 꽤나 제 취향이었는지 나와 로키는 매번 마지막 도넛을 먹기 위해 신경전을 펼쳤는데 오늘은 로키의 승리였다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을 짓는 로키였지만 칠칠맞게도 입가에 설탕가루가 잔뜩 묻은 꼴이 귀엽기까지 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로키의 입가에 묻은 설탕을 털어주기 위해 손을 뻗자 순간로키에게 뻗었던 오른팔 전체가 흐릿하게 사라졌다또 이러네무덤덤해진 나에 반해 로키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내 손을 홱 낚아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언제부터 이랬어?”


잘린 머리도 말을 하는 마당에 이까짓 손이 흐렸다 사라지는 걸로 웬 호들갑이냐고 타박을 놓고 싶었지만 제법 진지한 모습에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이렇게 손이 투명해지게 된 지는 며칠이 되었다처음에는 손끝이더니 이제는 팔까지 투명해진 것이다이것도 아스가르드인이 되는 단계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무심하게 넘겼는데 아니었나보다로키는 내 말을 듣더니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토르를 찾아가토르를 찾아가면 아버지께서 도와주시겠지.”



* * *

 


토르는 처음 보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로키의 예상대로 토르는 아버지인 오딘에게 보여줘야겠다며 아스가르드 궁의 치료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토르의 아버지오딘은 정말 신처럼 위엄이 느껴졌다한쪽 눈이 없는데도 그 기백이 대단했다토르에게는 미안했지만 토르와는 달리 정말로 ’ 같았다오딘은 나를 못마땅하게 보다 토르의 소개에 인자하게 웃으며 환영을 해주었다오딘은 나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육체는 미드가르드에 영혼은 아스가르드에 있어 둘의 연결고리가 약해진 탓이구나둘 중 어느 한곳에도 진정으로 속해있지 않으니 빨리 해결하지 않는다면 둘 다 소멸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영혼과 육체 둘 중 하나를 완전히 소멸시켜야 하지.”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다급한 내 질문에 오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영혼과 육체를 합치는 마법을 할 수 있는 건 현재는 아무도 없네.”


오딘의 말에 토르는 자신만 믿으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의 육체는 내가 처리해주지아프지 않게 하겠네약속하지.”


남을 죽이겠다는 말을 저렇게 친절하게 하다니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곁에 있던 오딘 또한 좋은 생각이라며 헤임달에게 내일 바이프로스트를 열어 놓으라고 명령하겠다며 나를 격려했다.


잘 되지 않았나콜슨이제 자네는 완전한 아스가르드인일세!”

 


* * *


 

콜슨!”


밤이 되지도 않았던만 로키는 우리가 매일 보던 장소에 이미 나와 있었다나는 누군가가 로키를 볼까 걱정이 되었지만 로키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나에게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오딘과의 대화를 말해주자 로키는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내게 질문했다.


콜슨솔직히 말해이곳에 있고 싶어?”


그걸 잘 모르겠어요.”


사실이었다나는 내가 돌아가고 싶은지 머물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언제부턴가 조금 지쳤던 것 같다매일같이 일어나는 동료들의 죽음보통사람들이라면 감당하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다쉴드는 나의 가족이자 삶이었으나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않았던 것 아니다그러나 어쩌면더 이상 아무도 죽을 일 없는 이곳이야말로 천국이 아닐까아스가르드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이 대책 없는 전쟁광들에게 언제 적응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벌써 제법 마음에 맞는 친구도 생기지 않았는가느긋하게 생각해서 한 백년 쯤 지나면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로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로키는 그런 나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다 무언가를 중얼거리고는 사라져버렸다나는 인사도 없이 사라진 로키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내일의 마지막 도넛은 내가 먹어버릴테다.


 

* * *

 

에이전트 콜슨내 말이 들리나?”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토르도 로키도 아니었다어딘가 핼쑥해진 닉 퓨리와 마리아 힐의 얼굴이었다흰색 벽지와 일정한 기계음몸 이곳저곳이 쑤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들어 간신히 얼굴의 호흡기를 치우자 소독약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정말로 돌아왔구나그러면 지금까지의 일들이 꿈이었을까믿겨지지 않아 주먹을 쥐었다 폈다했지만 손이 흐릿해지는 일은 없었다나는 좀 전부터 계속 머리에서 맴도는 이름을 내뱉었다.


로키.”


마리아는 로키가 토르와 함께 아스가르드로 돌아간 일스타크 타워가 어벤져스타워가 된 일그리고 퓨리가 어떻게 어벤져스를 하나로 모았는지 까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그러나 무슨 말을 해도 대꾸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나를 보고 힐과 국장님은 의아해하며 병실을 나섰다.


푹 쉬게당분간 휴가야.”


마리아와 국장님이 나가자마자 자꾸 한숨이 새어나왔다분명 나를 다시 지구로 내려 보낸 것은 로키였다현명한 신인 오딘은 육체와 영혼을 합칠 줄 아는 자가 현재는’ 없다고 했다그것은 현재는’ 마법을 쓸 수 없는 로키를 가리킨 것 일테지그렇다면 로키는 어떻게 된 걸까로키가 마법을 쓴 뒤 어떻게 되었을까자꾸만 걱정이 됐다로키는 마법을 금지 당했을텐데마법을 어떻게 쓴 거지쓴 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자꾸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상상력이 발휘됐다바보 같긴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돌려보내주지 않아도 됐는데아마도 로키는 내 거짓말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내가 로키의 거짓말을 알아차릴 수 있듯 말이다.


* * *


 

나는 무의식적으로 힐이 두고 간 카드 세트를 꺼내들었다그녀의 말대로라면 카드가 핏자국으로 엉망이어야 했는데 카드는 물론 상자까지 어디 한 군데 망가진 곳 없이 깨끗했다이리저리 상자를 흔들자 못 보던 메모지가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메모지에는 섬세하고 우아했지만 날카로워 보이는 글씨체로 딱 한 문장만 쓰여 있었다.

 

선물이야.


PS. 약속 잊지 마.


나는 곧 만나게 될 이 귀여운 친구를 위해 도넛을 만들 재료를 잔뜩 사두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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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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