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도 무렵 레인보우시리즈(...)로 낸 단편  회지

Mood in Indigo

Phil Coulson & Loki


 

 

 

 

 

 





 

 (커플성X 콜슨과 로키가 칭긔되는 연성, 에오쉴 봐주세요!)



정신을 차렸을 때엔 끝이 보이지 않은 드넓은 밀밭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아침 해가 밀밭 위로 천천히 떠오르자 온 세상이 황금물결로 일렁였다그 황홀한 광경은 유년시절의 어느 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괜히 감상적인 기분이 들어 눈을 감고 손을 뻗어 흔들자 잘 익은 밀알들이 손바닥을 스치며 간질였다한창을 그렇게 놀았을까나는 뒤늦게야 근본적인 물음을 떠올렸다여기는 어디지?


54년도 한정판 캡틴아메리카 피규어를 걸고 말하는데 뉴욕은 절대 아니었다나는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보았다분명히 로키의 무기에 가슴 한복판이 뚫렸었고 조퇴를 요구하는 나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던 퓨리국장님의 얼굴이 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그러나 이곳은 수술실이나 회복실도 아니었고 쉴드는 더더욱 아니었다뚫렸던 곳을 만져보았지만 아픔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상처는커녕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지금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꿈이거나 아니면 천국일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천국이라고지금까지 내가 해오던 일을 생각해보면 천국보다는 지옥이 어울릴 거였다일단은 유황불이나 뿔 달린 악마는 보이지 않으니 일단 최대한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결정했다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언덕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밀밭과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천국이라기엔 평범했다바닥이 구름으로 되어 있다든가 아기천사들이 날아다니는 곳을 상상해오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진짜 죽었구나우리는 죽음에 가까운 일들을 도맡아서 했기에 쉴드에 몸담으며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이미 십년도 더 전에 정리를 했다그 사이에 고치고 썼던 유서만 대략 몇 백 장일 것이다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은 당연히 있었지만 죽어가는 부하직원에게 퇴근을 허락하지 않는다던 상사의 한결같음이 그리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는 익숙해졌다.


사실 내 죽음이 영웅들을 하나로 모아 줄 계기가 된다면야나쁘지 않은 거래였다거기다 내 장례식에 참여해줄 어벤져스들을 생각하면 미국 대통령 부럽지 않은 장례식이 될 것이었다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족들은 내가 왜 죽었는지 평생 알 수 없다는 것그것 하나였다.


요원이 된 이후로 가족을 만난 적이 없었다나에게 있어 쉴드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몇 십년간 만나지 않았던 가족들보다 더욱 가족 같았다쉴드 요원들 외의 인간관계는 비정기적으로 만나던 연인들이 전부였다심지어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첼리스트의 얼굴을 떠오르기가 힘들었다이러니 그녀가 포틀랜드로 떠난 거겠지그래도 상황이 안 좋을 때 헤어져서 다행이었다나는 나쁜 남자친구였지만 이건 내 탓이 아니었다그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자신이 신이라고 칭하던 외계생명체의 침공아이언맨에 헐크에자신의 영웅인 캡틴아메리카의 부활까지아 맞아싸인을 받았어야 했는데캐비넷 안에 고이 모셔놓은 카드세트가 떠올랐지만 잊기로 했다.


그럼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자신의 어릴 적 영웅인 캡틴아메리카도 만나보았고 이루고 싶었던 건 모두 이뤘던 것 같다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갑자기 지평선 너머에서 큰 함성이 들려왔다소리가 너무 커서 앉아있던 땅을 울릴 정도였다들판의 동쪽과 서쪽에서 몰려오는 흙먼지가 마치 뉴멕시코에서 겪었던 기이한 자연현상을 떠올리게 했다뉴멕시코라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그 먼지구름이 점점 다가올수록 그 주체를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을 보자마자 어쩌면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꿈을 꾸고 있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뉴욕침공이니 지구를 침략하려는 뿔 투구를 쓴 우스운 악당도 다 꿈일지도 몰랐다자신은 간만의 휴가를 받아서 케이블에서 해주는 헐리우드 영화를 보다 잠든 것이 분명했다왜냐하면 바이킹 복장의 무기를 든 남자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우와아아아!”


고막을 찢으려고 작정한 듯 우렁찬 함성소리그들은 크게 웃으면서 상대방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한 대만 맞아도 죽을 것 같은데 맞으면 맞을수록 바이킹들은 더 크게 웃으며 다시 상대방을 향해 무기를 휘두른다저 웃는 모습이 어디서 본 것 같이 익숙한데나는 그 기억의 출처를 더듬기도 전에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곤봉을 피해야만 했다고개를 숙여 곤봉을 피한 뒤 남자의 복부에 주먹을 내지르자 사내는 제법이라는 얼굴로 더 거칠게 달려들었다자기보다 한뼘은 더 큰 남자에게 벗어나 무기로 삼을 만한 것을 찾았다그때 발밑으로 머리통이 하나가 굴러왔다거기까지는 많이 본 장면이었지만 정말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신참인가?”


젠장시체가 말하다니놀란 마음을 진정할 새도 없이 눈앞에 날아온 몽둥이를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 싸워대던 두 무리는 어느 새 뒤엉켜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빈 술통과 뼈들이 들판 위에 수북하게 쌓여갔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새알로 욱신거리는 눈가를 부비며 내게 몽둥이를 날린 사내를 붙들고 물었지만 정작 그는 내 옷차림이 신기한 듯 넥타이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결국 참지 못하고 사내의 손목을 잡고 엎어 메치자 그제야 내말에 대답해줄 마음이 든 것 같아 보였다.


어디긴발할라라네영웅들의 천국에 온 걸 환영함세!”


그렇게 말한 사내는 내 등을 세게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발할라들어본 적 있다뉴멕시코 사건 이후 북유럽신화를 공부했었다전쟁에서 죽은 영웅들만이 갈 수 있다는 천국의 이름이었다내가 천국에 온 것은 맞았군발할라는 아스가르드에 속한 곳이니여기는 아스가르드인가그러고 보니 주위의 사람들 모두가 토르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호쾌한 종족이군아스가르드는 모두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것인가그리고 머릿속에서 자신을 아스가르드에서 왔다고 말했지만 이들과는 정반대로 보이던 인물이 떠올랐다.


로키.”


자기도 모르게 로키의 이름이 튀어나왔다옆에 있던 사내가 갑작스레 마시고 있던 뿔잔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이번에는 침을 뱉었다마치 불결한 것을 들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로키를 아시나요?”


로키를 왜 모르나아스가르드의 둘째 왕자그리고 더러운 배반자불쌍한 패배자 아닌가.”


사내는 거기까지 말한 뒤 술로 입을 헹구었다로키에 대한 아스가르드인들의 평가가 어떤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럼 로키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아십니까?”


사내는 갈퀴 같은 손으로 턱에 난 수염을 벅벅 긁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글쎄정복에 실패하고 토르님에게 끌려온 뒤 어딘가에 유폐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난 관심 없소에잇술이 없잖아!”


사내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술통을 던지며 바닥에 벌러덩 눕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다더 이상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무리인 것처럼 보였다.


자꾸 뿔잔을 건네주는 무리에서 간신히 벗어나와 한적한 숲으로 걸어갔다아무리 죽음과 가까운 직업을 가졌다고 해도 잘린 머리통이 말을 하고 뼈가 다시 붙는 일들을 눈앞에 겪는 것은 지극히 보통사람인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말이지 아스가르드는 문명보다는 야만에 가까운 세계였다비록 그들의 기술력이나 신체 능력이 지구보다 월등하여도 기본적으로는 힘의 논리에 더 가치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사내가 말한 이야기를 다시 찬찬히 곱씹었다로키가 실패한 정복전쟁이 이번 뉴욕사태를 말한 것인가아니면 또 다른 전쟁이 있었던 것인가그것이 가장 궁금했다물론 죽기 전까지도 로키가 어벤져스들을 이기고 지구를 정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좀 더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 * *


 

콜의 아들.”


익숙한 호칭이었다토르도 저를 그렇게 불렀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부를 사람은 이 세상에 둘이었다토르와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나 또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키.”


검은머리를 한 빼빼마른 남자가 나무 위에 앉아 나른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 모습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고양이처럼 느껴져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저런 재주라면 어디 가서 굶어죽지는 않겠지만 놀라운 재주에 비해 피죽도 못 얻어먹은 모양새였다.


안녕콜의 아들.”


안녕하세요로키.”


로키는 정말 고양이처럼 사뿐한 걸음으로 나무에서 내려왔다사람을 내려다보는 특유의 시선처리는 여전해 보였다나는 미소 지으며 그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그리고그냥 콜슨입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로키는 크게 코웃음을 쳤다.


나도 알아다만 당신을 보니 토르가 미드가르드에 내려갔을 때의 꼬락서니가 떠올라서 말이지참 바보 같았지안 그래?”


그런가요다른 세계의 문명에 익숙하지 않다고 바보라고 할 수는 없죠지금 저도 딱 토르와 같은 상태인걸요.”


내말에 로키는 다시 눈썹을 찡그리며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그가 생각하기에 하찮은 인간이 자신의 말을 반박하는 것이 언짢은 것 같았다나는 로키가 내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입술을 축이며 말을 돌리려고 하는 것을 가로 막았다이런 말장난은 중요치 않았다.


로키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을 보니결국 뉴욕을 정복하겠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군요?”


정곡을 찔린 듯 매끄럽게 재잘거리던 입이 몇 번 들썩이다 결국 다물렸다계획을 실패한 악당의 얼굴이라기에는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꼴이 마치 할로윈 사탕을 뺏긴 아이처럼 하찮게만 느껴졌다.


그래너는 나에게 결코 이기지 못할 거라고 말했지어때네 말대로 돼서 기분이 어떤가인간?”


기분이요?”


그래네 말대로 이기지 못한 내가 우습겠지?”


글쎄요다행이다정도?”


로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그리고는 이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주문이라도 외우나 싶어 귀를 기울였지만 투덜거리는 소리가 대분이었다안 그래도 굉장히 말이 많은 외계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스가르드에서 본 로키는 더욱 심한 수다쟁이가 된 것 같았다.


그게 감상의 전부야나에게 복수를 원하지 않아?”


로키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자신도 그의 가슴을 총으로 뚫어버렸어야 했나하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었다게다가 그럴만한 무기도 없지 않은가아니면 무기를 가져다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분노가 일지 않았다어쩌면 자신을 쳐다보는 눈동자 때문일지도 몰랐다아니면 처음 보다 더 바싹 마른 얼굴이나 휘황찬란한 뿔 투구가 아닌 옷차림 때문에 동정심이라도 든 건지도.


그런데 밥은 먹었어요?”


뭐라고?”


로키가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듯 다시 한 번 물어봤다뭐라고?


저기 보니까 고기를 엄청 굽던데안 먹었으면 같이 먹어요.”


너는 내가 싫은 거 아니었나?”


글쎄요싫고 좋고를 떠나서 저는 지금 죽었잖아요?”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며 로키의 손을 잡아끌었다로키는 차갑게 손을 뿌리치더니 대꾸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내게서 거짓이나 다른 꿍꿍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하는 눈치였다경계하는 눈치가 정말 고양이 같았다당신이 남을 잘 속인다고 해서 저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죠라고 쏘아붙여주려던 것을 꾹 참고 로키의 손을 다시 잡으려고 뻗었다그러나 로키는 순식간에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 * *


 

자네가 여기 있는 줄 몰랐네!”


토르가 나를 보더니 숨이 막히도록 꽉 끌어안아주었다이러다간 한 번 더 죽는게 아닐까 걱정 될 정도로 열렬한 환영이었다.


하하토르숨이 막혀요.”


미안하네미드가르드식 인사는 이거였지.”


이번에 토르는 내 손을 잡고 위 아래로 크게 흔들었다몸이 위아래로 휘청거렸지만 나는 토르를 보며 반가움을 느꼈다아스가르드에 온 지 벌써 몇 주가 지났고 이곳 사람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란 걸 알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낯익은 얼굴을 보니 어딘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진작 알았다면 자네를 찾아왔을 것을그래발할라는 편한가?”


점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빌지스나입은 보았나시간이 되면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사냥을 나가보세마음껏 싸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너무 토르다운 말이라서 나는 웃음이 났다.


너무 싸워서 문제더군요.”


싸움은 아스가르드의 미덕이지자네 같은 전사라면 알잖은가.”


제가 전사인가요?”


내가 반문하자 토르는 나를 향해 다정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이미 훌륭한 전사일세.”


훌륭한 전사토르는 어리둥절해 하는 내 등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며 화통하게 웃었다진짜 전사의 몸을 가진 토르에게 훌륭한 전사라는 칭찬을 들으니 좀 쑥스러웠다훌륭한 전사는 어벤져스들이었다나는 조력자혹은 악당에게 죽은 엑스트라1쯤 이었다.


토르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가 말하길 로키가 바이프로스트를 파괴한 뒤 아홉 세계에 혼란이 와 바나헤임의 반란을 정리하러 출발해야한다고 했다토르는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헤임달을 불렀다나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토르를 향해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혹시 로키는 어떻게 됐나요?”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짓던 토르는 이내 웃어 보이며 안심시키듯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로키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지하 감옥에 갇혀있다네.”


로키가 순순히 갇혀있나요탈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테서렉트를 이용해서 지구로 왔듯 감옥에서 자꾸 빠져나오는 것이 아닐까로키라면 무언가 계략을 짜고 있을 것만 같았다그러나 토르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법능력까지 빼앗겨 도리가 없을 걸세로키의 마법은 어머니의 유산이기 때문에 거둬들일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자격이 되기 전에 마법을 쓴다면…….”


토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헤임달이 내린 빛기둥은 토르를 데리고 사라졌다토르의 답변에 나는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감옥에 갇힌 데다 마법을 쓸 수 없다면 자신의 앞에 자꾸만 나타나는 로키는 어떻게 된 거지토르에게 말해야하나그렇지만 왠지 고자질을 하는 것 같아 입을 다물기로 했다로키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보이지는 않았고 게다가 이미 자신은 죽지 않았는가상관없을 거라고 애써 생각했다.



* * *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언제보아도 발할라의 밤은 아름다웠다뉴욕의 밤과는 달리 눈부신 조명이 아닌 별무리들과 달이 은은하게 빛을 내며 포근한 적막이 주위에 내려앉았다우주와 가까이 있어서 그런가별과 달리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다하늘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자 옆에서 작게 코웃음이 들렸다역시나 로키였다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웃음소리였다.


비켜여기는 내 자리야.”


로키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슬며시 나타나서 자기를 알아달라는 듯 시위했다가 도망갔다나는 익숙하게 맞받아쳤다.


자리 넓잖아요조금만 양보해주시죠.”


로키가 비쭉이던 입매를 조금 더 누그러뜨렸다그때를 놓치지 않고 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조금 비좁았지만 쌀쌀한 날씨에 차가워진 몸이 타인의 체온으로 덥혀지는 것이 기분 좋았다.


생각보다 굉장히 넉살이 좋군.”


원래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는데전 한번 죽었으니까요.”


시끄러워.”


요새 들어 알게 된 사실인데 로키는 내가 죽음’ 이란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괴로운 얼굴을 했다아주 짧게 스쳐지나가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로키가 어떨 때 기뻐하고 어떨 때 슬퍼하는지무엇이 진심이고 거짓말인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그것은 제법 기분 좋은 일이었다심지어 토르가 로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라고 했을 때는 어처구니없게도 뿌듯함마저 느꼈다장난과 속임수의 신이라더니신도 별거 없네나는 침울해하고 있는 로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매번 하는 질문을 하기로 했다.


토르가 말하길 당신은 감옥에 갇혀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죠?”


그러자 로키는 금세 결코 마술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겠다고 하는 마술사처럼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바보 같긴내가 아무리 감옥에 있어도 이 정도도 못할 것 같아?”


얄밉게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로키는 또 다시 사라져버렸다영 솔직하지 못한 신이었다.

 


* * *


 

아스가르드로 올라온 영혼들은 다시 지구에 못 가는 거 알아?”


갑자기 나타난 로키는 이번에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내게 악담을 퍼부었다그것이 로키 나름의 안부인사라는 걸 이미 알아차린 지 오래였다잘 지내고 있냐는 말 한마디를 하는 게 힘들어서 항상 배배꼬아서 말하는 게 로키다웠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니까 괜찮아요물론 도넛이 그립긴 하지만요.”


로키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화를 냈다.


고작 그거야이 낯선 곳에 너 혼자 떨어졌는데 겨우 그거야?”


왜 로키가 화를 내는 것인지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아스가르드인들은 무신경하기도 했고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내게 친절했다와이파이가 터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원체 아날로그적인 사람이었으니 심심하지도 않았다게다가 이곳에는,


토르도 있고 그리고 로키 당신도 있으니까요.”


아무리 잘 적응하더라도보고 싶은 누군가가 없더라도 새로운 세계의 적응은 꽤나 힘든 일이다그것은 인정해야했다그랬기에 악연이었을지 몰라도 로키는 어느새 내 친구처럼 느껴졌다내 착각일지 몰라도 우리는 실제로 친구적어도 그 비슷한 관계였다로키는 내말에 모욕이라도 당한 듯 화를 내었지만 로키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그게 거짓말인 걸 눈치 챌 수 있을 것이었다.

 


* * *

 

이게 도넛인가?”


로키가 불쑥 들이민 것은 익숙한 그것이었다한손에 들어오는 동그란 빵기름에 튀긴 냄새그 위에 뿌려진 설탕까지그것도 누군가가 직접 손으로 만든 것 같은 수제도넛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봤지만 로키는 대꾸도 하지 않고 내 앞으로 도넛을 들이밀었다하긴어디서 난 게 중요하지는 않았지결국 도넛을 받아들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나 줄까요?”


도넛 중 하나를 집어 내 입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로키에게 건넸다처음에 주저했지만 입에 억지로 넣어주자 뱉어내지도 못하고 우물거렸다처음에는 인상을 쓰던 로키가 그래도 끝까지 다 씹어서 넘긴 뒤 간신히 한마디를 했다.


미드가르드인은 이런 걸 어떻게 먹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진심어린 말투에 크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제대로 안 익어서 그런 거예요.”


내가 요리사장에게 분명 제대로 만들라고 명했건만!”


며칠 전 도넛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물어보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나 보다로키의 방대한 지식에도 도넛을 만드는 방법 따위는 없었던 것 같았다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하는 것을 싫어하는 로키가 자신을 위해서 한 행위는 생각보다 더 감동적이었다작은 푸념이었는데 놓치지 않고 챙겨준 것이다로키는 내 웃음소리에 맞춰 점점 얼굴을 붉히더니 끝내는 벌떡 일어나 요리사를 찾아가 목을 날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이건 나를 우습게 보는 행위야!”


에이설마요처음 만들어보는 음식이니까 그렇죠.”


내가 마법만 쓸 수 있었다면이 정도야 금방 만드는데…….”


흥분을 했다가도 금세 시무룩해지는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로키를 달래주었다.


충분히 맛있었어요.”


진심이야?”


다행히도 로키는 자신의 머리에 얹혀있는 손에 짜증을 내기는커녕 도넛이 맛있었는지를 묻는 것에 집중했다.


거짓말이에요제가 만드는 게 낫겠네요.”


또 다시 시무룩한 표정이라니처음의 비웃음분노짜증 이외의 다채로워진 표정변화에 절로 웃음이 났다결국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어버리자 이번에는 로키의 얼굴이 사나워지더니 자신의 머리에서 내 손을 신경질적으로 내쳤다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로키의 손을 잡아 억지로 새끼손가락을 엮어 걸었다.


다음번엔 제가 진짜 맛있는 도넛을 만들어 줄게요약속해요.”


 

* * *

 

이제 제법 도넛다운 도넛을 만들어준 요리사장 덕분에 나와 로키는 사흘에 한번 꼴로 도넛을 먹는 시간을 가졌다죽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살찔 걱정은 접어뒀다는 거다원체 마른 체형인 듯한 로키는 더욱 그런 걱정 따위 없겠지도넛이 꽤나 제 취향이었는지 나와 로키는 매번 마지막 도넛을 먹기 위해 신경전을 펼쳤는데 오늘은 로키의 승리였다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을 짓는 로키였지만 칠칠맞게도 입가에 설탕가루가 잔뜩 묻은 꼴이 귀엽기까지 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로키의 입가에 묻은 설탕을 털어주기 위해 손을 뻗자 순간로키에게 뻗었던 오른팔 전체가 흐릿하게 사라졌다또 이러네무덤덤해진 나에 반해 로키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내 손을 홱 낚아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언제부터 이랬어?”


잘린 머리도 말을 하는 마당에 이까짓 손이 흐렸다 사라지는 걸로 웬 호들갑이냐고 타박을 놓고 싶었지만 제법 진지한 모습에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이렇게 손이 투명해지게 된 지는 며칠이 되었다처음에는 손끝이더니 이제는 팔까지 투명해진 것이다이것도 아스가르드인이 되는 단계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무심하게 넘겼는데 아니었나보다로키는 내 말을 듣더니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토르를 찾아가토르를 찾아가면 아버지께서 도와주시겠지.”



* * *

 


토르는 처음 보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로키의 예상대로 토르는 아버지인 오딘에게 보여줘야겠다며 아스가르드 궁의 치료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토르의 아버지오딘은 정말 신처럼 위엄이 느껴졌다한쪽 눈이 없는데도 그 기백이 대단했다토르에게는 미안했지만 토르와는 달리 정말로 ’ 같았다오딘은 나를 못마땅하게 보다 토르의 소개에 인자하게 웃으며 환영을 해주었다오딘은 나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육체는 미드가르드에 영혼은 아스가르드에 있어 둘의 연결고리가 약해진 탓이구나둘 중 어느 한곳에도 진정으로 속해있지 않으니 빨리 해결하지 않는다면 둘 다 소멸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영혼과 육체 둘 중 하나를 완전히 소멸시켜야 하지.”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다급한 내 질문에 오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영혼과 육체를 합치는 마법을 할 수 있는 건 현재는 아무도 없네.”


오딘의 말에 토르는 자신만 믿으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의 육체는 내가 처리해주지아프지 않게 하겠네약속하지.”


남을 죽이겠다는 말을 저렇게 친절하게 하다니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곁에 있던 오딘 또한 좋은 생각이라며 헤임달에게 내일 바이프로스트를 열어 놓으라고 명령하겠다며 나를 격려했다.


잘 되지 않았나콜슨이제 자네는 완전한 아스가르드인일세!”

 


* * *


 

콜슨!”


밤이 되지도 않았던만 로키는 우리가 매일 보던 장소에 이미 나와 있었다나는 누군가가 로키를 볼까 걱정이 되었지만 로키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나에게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오딘과의 대화를 말해주자 로키는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내게 질문했다.


콜슨솔직히 말해이곳에 있고 싶어?”


그걸 잘 모르겠어요.”


사실이었다나는 내가 돌아가고 싶은지 머물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언제부턴가 조금 지쳤던 것 같다매일같이 일어나는 동료들의 죽음보통사람들이라면 감당하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다쉴드는 나의 가족이자 삶이었으나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않았던 것 아니다그러나 어쩌면더 이상 아무도 죽을 일 없는 이곳이야말로 천국이 아닐까아스가르드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이 대책 없는 전쟁광들에게 언제 적응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벌써 제법 마음에 맞는 친구도 생기지 않았는가느긋하게 생각해서 한 백년 쯤 지나면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로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로키는 그런 나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다 무언가를 중얼거리고는 사라져버렸다나는 인사도 없이 사라진 로키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내일의 마지막 도넛은 내가 먹어버릴테다.


 

* * *

 

에이전트 콜슨내 말이 들리나?”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토르도 로키도 아니었다어딘가 핼쑥해진 닉 퓨리와 마리아 힐의 얼굴이었다흰색 벽지와 일정한 기계음몸 이곳저곳이 쑤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들어 간신히 얼굴의 호흡기를 치우자 소독약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정말로 돌아왔구나그러면 지금까지의 일들이 꿈이었을까믿겨지지 않아 주먹을 쥐었다 폈다했지만 손이 흐릿해지는 일은 없었다나는 좀 전부터 계속 머리에서 맴도는 이름을 내뱉었다.


로키.”


마리아는 로키가 토르와 함께 아스가르드로 돌아간 일스타크 타워가 어벤져스타워가 된 일그리고 퓨리가 어떻게 어벤져스를 하나로 모았는지 까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그러나 무슨 말을 해도 대꾸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나를 보고 힐과 국장님은 의아해하며 병실을 나섰다.


푹 쉬게당분간 휴가야.”


마리아와 국장님이 나가자마자 자꾸 한숨이 새어나왔다분명 나를 다시 지구로 내려 보낸 것은 로키였다현명한 신인 오딘은 육체와 영혼을 합칠 줄 아는 자가 현재는’ 없다고 했다그것은 현재는’ 마법을 쓸 수 없는 로키를 가리킨 것 일테지그렇다면 로키는 어떻게 된 걸까로키가 마법을 쓴 뒤 어떻게 되었을까자꾸만 걱정이 됐다로키는 마법을 금지 당했을텐데마법을 어떻게 쓴 거지쓴 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자꾸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상상력이 발휘됐다바보 같긴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돌려보내주지 않아도 됐는데아마도 로키는 내 거짓말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내가 로키의 거짓말을 알아차릴 수 있듯 말이다.


* * *


 

나는 무의식적으로 힐이 두고 간 카드 세트를 꺼내들었다그녀의 말대로라면 카드가 핏자국으로 엉망이어야 했는데 카드는 물론 상자까지 어디 한 군데 망가진 곳 없이 깨끗했다이리저리 상자를 흔들자 못 보던 메모지가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메모지에는 섬세하고 우아했지만 날카로워 보이는 글씨체로 딱 한 문장만 쓰여 있었다.

 

선물이야.


PS. 약속 잊지 마.


나는 곧 만나게 될 이 귀여운 친구를 위해 도넛을 만들 재료를 잔뜩 사두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웃었다.

 

 



'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deep BLUE sea 中  (0) 2018.06.09
[스팁로키] The deep BLUE sea 上  (0) 2018.06.06
[토르로키] blood  (0) 2018.05.07
[호크로키/바튼로키]purple Rain  (0) 2018.05.07
[스팁로키] 모순 3  (0) 2018.02.28
Posted by 우훗우훗
,

Man From U.N.C.L.E 현대AU

 

P. Star

(뽀르no 스타 솔로X스태프 일리야)

 

 

표지

 





 

*본 창작물은 실제 성이ㄴ비디오 산업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이에 날조와 캐붕이 심하오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2018 솔리야 구뉴 교류전에 나오는 신간의 맛보기입니다.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팁로키 게스트북 선입금 예약 받고 있습니다  (0) 2014.12.19
[스팁로키/통판공지] The deep blue sea  (1) 2014.07.28
엔솔홍보  (1) 2013.04.11
Posted by 우훗우훗
,

[토르로키] blood

글/긴 2018. 5. 7. 14:12

2012년도에 발행했던 토르로키 단편 회지

뱀파이어AU

blood

(Thor X Loki)


 

 

 

 

 

 

 

옥은 당신의 오른편에 있다런던은 위대한 도시였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그 이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마들이 살 것 같은 빈민가처럼 충격적인 장소들도 함께 존재했다거리는 더러운 것들로 뒤덮여있으며 평생 한 번도 머리를 빗어 본 적 없는 추악한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그러니 도시의 동쪽 끝에 무엇이 있는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런던의 동쪽 끝에 있는 화이트 채플 가(White chapel Street)는 런던의 뒷모습 가운데서도 단연 지옥과 닮은 곳이었다골목마다 매음굴에서 새어 나오는 아편연기로 자욱했다창녀들은 밤안개를 베일처럼 두르고 산책로에 서서 치마를 펄럭이며 남자들을 유혹했다때때로 사교계에도 데뷔하지 못한 미숙하고 어리석은 청년혹은 군에서 막 제대해 세상물정 모르는 장교가 멋모르고 저속한 만남에 끌려들어가 타락한 향락에 속절없이 중독되기도 했다가장 점잖은 신사라도 오페라 무대의 뒤편을 기웃거리며 여배우의 대기실을 꽃과 보석으로 장식해 구애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였다. 19세기의 런던은 아름다웠지만 죄악이 몸을 숨기고 언제든지 덮칠 준비를 하고 있는 곳이었다지옥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


 

이사벨은 도시의 밤을 헤치며 걸었다마차의 등불들이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밤의 거리는 어둠보다 은밀하며 죄악보다 복잡한 곳이었다거리는 낮의 흥겨움을 잊어버리고 아예 새로운 장소로 탈바꿈했다가스등은 꺼진 지 오래였다진한 어둠이 주변을 삼킨 채 뱀처럼 도사리고 있었다이사벨은 처음 보는 도시의 이면에 두려움에 떨며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단언컨대 이사벨은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숙녀였다그녀의 어린 동생 안젤라가 아프지만 않았더라도 그녀가 이 야심한 시간에 일어날 일도사창가 뒷골목에 올 일도 없었으리라그러나 오늘 내내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던 안젤라는 결국 입에서 피를 쏟아냈다어쩌면 결핵일지도 몰랐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사벨은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최근 주변에서 떠돌고 있는 괴기한 소문 때문인지 거리는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살인마 잭의 이야기는 아니었다잭은 이미 일주일 전 체포당해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호사가들은 죽은 살인마에 대해서 더 이상 입을 놀리지 않았다이제 런던은 새로운 살인마에 대한 소문으로 들끓었다관을 끌고 다니는 남자의 이야기였다가장 깊고 어두운 밤달빛도 비추지 않는 밤이면 집채만 한 덩치의 남자가 쇠사슬을 감은 관을 끌며 관에 넣을 산 자를 찾아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했다소문은 전염병처럼 번졌다이사벨의 등 뒤로 무서운 예감이 차갑게 스쳐지나갔다그녀는 망토를 더욱 단단히 여민 뒤 거리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이제 이 골목만 돌면 창녀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의사의 집이 나왔다이사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이때 누군가에 의해서 이사벨은 맥없이 골목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갔다골목 안에서 이사벨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었다그들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이사벨은 알지 못했지만 이 근방에서도 행동거지가 거칠기로 소문난 자들이었다.


아가씨는 하룻밤에 얼마야?”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무리 중 한명이 이사벨의 손등에 입술을 비볐다사내에게서 악취가 풍겼다.


살려주세요.”

아니 우리가 아가씨를 죽인다고 했나그냥 좀 즐기자는 거지.”

이 시간에 나다니는 걸 보니까 꽤나 밝히는 아가씨 아니겠어안 그래?”


사내들이 저들끼리 웃고 떠드는 사이 이사벨이 황급히 몸을 틀어 밖을 향해 소리 쳤다.


도와주세요누가 좀……!”


그러나 무리 중 한 명이 거칠게 손을 휘둘러 이사벨의 뺨을 쳤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맺어지지 못했다.


씨발년거 말 한번 많네.”


그가 침을 뱉으며 욕을 했다사내들의 거침없는 빈정거림과 모욕에 이사벨은 턱을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그녀의 등 뒤로 차갑고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가장 키가 큰 사내가 이사벨의 희고 가는 목덜미를 혀로 핥으며 치마를 거칠게 헤집기 시작했다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먼 곳에서 빅벤의 종소리가 울렸다.


지이익-


종소리 사이로 무언가를 끄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기이한 소리와 함께 금발의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금발의 사내는 무심한 얼굴로 걸어 들어와 이사벨의 치마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자의 뒤에서 팔목을 잡아 비틀어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

시발저거 뭐야이 새끼야너 누구야!”


자존심이 상한 사내들이 소리를 지르며 남자를 향해 몸을 던졌지만 남자는 별 말없이 차례대로 사내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그 몸놀림이 너무도 빨라 사람 같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기세좋게 달려들던 그들은 금발의 남자에게 속절없이 당했다남자는 달려드는 사내들의 머리통을 커다란 손으로 갈겨 땅바닥 위에 나뒹굴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절룩거리는 다리와 부러진 코를 움켜쥔 무리들이 결국 꽁무니를 뺐다남자가 그들을 물리치는데 걸린 시간은 열두 번의 종소리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벨은 순결한 처녀답게 뺨을 물들이며 자신을 도와준 남자를 향해 수줍게 감사인사를 했다남자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배고파토르.”


이때 남자의 뒤에서 한 소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이사벨은 깜짝 놀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소년은 안젤라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소년은 마치 어둠으로 빚어낸 것 같았다창백한 피부와 그와 대조되는 까만 머리카락까지소년의 외모는 예술가가 정성을 기울여 만든 도자기 인형과 같은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어린아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법한 순진함과 사랑스러운 무지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사벨은 소년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자기보다 한 뼘은 작은 어린아이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러나 공포는 아주 거대해 그녀를 집어 삼켰다어쩌면 좀 전의 사내들과 마주한 것이 더 안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소년은 두려움에 떠는 이사벨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왔다소년의 녹색 눈이 기이한 빛을 냈다.


이 여자가 먹고 싶어.”


소년의 흰 손이 이사벨을 향해 뻗어왔다그녀는 피할 수 없었다고양이 앞에 놓인 쥐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서있는 것이 고작이었다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녀의 몸에 남자의 손이 닿았다남자는 이사벨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하오.”


그것이 이사벨이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우드득머리가 기괴하게 틀어진 그녀의 몸이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이상하게도 이사벨은 남자에게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죽음이 너무 순식간이었기도 했지만 그 순간 마주친 남자의 눈동자를 보며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수긍했다다만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동생안젤라가 걱정이 될 뿐이었다.

 


*


 

소년은 무언가 성에 차지 않는 듯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토르토르!”


그 모습은 영락없이 떼를 쓰는 어린아이였다.


너 그 계집이 맘에 들었구나그렇지그래서 그렇게 단번에 고통 없이 죽인거지그런 거지?”


토르라고 불린 남자는 답이 없었다그 침묵이 더욱 소년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소년은 쓰러져 있는 이사벨의 가냘픈 몸을 걷어찼다소년이 힘껏 걷어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체는 몇 번 들썩이고 말 뿐이었다토르는 소년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가녀린 어깨가 위 아래로 거칠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로키.”

너의 고귀한 연인에게 이런 대우는 부당하다고 느끼는 거야?”


로키의 비아냥거림에도 토르는 침묵을 지킨 채 품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날이 선 단도가 달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토르는 익숙한 솜씨로 이사벨의 가슴을 갈랐다토르는 무릎을 꿇고 벌어진 사이로 두 손을 밀어 넣었다토르의 손 가득 순결한 처녀의 피가 담겼다토르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로키를 향해 말했다.


피가 식어간다부패하기 전에 어서 마셔.”


그러나 로키는 고개를 돌린 채 샐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년의 피 따위는 마시지 않겠어.”

어서.”


토르는 로키의 코앞으로 손을 가져갔다로키의 코에 향긋한 처녀의 피 냄새가 스쳤다로키는 자신의 입술을 진주 같은 송곳니로 짓이겼다창백했던 입술이 금세 붉게 변했다결국 로키는 어리광을 부리듯 토르의 손목에 매달려 정신없이 피를 핥아 마셨다붉은 죄악의 증거가 로키의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 * *


 

토르는 동이 터오는 것을 바라보았다유리창으로 비쳐 드는 희끄무레한 빛은 물결처럼 출렁거리며 서서히 엷어져 갔다오늘따라 더욱 몸이 꽁꽁 묶인 채 캄캄한 바다 속으로 가라앉듯, 어둠 속으로 잦아드는 느낌이었다난로의 불은 꺼진지 오래였고 시계소리만 들렸다토르는 의자에 기대앉아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토르는 점점 나쁜 일에 무디어져갔지만 오늘 밤 같은 일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특히 그녀는 자신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토르는 방안 구석에 놓인 관을 바라보았다목단나무로 만들어졌고 뚜껑 위에는 십자가 모양이 새겨져 있는 평범한 관이었지만 사실 보통의 관과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그것은 크기였다관의 크기가 보통 관의 반만 했다아이를 위한 관이기 때문이었다아이의 관을 만드는 것은 간단했다보통의 관을 만든 뒤 반으로 자르는 것이 방법의 전부였다물론 이런 관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런던에서는 아이들이 죽으면 대부분 맨몸으로 땅에 묻혔다아이를 위한 관을 만들기에는 날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죽어나갔다하지만 토르는 로키의 육신을 벌레들에게 먹히게 내버려둘 수 없었기에 로키를 위해 특별히 주문한 관이었다.


그러나 이 관이 땅에 묻힌 적은 없었다토르는 로키가 죽었던이십 년 전의 그 날을 기억했다어찌 잊을 수 있으랴그 순간부터 이 모든 절망과 공허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 * *

 

이십 년 전런던에는 또 다른 전염병이 돌았다이로 인해 도시 인구 오분의 일이 죽어 나갔다로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로키는 무척이나 아팠다토르는 어린 동생의 숨결이 점점 미약해지는 것을 알았다백방으로 알아봤으나 만나는 의사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어머니는 로키를 낳으며 돌아가셨고 불과 삼 년 전에 토르는 아버지를 잃었었다로키는 토르에게 하나 남은 가족이었다토르는 로키마저 잃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약을 구하러 토르가 집을 비운 사이 로키는 죽음과 조우했다집으로 돌아온 토르를 기다린 것은 죽음의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는 로키였다움푹 팬 뺨과 창백하고 움직임 없는 얼굴조그맣고 섬약한 모습의 로키를 보며 토르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토르는 로키를 끌어안고 뻣뻣해지기 시작한 손발을 어루만졌다토르는 품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내어 로키의 입안으로 흘려보냈다런던의 뒷골목에서 구한 뱀파이어의 피였다혹시나 싶어서 집어온 것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로키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토르는 마지막으로 이 수상한 피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미처 삼키지 못한 피가 로키의 입가로 천천히 흘러내렸다토르는 그것들을 모아 다시 억지로 로키의 입안으로 집어넣었다덕분이었는지 로키의 심장이 잠시 멈추기는 했지만 로키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로키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순간이었다그날을 경계로 로키는 점점 야위어만 갔다분명 병은 모두 나았건만 음식을 입에 넣는 족족 게워냈고 종내에는 그렇게 좋아하던 호밀 빵의 냄새조차 질색했다낮 동안이면 깊은 잠에 빠졌다가 밤이면 몽유병 환자처럼 밖을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토르는 그런 로키를 보며 걱정했다.


두 뺨은 점차 창백해지고 검은 머리커다란 두 눈곧은 콧날작은 새와 같던 걸음걸이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던 로키는 다 사라지고 침묵에 잠겨 있는 모습은 마치 어떠한 숭고한 숙명에 의해 알 수 없는 표식을 이마에 새겨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그것은 너무나도 슬프고 차분하고 동시에 너무나도 부드럽고 또 안타까웠기 때문에 로키의 곁에 가까이 가는 사람은 겨울에 핀 꽃향기에 몸이 떨리듯 어떤 기괴한 매력에 사로잡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때문에 많은 이들이 로키의 매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로키는 조금씩 탐욕과 분노와 증오에 잠식당하고 있었다정숙해 보이는 입술은 마음의 고뇌를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로키 스스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사건은 일어나게 마련이었다토르는 그 날을 잊지 못했다사라진 로키를 찾은 곳은 이웃의 정원에서였다로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그 곁에는 바지춤을 채 추스르지 못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토르는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냈다욕정적인 눈으로 로키를 훔쳐보던 이웃집 남자였다남자의 목덜미는 짐승에게 물린 듯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토르는 황급히 다가가 자신의 셔츠로 로키의 얼굴을 닦아 냈다.그리고 로키에게 무슨 상처가 난 것이 아닌지를 확인했다몇 군데 옆집남자에게 입은 듯 생채기가 있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나 더 먹고 싶어.”


로키가 입맛을 다시며 토르에게 칭얼거렸다로키의 얼굴에서 죄의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다만 배고픔에 허덕이던 로키의 얼굴이 포만감으로 빛이 났다그 모습은 마치 인간이 소와 양을 죽일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생존을 위한 살해는 죄책감을 요구하지 않았다토르는 자신이 가지고 온 약이 진짜 뱀파이어 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제야 로키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다.


토르는 로키가 다치지 않은 것이그리고 이들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더군다나 로키에게 해를 입히려고 했던 나쁜 놈이 죽는 것이었다자신의 동생은 죄가 없었다토르는 정원 한켠에 있던 돌덩이를 주워들었다.


살려…….”


남자가 바짓단을 붙들고 애원했다토르는 눈을 감고 남자의 머리통을 내리쳤다꿈틀거리던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로키는 남자의 으깨어진 머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뒷목에 이를 박아 넣은 뒤 허겁지겁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토르의 눈시울이 촉촉이 젖는가 싶더니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로키에게 있어서 그날은 토르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본 날이자 마지막 날이었다로키는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토르의 눈물을 모두 받아내기에는 자신의 손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결국 로키는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 * *


 

살롱에 들어서자 꽃향기와 고기 냄새송로의 향기가 뒤섞인 따뜻한 공기에 감싸이는 것을 로키는 느꼈다촛대 위의 촛불들이 종 모양 은제 덮개 위에서 불꽃을 피워 올리고증기가 뽀얗게 낀 커트글라스들이 서로 창백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색색의 꽃다발들은 식탁의 끝에서 끝까지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훌륭한 연회장이 그러하듯 한쪽 구석에 놓인 카드놀이 테이블 위로 금화가 쏟아지는 맑은 소리가 들려오고 부인들의 부풀어 오른 스커트가 서로 스쳐지나가며 부채 너머로 상대를 흘깃거렸다.


열아홉 살부터 마흔 살 안팎의 남녀들이 춤추는 사람들 속에 섞이기도 하고 서로 담소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들의 나이옷차림얼굴 모습은 각각 달라도 어딘가 서로 공통된 데가 있었다그들은 외양은 젊었지만 어딘가 노숙한 격조가 느껴졌다눈빛에는 날마다 정념을 만족시킨 데서 오는 고요함이 감돌았고부드러운 거동 뒤에는 특유의 욕망이 엿보였다큼직하게 이니셜을 수놓은 손수건으로 입을 훔칠 때면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들은 종종 파티를 열어 교류했다겉모습은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그들은 인간처럼 구는 것을 유희로 삼았다인간이었던 때를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몰랐다때때로 그들은 인간들보다 욕망에 대해 솔직하게 굴었다.


육체의 뜨거운 흥분과 애정으로 가득한 거대한 발코니와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고 각양각색의 희귀한 꽃으로 가득한 바구니연인들의 밀회를 위해 비단 장막이 드리워진 규방이 모든 것들이 토니 스타크의 저택을 상징해주고 있음과 동시에 뱀파이어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었다.


로키는 오케스트라의 리듬에 몸을 싣고 가볍게 움직이면서 앞으로 미끄러져나갔다때때로 다른 악기들이 잠잠해진 사이에 혼자 연주되는 바이올린의 미묘한 선율을 들을 때면 로키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로키의 미소를 이 만찬의 주인인 토니 스타크가 긴 식탁의 상석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런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풍문에 따르면 그는 여왕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그것이 영 틀린 말이 아니었는지 오늘의 연회는 무척 화려했다.


이윽고 준비된 만찬이 나오기 시작했다토니 스타크의 명성에 맞게 파티는 화려했다스페인산 포도주가 잔뜩 나오고 새우와 아몬드 즙이 든 수프파인애플이나 석류 같은 진귀한 과일들트라팔가르 푸딩 그리고 온갖 종류의 고기들이 쟁반에 담겨 나오기 시작했다화려하고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스타크답게 공작고기까지 준비가 되어있었다.


로키는 토니의 악취미라며 혀를 차며 마라스키노 술이 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진짜 진주가 박혀있는 조개모양의 접시를 손에 들고 숟가락을 입에 넣은 채 눈을 반쯤 감았다.


아직 술은 좀 이른 나이가 아니던가?”


토니 스타크가 등 뒤에서 나와 로키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자신의 엄지로 닦아낸 뒤 입에 넣고 소리 나도록 빨았다.


달군.”


토니는 로키를 향해 명백히 유혹적인 동작을 해보였지만 로키는 영리하게도 그 이면에 자신의 어린애 취향의 입맛에 대해 놀리는 토니의 심중을 알아채고는 별다른 반응 없이 재빨리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아내었다그조차 토니의 눈에는 귀엽게 보였다.


여기는 혼자 온 건가보호자 없이?”

그럼 내가 누구와 함께 와야 하지?”


로키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토니는 예상대로 날을 세우는 로키의 반응에 속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로키에게 거짓 용서를 구했다.


사과의 의미로 재밌는 걸 보여주지.”


토니가 손가락을 튕기자 제복을 갖춰 입은 급사들이 은쟁반을 하나씩 들고 나왔다그 위에는 혀를 빼물고 죽은 자들의 목이 하나씩 담겨있었다부인네들은 들고 있던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작은 탄성을 내뱉었지만 호기심 어린 눈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어때저게 바로 그 잭’ 의 시체인데.”


토니는 로키에게 속삭이며 말했다온 런던시내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칼잡이 잭의 시체였지만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는 단순한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았다이번에는 벌거벗은 남녀 열 쌍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이것이 오늘 연회의 진짜 백미였다살아있는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토니 스타크의 파티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었다.


자 여러분만찬을 즐깁시다!”


토니의 선언에 여기저기서 비릿한 피 냄새가 여기저기서 퍼져나갔다오 분 전만해도 따뜻하고 아름답던 연회장은 광기와 살육의 장으로 변해버렸다뱀파이어들은 각자 눈에 보이는 대로 이를 박고 피를 마셔댔다.  로키 또한 허기를 느꼈다눈앞에는 훌륭한 먹잇감이 제공되고 있었고 로키는 가서 구미에 맞는 음식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그러나 로키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로키!”


이때 상기 된 얼굴을 한 토르가 연회장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토르의 몸 여기저기에는 생채기가 나있었다분명히 저택을 지키는 문지기나 토르와 안면이 있는 뱀파이어와 다툰 흔적이 틀림없었다토르는 로키를 망토로 감싸 안아 재빠르게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

 


로키의 심기가 불편 한 것처럼 보였다흥미로운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었으리라고 토르는 미루어 짐작했다로키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그래서 책을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었다다 지난 일이 되었지만.

무엇이 되었든 토니 스타크는 로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자임에는 분명했다토르는 외투를 걸어두고 거울 앞에 서 있는 로키에게 다가갔다.


토르도 거울 속에 비쳐진 로키의 모습을 등 뒤에서 바라보았다그러나 거울 속에는 오직 토르 혼자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로키는 거울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토르는 로키를 돌려세워 로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로키가 여기 실제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하듯 꼼꼼하게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반듯한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다시 넘겨주었다토르의 손이 로키의 머리에서 귀로아직 다부지지 않은 턱으로 그리고 로키의 섬세한 입술을 스쳤다로키의 입술 사이로 감춰지지 않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흥분했다는 증거였다토르는 로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초록색 눈이 한층 더 짙게 보였다토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토르는 로키의 손을 잡고 간곡하게 청했다.


다시는 저런 것들과 어울리지 말아라.”


로키는 토르의 손을 매섭게 쳐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저런 것누구를 말하는 거지?”


로키의 반문에 토르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로키의 눈동자에서 조용히 타고 있는 분노를 읽어낼 수 있었다토르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길길이 날뛰었다.


뭔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그들과 나는 똑같아나도 똑같은 뱀파이어라고!”

아니로키너는 다르다!”


이번에는 로키가 아닌 토르가 분노했다토르의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그러나 토르의 분노에도 로키는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도리어 토르에게 다가가 자신과 다른 단단하고 너른 등에 뺨을 문질렀다로키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외롭고 외로운 걸나를 상대해주는 거라고는 형이 그렇게 싫어하는 토니 밖에 없어.”

하지만 그것이 어떤 눈으로 너를 보는 줄 알아?”

어차피 변태들이나 나랑 어울려주지그래 보여도 토니는 신사라고아직 나와 동침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어째서 너는!”


토르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반대로 로키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키들거리며 방안을 천천히 걸으며 우아한 손놀림으로 셔츠와 바지속옷을 하나씩 벗었다.


이십 년 전만해도 형과 나의 키는 별로 차이가 없었잖아아니 내가 조금 더 컸었어기억나?”


점점 드러나는 로키의 몸은 기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미성숙한 성기와 옅은 체모가느다랗고 곧게 뻗은 다리우아하게 균형 잡힌 몸을 가진 로키는 토니 스타크가 탐낼 만도 했다토르는 고개를 돌리지만 로키는 허락하지 않는다집요하게 쫓아와 토르의 얼굴을 자신을 향하게 만든다.


잘 봐그때와 난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여전히 어린애에 불과해쥐새끼 죽일 힘 하나 없어.”

내가 있잖느냐.”

토르나는 형제가 아니라 연인이 필요해나를 어른으로 대해 주고 만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해.”

차라리 네 또래의 여자를 만나는 건!”


로키는 모욕이라도 당한 것 같은 얼굴을 했다로키의 속눈썹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당장이라도 장갑을 내던지고 결투를 신청할 기세였다그러나 로키는 자신이 들 수 있을만한 검 따위는 없다는 것을 서글플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우스웠다 제 또래의 여자는 어떤 여자를 말하는 걸까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토르만이 모르고 있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형이야.”

너는 몹시 아팠고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내가 너를 죽게 내버려둘 리 없잖느냐.”


토르가 로키의 뺨을 감싸 쥐었다로키의 가슴 깊은 곳에서 원망과 분노가 말갛게 솟아올라왔다자신의 비참함이 가슴을 도려내듯 아픈 통증을 일으켰던 것이다처참하게 망가진 젊음욕망을 억누르며 보내야 했던 기나긴 나날들욕망의 좌절 끝에 오는 이 한없는 굴욕감.


위선자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


로키는 토르를 향해 주위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던져댔다토르는 씁쓸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로키는 힘없이 주저앉아 토르가 나간 문을 향해 외쳤다.


이십년이야 토르이십 년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그러나 나는 여전히 어린애일 뿐이잖아그것도 앞으로 영원히.”


 

* * *


 

로키는 과자부스러기와 설탕으로 손이 온통 끈적끈적해 질 때까지 과자를 실컷 먹었다토니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로키의 앞에 저택의 디저트는 모두 들고 왔다로키는 신경질이 났다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이었다.


로키가 이런 기분을 처음 느껴본 것은 아니었다어릴 적이면 로키는 토르가 돌아올 때까지 어둠이 드리워지는 문밖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그를 기다리고는 했다그가 가지고 온 피를 허겁지겁 삼키면 그는 서글프고 낯선 것을 바라보는 눈을 했다로키는 결국 찻잔 하나를 깼다.


로키는 무릎에 턱을 괴고 가만히 생각했다어쩌면 토니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토르에 대한 혐오를 연인에 대한 동경으로 착각했고 불타오르는 증오를 뜨거워지는 애정으로 오해했는지도 몰랐다그러나 여전히 폭풍은 휘몰아쳤고 정열은 타오를 대로 타올라 재가 되었지만 아무런 구원도 오지 않았다빛은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았기에 어디를 향해도 캄캄한 밤이었으므로 로키는 뼛속까지 스미는 무서운 추위 속에서 길을 잃은 채 갈 곳을 모르고 있었다토르의 품안에 안기면 텅 비고 야윈 가슴이 한결 넉넉해졌다로키의 세계에는 오로지 토르가 전부였다그것이 증오든 애정이든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토니는 저 우울한 얼굴을 한 대 쳐준다면 속이 시원하리라고 생각했다눈앞의 소년은 악마였다물론 저 작은 몸 어디 때릴 곳이 있겠느냐마는 때때로 답답하게 굴적마다 때려주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태생인 양 이것저것 요구하는 꼴이 밉지 않았다토니는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들어두고 죽어버린 녀석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작은 악마 같으니토니는 로키의 뺨에 입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시무룩해서야애인이 달아난다고.”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걸이런 비정상적인 몸.”


로키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작고 섬세한 손으로 앞섬을 풀어헤쳤다달빛에 비춰진 로키의 몸은 어린아이의 몸도 어른의 몸도 아니었다어른과 아이그 미묘한 경계에서 서 있었다그것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필요하다면 내가 위로해줄까?”


토니는 이 한없이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몸을 조심스럽게 쓸어 내렸다로키의 존재는 뱀파이어 세계에서도 희귀한 존재였다토니는 이 작고 어린 것에게 무한한 애정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토니는 다정하고 섬세하지만 뜨겁고 탐욕스러운 손길로 로키의 아랫배를 더듬었다그러나 여전히 로키의 눈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토니는 쓰게 웃으며 로키의 동그란 정수리에 입맞춤을 했다어린 것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달큰하고 비릿한 향이 토니의 정욕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는 로키의 뺨에 살짝 키스를 한번 한 뒤 물러났다.


여기까지왕자님이 공주님을 구하러 오는 소리가 들리는군.”


토니가 과장되게 손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로키 또한 토니가 칭하는 왕자가 누군지는 알았지만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고 말았다예상했던 일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안으로 토르가 뛰어 들어왔다.


로키!”


토니는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으면서 토르에게 다가갔다.


이런토르이게 얼마만이지?”


토르는 토니의 인사는 모두 무시한 채 로키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그런 토르를 보며 토니는 비웃음을 던지며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 말라고너의 공주님은 순결한 처녀니까당장이라도 유니콘을 타고 가실 정도라고아직까지는 말이야.”

닥쳐!”


핏발선 눈이 칼날처럼 번득였다토르는 분노하며 토니를 향해 단도를 휘둘렀다아슬아슬하게 토니는 몸을 피했지만 입고 있던 옷자락이 잘려나갔다토니는 아끼던 옷이 상한 것에 화를 냈다갈색 눈동자에 안광이 번뜩이고 입에서 순식간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인간주제에 감히로키만 아니었다면 당장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텐데!”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둘 사이에 로키가 조용하게 걸어 나와 둘을 가로막았다.


토르돌아가자.”


로키의 한마디에 토르는 곧바로 토니를 향한 적개심을 버리고 로키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토르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로키의 작고 부드러운 발에 쪽빛 덧버선을 신겨주었다로키는 의자에 앉아 자연스럽게 토르의 시중을 받았다.


처음과 다름없는 완벽한 복장이 된 로키가 토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토르는 로키를 안아들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마치 둘 이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구는 모습을 바라보며 토니는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 * *



 

토르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토니 스타크의 앞에 알몸으로 선 로키를 본 순간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위안에 대한 갈구이자 저속함에 대한 갈구로키를 영원히 소유 하고 싶은 갈망과 동시에 한순간의 쾌락에 대한 갈증들이 뒤섞여 자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토르는 그전까지만 해도 구체화 되지 않은 감정 덩어리가 어느새 자신의 형상을 하고 제 안에 들어앉았음을 깨달았다그것을 부정할수록 점점 제 목줄을 옭아맬 것이었다이 감정에는 어떤 날카롭고 위험한 것이 숨어 있었다그것을 눈치 채고 달아나려고 했지만 결국 뒷덜미를 채여 허우적 되었다그것은 우연이었거나 혹은 필연이었을지 모르겠다그러나 운명은 거부 할 수 없기에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 이었다토르는 결국 그 운명에 굴복했다.


토르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로키를 끌어안아 입을 맞추었다토르가 로키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자 로키의 입술이 떨렸다오래도록 지속되어온 관능의 부재에 로키의 몸은 경직되어있었다그런 로키가 토르는 너무나 사랑스러워 우습게도 토르 또한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로키의 모든 것이 토르의 눈에는 한없이 매력적으로 보였다달빛을 받아 방안의 모든 것들이 순백색으로 빛났고 토르의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감동이 일었다.


토르는 로키의 목덜미를 이로 물었다가 입술로 가볍게 그 자리를 더듬었다로키도 열정적으로 그에 응하기 시작했다로키는 몸을 떨고 있었다토르는 로키를 두 팔로 끌어안고 그의 두 귀에 입을 맞추었다부드럽고 따뜻한 입맞춤이었다로키를 바닥 위에 눕힌 채 작고 부드러운 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러다가 로키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고 그의 입언저리에도 입을 맞추었다.


가지런한 이빨들과 날카로운 송곳니도 핥아주었다로키가 엉겁결에 토르의 혀를 살짝 깨물었다가 자신이 흥분했던 것을 아는지 새된 소리로 웃었다토르 역시 로키의 온몸을 구석구석 핥았다.

위험하고도 미래가 없는 초로의 욕정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토르에게 로키는 마치 매혹적인 괴물 같았다아니자신을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괴물이었다그러나 누가 괴물인 것일까그를 탐하는 자신인가 아니면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로키인가토르는 알 수 없었다.

 


*

 


로키는 어젯밤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기억들을 더듬어보았다몸의 깊은 곳까지 휘저어진 것 같은 달콤한 나른함희미한 위화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서서히 해가 뜨고 있었다로키는 잠든 토르의 등을 바라보며 곁에 앉아 있었다마치 연인 같다라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왔다로키는 토르를 부드럽게 깨웠다이제 단 한 가지의 소원만 이루어지면 되었다.


이제 내 피를 마셔줘.”


로키가 토르의 옷가지 사이에서 단도를 꺼내들어 자신의 손목을 있는 힘껏 그었다로키의 가녀린 손목을 타고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키!”


토르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지만 로키의 얼굴은 평온했다로키는 순식간에 아물어가는 상처를 들여다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거 보여토르형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어.”


로키는 팔을 들어 토르에게 들이밀었다로키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러니 마셔그리고 나와 함께 해줘.”


토르가 자신과 같은 뱀파이어가 되는 것 그것이 로키의 유일한 소망이었다그렇게만 된다면 어쩌면 로키는 이제는 더 이상 토르를 미워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그러나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No, Loki. no…….”


토르는 자신은 이미 너무 멀리까지 왔다는 것을 알았다로키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할 수 있었고 그와 함께 잠을 잘 수도 있었다그러나 뱀파이어가 되는 것만은 할 수 없었다토르의 단호한 말에 로키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로키의 뺨 위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너는 점점 죽어가고 있잖아그리고 곧 죽겠지그러면 누가 나의 갈증을 달래주지누가 나의 악몽을 물리쳐주지누가 나와 함께 있어주지?”


로키의 말이 옳았다토르는 점점 나이를 먹었고 로키는 언제까지나 무력하고 어린아이로 남아있을 것이었다그러나 토르는 그런 로키의 외침을 들어주지 않았다.


잔인해형은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야얼마나 나를 외롭게 만들어야 만족하겠어?”


로키는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며 몸을 떨었다토르는 로키를 진정시키려 다가가 어깨를 끌어안았다.


로키…….”


토르는 뱃가죽이 화끈해지는 고통을 느꼈다단도는 작았지만 날이 벼려있어 그 날카로움은 토르의 내장까지 헤집어 놓을 수 있었다그것을 누구보다도 토르는 잘 알고 있었다토르는 천천히 로키에게 떨어졌다배에 꽂힌 칼을 잡아 뽑았다.


맑은 쇳소리를 내며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날이 선 단도의 끝에는 피가 묻어있었다토르가 애써 상처를 막아보지만 손 틈새로 흘러나오는 피를 막을 수 없었다토르의 무릎이 꺾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로키는 점점 아물어가는 상처를 쓰러진 토르의 입으로 들이밀었다.


어서 마셔이 피를 마시면 살 수 있어영원히둘이 함께야.”


영생이 약속 된 붉은 피였다피에서 사과 향이 났다이브를 유혹하고 아담을 타락하게 만든 금단의 과실과 꼭 같은 향이었다토르는 이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저 피를 마시면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까무룩 해지는 시선 끝에 이십 년 전과 다름없는 얼굴을 한 자신의 어린 동생이 있었다소년으로 있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내가..못했다로키.”


토르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토르의 뜨거운 피가 로키의 발등을 적셨다토르의 체온이 점점 로키와 닮아갔다.


토르!”

나를 용서해주렴.”


로키는 피에 젖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 위를 덧대어 발랐다로키는 피처럼 붉은 입술로 토르의 입술을 천천히 마주했다입을 다문 채입술 그대로 오래도록 이어지는 그 순결한 입맞춤서로의 입술이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인 감각을 나누며 하나하나 헤아려 보는 시간이 로키는 황홀하도록 좋았다그러나 토르의 입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로키는 울음에 번지는 말로 토르를 저주했다.


나는 너를 증오해.”

'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팁로키] The deep BLUE sea 上  (0) 2018.06.06
[콜슨&로키] mood in Indigo  (0) 2018.05.14
[호크로키/바튼로키]purple Rain  (0) 2018.05.07
[스팁로키] 모순 3  (0) 2018.02.28
[스팁로키] 모순 2  (0) 2018.02.28
Posted by 우훗우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