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팁로키] 모순 1

글/긴 2018. 2. 23. 15:58

2015.06 스팁로키 앤솔로지 <창과 방패>



모순











거리엔 어둠이 떠다녔고 새벽이 오는 것은 머나 먼 일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숨죽인 채 집안에 웅크리고 누워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고된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것은 꿈이었으니 누구든 이 시간을 마음껏 즐기리라. 그러나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캡틴아메리카의 하루는 끝을 모르고 계속 되풀이되고 있었다. 


간단한 운동을 마치고 오벌 오피스(Oval Office)에 들어온 캡틴아메리카는 짙은 밤나무 색 책상 중앙에 독수리문양이 멋지게 새겨진 대통령 집무실 책상(The Resolute Desk)이 아닌 창가에 걸터앉아 손바닥 크기의 수첩을 펼쳤다. 화려하고 웅장한 집무실은 그에게 어색하고 불편한터라 그는 연설문을 쓰거나 사색을 할 때면 이렇게 종종 창가에 앉곤 했다. 보좌관들은 그런 그를 위해 그리고 선전용으로 써먹기 위해 좀 더 소박한 분위기의 새로운 집무실을 하나 짓자고 건의했으나 스티브는 천성적으로 검소함과 간편함을 추구했고 국가에서 대대적으로 절약캠페인을 펼치는 때였기에 단칼에 거절을 했었다. 입으로만 공약을 내세우는 것은 그의 성격이 못되었다. 게다가 캡틴아메리카에게만큼은 백악관 웨스트 윙이란 여전히 국가를 상징하는 곳이었기에 그런 곳을 차지하고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스티브는 충분히 제 손에 길들여져 익숙한 만년필의 무게를 느끼며 손을 놀렸다. 어린 시절 겪었던 대공황과 이후에 일어난 2차 대공황까지 견딘 그가 사치를 부리는 것은 오직 필기구뿐이었다. 모든 것이 자동화 된 세상인데다 버튼 한번만 누르면 당장이라도 달려와 일정을 달달 외워 불러줄 비서들이 옆방에 대기 중이었지만 캡틴아메리카는 예전부터 지금 대통령이란 자리에 오른 뒤에도 일정을 확인하고 다시 수첩에 쓰는 일을 남에게 맡긴 적이 단 한번 도 없었다. 그는 아날로그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시대의 사람이었고 자신의 할 일은 제 손으로 직접 해야 안심을 하곤 했다. 스티브는 뒤에서 자신을‘아무도 믿지 않는 노인네’라며 손가락질 하는 것은 알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사람들의 입방아 때문에 수작업이 주는 안정감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며 무언가를 직접 쓰는 행위는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옛날의‘스티브 로저스’의 유일한 흔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티브는 자신이 이제는 늙었다는 것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임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아침 생방송, 유럽전쟁 참전자들과의 조찬, 재개장한 전쟁박물관의 축하연설, 캐나다 연합군과의 회담, 내년도 국방부 예산 편성 논의, 새로운 선전영상 촬영….


벌써 노트를 몇 장이나 가득 채웠지만 끝나지 않는 일정들을 들여다보며 스티브는 문득 피로감을 느꼈다. 하루에 3시간도 자지 못하는 생활이 벌써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이제는 그만둘 때라고도 스티브는 생각했지만 재작년에 통과된 대통령의 연임 관련 법안은 연임의 제한을 기존의 두 번에서 그 제한횟수를 없앴다. 현재 선거일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지만 선거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거의 없었다. 결과를 아는 선거만큼 지루한 것도 없었다. 현재 미국은 선거제를 선택했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였지만 언제나 결론은 나있었다. 


캡틴아메리카가 당신을 지켜드립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영웅인 캡틴아메리카의 보호아래에 들어가길 원했다. 애석하게도 스티브는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매일의 업무는 과중했고 복잡하게 얽혀있었으며 그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허투루 넘길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랬기에 혼자 애쓰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선택 하나하나에 달려있는 목숨들을 생각하면 남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생활이 10년이 넘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미 나가떨어졌을 테지만 그를 수퍼솔져로 만들어준 혈청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이 신비로운 약물은 그에게 보통의 인간과 다른 신체능력을 주었고 그 덕분에 견뎌낼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 아브라함 박사가 연약하고 어린병사인 스티브에게 혈청을 권유했을 때 이런 일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왜 저죠?(why me?)’


스티브는 실험 전날 밤, 박사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왜 나였을까. 수 천 번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질문이었다. 아브라함 박사는 스티브를 바라보며 그가 좋은 사람이기에, 힘의 가치를 알고 연민을 느낄 줄 알기 때문이라고 답해주었다.


젠장. 스티브는 욕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빗어 넘겼다. 요즘 들어 과거를 그리워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모든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건만 사실은 아무것도 잊지 못했다. 아마 이제 정말로 늙고 지쳐 물러날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혈청은 노화를 느리게 해주었고 그에게 여전히 젊고 건강한 육체를 주었지만 영생을 주지는 못했다. 정말 늙은이가 다 되었군. 자꾸 옛 생각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스티브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수첩은 접어두고 이제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전쟁박물관 개관식에서의 연설문을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언론매체와 일반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오는 자리였으며 그것을 떠나 이번 연설은 중요했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티브는 잠시 연설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진을 찍는 기자들과 말간 얼굴을 한 어린아이부터 참전 군인으로 보이는 노인들까지 스티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스티브는 손을 한번 쥐었다 폈다. 단상 위에 서있노라면 사람들의 고통과 그 고통을 끝내주리란 자신을 향한 기대감이 손에 베일 듯 전해져왔다.


“만약 온 나라 전체에서 당신만이 한 방향의 길을 택하면, 그리고 당신의 신념이 그것을 옳은 길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조국에게 임무를 다한 것이다. 머리를 꼿꼿이 들어라. 부끄러워할 게 없다.”


오랜 시간동안 스티브의 삶의 지침이 되어준 말이었다. 지난 50년간 줄곧 해온 일들 전부가 모두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또 다시 시작 된 전쟁들 이후에도, 수많은 이들의 죽음에도, 페기와의 불화와 헤어짐 그리고 그녀의 죽음 뒤에도. 캡틴아메리카는 제 신념을 위해서 머리를 꼿꼿이 들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제 신념만은 가슴속에 남아 스티브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책임져야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조국과 제 동포를 지키는 것, 그것들은 저의 사사로운 것들은 모조리 뒤에 놓을 만큼 중요했다. 

현재 눈앞의 사람들은 모두 지쳐있었다. 수십 년간 많은 전쟁을 치렀기에 소중한 이들을 잃었고 적대적인 타국의 견제에 사람들은 오랜 기간 가난에 시달렸었다. 몰락, 상실, 고통이 발전시킨 비애감은 사람들을 새로운 패배와 다른 형태의 가난으로 몰아넣었기에 스티브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일어서라고, 나아가야한다고. 그의 진정성 깊은 연설에 사람들의 안색이 밝아지고 있었을 때, 공포에 젖은 새된 비명소리가 캡틴아메리카와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내리꽂혔다.


“끼야아아아악!”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새카만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기묘한 현상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숨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가장 가까운 방공호를 찾기 시작했다. 이내 사이렌이 왕왕거리며 울리자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집에서 귀하거나 값이 나가는 것을 챙길 틈도 없이 오직 자기 가족들의 손을 부여잡고 최대한 멀리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빛나는 황금빛 갑옷과 위협적으로 솟은 황금색 뿔 투구를 쓴 남자는 갑작스레 나타나 우아한 몸짓으로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튀어나왔고 아스팔트도로 위로 화염이 번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라도 하는 듯 손을 움직이며 불꽃을 뿜어냈다. 남자는 희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손이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나가떨어진 목숨이 수십이었고 지금껏 수천, 수만에 이르렀다. 남자는 공중에 뜬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 이름은 로키다. 너희들의 어둠이자 분노며 두려움이자 죽음이다.”


로키의 진한 녹색의 눈은 광기로 빛났으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커질 때마다 입 꼬리를 잔뜩 당겨 환히 웃었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접한 사람들은 마치 메두사의 눈을 마주한 것 마냥 공포에 몸을 굳히고 움직이지 못했다.


“로키!”


태연자약하게 공중에 떠 있던 로키의 몸이 흔들리며 땅 아래로 떨어졌다. 캡틴아메리카가 던진 방패가 로키의 투구 끝에 부딪혔다 다시 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스티브는 로키의 주의를 사람들이 아닌 자신에게로 돌리고자 했고 그의 작전대로 로키의 관심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스티브를 막아서는 것은 로키가 아닌 그의 곁에 있던 경호원들이었다.


“모두 대통령님을 보호해!”


모두 전직 군인으로 이루어졌으며 자신의 영웅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던 용감한 애국자들이 몸을 날려 스티브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들은 스티브를 로키에게서 보호하고자 했다. 


“이런, 캡틴아메리카. 이제는 방패가 아니라 사람들 뒤에 숨는 건가?”


로키는 스티브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비웃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힘을 제대로 쓴다면 경호원들을 제치고 로키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으나 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알았기에 차마 그들을 물릴 칠 수 없었다. 십년 전이었다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직접 방패를 들고 악당과 싸웠을 캡틴아메리카였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방패를 제대로 써먹어보지도 못한 채 캡틴아메리카는 자신의 보좌관들에게 떠밀려 물러나야만 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전히 강인했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지위는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제 캡틴아메리카는 미국 그 자체였다.


“캡틴아메리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캡틴아메리카를 보며 로키는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씨근덕거리며 영웅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로키가 자신의 창을 들어 사방으로 휘두르자 순식간에 건물들이 땅 아래로 무너졌고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이 위로 솟구쳤다 다시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먼 곳에서 가까운 곳까지 메아리쳤다. 좀 전까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던 거리의 풍경은 순식간에 지옥도로 변해버렸다. 


잔뜩 파괴를 즐기고 난 로키가 이내 자취를 감추었지만 공포심은 여전히 남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공포, 그것이 로키의 의도라는 것을 알았지만 두려움을 거두고 투쟁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사람들은 너무도 오랜 시간 죽음을 겪었다. 그나마 그들이 버틸 수 있던 건 그들의 영웅인 캡틴아메리카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그리고 그들의 영웅이자 희망인 캡틴아메리카에게 감사했다. 스티브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쳐다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나는 영웅이 아니야. 라고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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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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