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 스팁로키 앤솔로지 <창과 방패>
* * *
웨스트 윙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잠깐이나마 활짝 열어뒀던 창문들은 다시 철문이 덧대어졌고 모두가 사태파악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근처 전력소가 파괴되기라도 한 건지 어느 곳보다 밝아야 할 백악관의 전등들은 깜빡이며 힘겹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움 사이에서 스티브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수석비서인 게리는 재빠르게 이번 사건에 대한 상황보고를 했다.
“…피해가 만만찮았지만 다행이 민간인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그 말은 즉, 그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린 경호원들은 살아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스티브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단호한 손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모두 다 이 방에서 나가주세요.”
“하지만 현재 상황의 위험함을 생각하면 혼자 계시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스티브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오래도록 군인으로 살아왔기에 말투가 딱딱하고 고지식한 사고방식을 가지긴 했어도 일적인 부분에서만 냉정했지 기본적으로는 따뜻하고 상냥한 남자였다. 아무리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화를 내기보다 체육관의 샌드백을 터트리는 것으로 해소 할 정도였다. 그러나 때로 스티브는 딴사람처럼 차갑게 굴었는데 대부분의 이유는 로키였다. 로키의 일방적인 살육이 끝나고 나면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혼자 있기를 원했고 이럴 때는 그의 뜻대로 홀로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 나름의 자기반성 시간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보좌관들은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났다. 그러나 태산과도 같던 어깨가 어둠 속에 잠기는 것을 볼 때마다 가끔씩, 그가 자살이라도 하는 것이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금세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할 헛된 망상으로 치부할 뿐이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캡틴아메리카였기에.
“이제 나와.”
허공을 쳐다보며 낮게 중얼거리는 스티브에게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흐트러진 윗옷을 아예 벗어버리고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바닥으로 던지고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휘휘 돌렸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가 취했다고 여겼겠지만 캡틴아메리카를 취하게 만드는 술은 없었다. 취할 수 없었지만 스티브는 오늘 같은 날이면 예전의 습관대로 술을 마셨다. 그 앞에는 자신의 잔과 오늘 자신을 막아섰던 경호원들의 숫자만큼의 술잔이 놓여있었다. 술은 누군가를 기리는데 좋은 도구였다. 잘은 몰랐지만 그들 가운데는 결혼을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었고 당연히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스티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당장 나와!”
스티브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위스키 병을 벽에 던졌다. 아니, 던졌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산산조각이 나야 할 병이 실로 매달아 놓은 것처럼 공중에서 멈추었다.
“이런, 조심해야지. 여기 가구들 대부분이 미국역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함부로 대하면 안 되지. 여기가 스미소니언박물관이나 다름없다는 걸 너도 잘 알면서. 오, 물론 너를 포함해서 말이야.”
“로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나타난 이는 몇 시간 전만해도 캡틴아메리카와 대치하던 그의 최대의 적, 로키였다. 항상 과장 된 뿔 투구와 단단한 갑옷을 입고 나타나던 로키였지만 지금은 제게 꼭 맞는 고급스러운 정장과 녹색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모델로 알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들만큼 로키에게 잘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로키는 허공에 떠있던 병을 잡아 스티브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는 그 곁에 앉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 스티브. 내가 보고 싶었어?”
로키와 마주 앉은 캡틴아메리카라니. 가장 의심이 많은 음모론자도 감히 꺼내지 못할 이야기였다. 세기의 악당과 세기의 영웅의 밀회였다. 스티브는 이를 악물고 로키를 향해 말했다.
“왜 그들을 죽인거지? 너라면 죽이지 않을 수 있었잖아!”
마치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로키는 허리를 굽히며 크게 웃었다. 몇 번이나 파안대소한 로키는 혀를 끌끌 차며 스티브의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있는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오. 스티브 로저스. 아직도 이렇게 순진하다니!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선 공포심을! 공포를 얻기 위해선 죽음을 봐야하는 것쯤은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아?”
스티브는 로키의 손길을 거칠게 쳐낸 뒤 눈을 감고 그를 등졌다. 스티브에게 있어 침묵은 곧 무언의 동의란 것을 로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현재 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것도 잘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비웃던 로키는 갑자기 불안한 기색으로 스티브의 눈치를 살피는 듯 눈썹을 늘어뜨리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스티브. 아주 작은 실수였어. 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잖아?”
냉정히 돌아선 스티브의 등을 로키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리다 마치 굳게 닫힌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듯 톡톡 두드렸다. 그러나 스티브가 돌아서기는커녕 벌떡 일어나 아예 뒤돌아 나가려는 순간, 스티브의 소매 끝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스티브. 나를 내치지마.”
흔들리던 녹색 눈동자의 색이 흐릿해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해보였지만 로키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 다시 환하게 웃어보였다. 여전히 쳐진 눈썹과 잘게 떨리는 입 꼬리가 억지웃음이란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스티브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지난 번 눈물을 흘리던 로키에게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그의 눈물이라고 말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는 탓이었다.
스티브는 강한 손길로 로키의 섬약해 보이는 턱을 그러잡았다. 아픔을 느꼈는지 로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한순간이었을 뿐, 이내 순종적인 태도로 스티브를 올려다보았다. 로키는 그의 처분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광기로 지독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어디로 사라지고 녹색눈동자에는 초식동물처럼 유순함을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좀 전까지 사람들의 피로 손을 물들인 채 웃어젖히던 악당은 어디로 가고 사랑받기 원하는 어린아이만 남았는가. 이 애정을 갈망하는 눈동자를 마주 할 때 마다, 스티브는 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자꾸 생겨서는 안 될 감정들이 피어났다.
스티브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다른 한손으로 로키의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내리자 컥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울렁이는 로키의 목울대가 스티브의 눈에 들어왔다. 1인치만 손을 내려 지금 당장 곧게 뻗은, 연약하고 흰 네 목을 부러트리면,
“다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자신을 향한 명백한 살의에도 부구하고 로키는 스티브를 저지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로키의 까만 머리통이 스티브의 손길에 따라 거칠게 흔들렸다. 로키는 희게 질린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결국 애원의 말을 꺼냈다.
“스티브, 제발…….”
하지만 로키의 애원이 자신을 상처 입히지 말아달라는 것이 아님을, 그 눈동자가 걱정하는 것은 온전히 스티브 자신이었음을 스티브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혼란스러웠다. 너는 악당이야. 그것도 아주 못되고 악마 같은. 지금은 내 앞에서 울면서 애정을 갈구하고 있지만 사실 너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그리고 나는.
“그만하고, 나를 안아줘. 스티브”
그리고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 * *
기이한 푸른색이 감도는 세계가 자신을 덮쳤다고 생각한 순간, 스티브는 자신이 처음 보는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무無의 공간이었다. 제 아무리 기이한일을 많이 겪어본 자신이라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모든 것이 암흑이었고 오로지 저만이 뚜렷이 보일 뿐이었다. 잠깐의 당황함을 뒤로 한 채 스티브는 이내 걱정하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은 떨어지고 있던 발키리호에 있었다. 간신히 레드스컬을 저지했지만 해결해야할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발키리호는 폭탄을 가득 실은 채 뉴욕으로 가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폭탄들이 터진다면 수만명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었다. 스티브는 당장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조건 앞을 향해 달렸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네 죄책감이 덜어진다면야.”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내는 중세시대에나 입을법한 옷차림을 하고서는 저를 향해서 웃고 있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의자에 앉은 것처럼 허공에 떠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떠있는 것이 놀라웠지만 이미 이상한 일은 충분히 겪은 참이었다. 스티브는 방패를 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남자는 스티브의 모습이 가당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코웃음을 쳤다. 남자가 레드스컬의 한편인가라고 생각했었건만 그의 관심 없어 보이는 태도에 자세를 풀고 질문했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시간과 공간의 틈. 세계와 세계를 연결해주는 통로. 그리고 존재해서도 안 되고 존재하지도 않는 장소.”
“그런 말도 안 되는! 여기에 당신과 내가 존재하는데?”
스티브의 말을 들은 남자는 어리석은 것을 보는 듯 혀를 차다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왔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걸 보니 필멸자로군. 여기까지 온 인간은 처음 이야. 아니, 나 외에는 처음 온 존재지.”
그제야 흥미롭다는 듯 스티브의 눈을 쳐다보던 남자는 당당하게 가슴을 피며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아스가르드의 로키다.”
여유롭게 자기소개나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놀랍고 분명 제 인생에 있어서 처음 있는 기이한 일이었지만 관심을 둘만큼의 여유가 스티브에게는 없었다. 분명 뉴욕으로 가던 비행선의 방향을 틀어 남극으로 가고 있었고 페기와 대화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눈앞이 푸른색으로 물들더니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지금 비행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뉴욕? 아니면 바다 속으로? 이건 꿈일까? 하지만 아직도 전투의 여파로 욱씬거리는 몸의 통증이 현실임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이제 알았다. 테서렉트 때문이었군. 공간을 열어주는 물건이지.”
스티브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로키는 제 의문이 풀린 것에 퍽 즐거워했다. 보지 않고도 테서렉트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로키를 보며 아마도 이 곳을 빠져나가는 것도 그가 알 것이라고 여긴 스티브가 로키를 붙들고 캐물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 폭탄을 실은 비행선이 뉴욕을 향해 가고 있어요. 제가 그걸 막아야합니다. 혹시 돌아가는 방법을 아십니까?”
어느새 스티브에게서 빠져나온 로키는 스티브의 손이 닿았던 손목을 거칠게 닦아내며 화를 내었다.
“돌아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텐데? 너는 외롭게 죽을 거야!”
로키는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티브의 운명을 단언했다. 분명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신은 외롭게 죽지 않을 것이었다. 스티브는 제 품안에서 나침반을 꺼내들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사랑이 될 그녀의 사진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스티브는 로키를 향해 단언했다.
“제가 선택한 것이니. 그것이 제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것입니다.”
담담한 스티브의 말에 로키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는, 내가 아는 자들을 많이 닮았군.”
그 말을 내뱉은 로키는 살짝 고개를 모로 틀어 제 슬픔을 감추려는 듯 했다. 그러나 고전 명화처럼 그의 처연함이 스티브의 마음속에 깊게 새겨졌다. 깊고 짙은 녹색의 눈동자 속에서 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감정은 오래도록 켜켜이 쌓여 그 형태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 것처럼 보였다. 아마 눈앞의 남자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자칫하면 저 심연과도 같은 곳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었다. 스티브는 떨치고 나와야했다. 이곳에서 사로잡힐 수는 없었다.
“필멸자, 네 이름이 뭐지?”
“…스티브, 스티브 로저스.”
“좋아, 스티브. 네 소원을 들어주겠어. 소원을 말해봐.”
로키는 스티브를 바라보며 자비로운 신처럼 웃었다. 저 남자가 자신을 구해주고 세상을 구해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게 끝날 수 있지 않을까? 미련을 털었다고 생각했지만 실낱같은 가능성이 보이자 다시 희망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스티브는 로키를 향해 세 가지 소원을 빌었다.
“내가 타고 있던 비행선이 뉴욕이 아닌 곳으로 떨어지는 것. 전쟁이 끝나는 것. 그리고 페기를 만나는 것.”
“좋아, 네 소원을 들어주지.”
그가 손을 한번 휘두르자 사방이 밝아져왔다. 신이 빛이 있으리라 명한 것처럼 순간 사방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빛의 세계가 스티브와 로키를 덮쳤고 순식간에 그들을 집어삼켰다. 그것이 로키와 스티브의 첫 만남이었다.
스티브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페기와 약속했던 토요일 8시, 스토크 클럽 앞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 스티브를 발견한 페기는 그의 생환에 눈물을 흘렸고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들은 이 놀라운 기적을 마음껏 누렸다. 스티브는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음에 신이 진정 존재했음을 진실로 기뻐했다. 그러나 스티브의 소원은 지독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글 > 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콜슨&로키] mood in Indigo (0) | 2018.05.14 |
---|---|
[토르로키] blood (0) | 2018.05.07 |
[호크로키/바튼로키]purple Rain (0) | 2018.05.07 |
[스팁로키] 모순 3 (0) | 2018.02.28 |
[스팁로키] 모순 1 (0) | 2018.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