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도에 발행했던 토르로키 단편 회지
뱀파이어AU
blood
(Thor X Loki)
지옥은 당신의 오른편에 있다. 런던은 위대한 도시였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그 이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마들이 살 것 같은 빈민가처럼 충격적인 장소들도 함께 존재했다. 거리는 더러운 것들로 뒤덮여있으며 평생 한 번도 머리를 빗어 본 적 없는 추악한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니 도시의 동쪽 끝에 무엇이 있는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런던의 동쪽 끝에 있는 화이트 채플 가(White chapel Street)는 런던의 뒷모습 가운데서도 단연 지옥과 닮은 곳이었다. 골목마다 매음굴에서 새어 나오는 아편연기로 자욱했다. 창녀들은 밤안개를 베일처럼 두르고 산책로에 서서 치마를 펄럭이며 남자들을 유혹했다. 때때로 사교계에도 데뷔하지 못한 미숙하고 어리석은 청년, 혹은 군에서 막 제대해 세상물정 모르는 장교가 멋모르고 저속한 만남에 끌려들어가 타락한 향락에 속절없이 중독되기도 했다. 가장 점잖은 신사라도 오페라 무대의 뒤편을 기웃거리며 여배우의 대기실을 꽃과 보석으로 장식해 구애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였다. 19세기의 런던은 아름다웠지만 죄악이 몸을 숨기고 언제든지 덮칠 준비를 하고 있는 곳이었다. 지옥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
이사벨은 도시의 밤을 헤치며 걸었다. 마차의 등불들이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밤의 거리는 어둠보다 은밀하며 죄악보다 복잡한 곳이었다. 거리는 낮의 흥겨움을 잊어버리고 아예 새로운 장소로 탈바꿈했다. 가스등은 꺼진 지 오래였다. 진한 어둠이 주변을 삼킨 채 뱀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이사벨은 처음 보는 도시의 이면에 두려움에 떨며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단언컨대 이사벨은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숙녀였다. 그녀의 어린 동생 안젤라가 아프지만 않았더라도 그녀가 이 야심한 시간에 일어날 일도, 사창가 뒷골목에 올 일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오늘 내내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던 안젤라는 결국 입에서 피를 쏟아냈다. 어쩌면 결핵일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사벨은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최근 주변에서 떠돌고 있는 괴기한 소문 때문인지 거리는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살인마 잭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잭은 이미 일주일 전 체포당해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호사가들은 죽은 살인마에 대해서 더 이상 입을 놀리지 않았다. 이제 런던은 새로운 살인마에 대한 소문으로 들끓었다. 관을 끌고 다니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가장 깊고 어두운 밤, 달빛도 비추지 않는 밤이면 집채만 한 덩치의 남자가 쇠사슬을 감은 관을 끌며 관에 넣을 산 자를 찾아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했다. 소문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이사벨의 등 뒤로 무서운 예감이 차갑게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망토를 더욱 단단히 여민 뒤 거리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이제 이 골목만 돌면 창녀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의사의 집이 나왔다. 이사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때 누군가에 의해서 이사벨은 맥없이 골목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갔다. 골목 안에서 이사벨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사벨은 알지 못했지만 이 근방에서도 행동거지가 거칠기로 소문난 자들이었다.
“아가씨는 하룻밤에 얼마야?”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무리 중 한명이 이사벨의 손등에 입술을 비볐다. 사내에게서 악취가 풍겼다.
“사, 살려주세요.”
“아니 우리가 아가씨를 죽인다고 했나. 그냥 좀 즐기자는 거지.”
“이 시간에 나다니는 걸 보니까 꽤나 밝히는 아가씨 아니겠어? 안 그래?”
사내들이 저들끼리 웃고 떠드는 사이 이사벨이 황급히 몸을 틀어 밖을 향해 소리 쳤다.
“도와주세요! 누가 좀……!”
그러나 무리 중 한 명이 거칠게 손을 휘둘러 이사벨의 뺨을 쳤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맺어지지 못했다.
“씨발년. 거 말 한번 많네.”
그가 침을 뱉으며 욕을 했다. 사내들의 거침없는 빈정거림과 모욕에 이사벨은 턱을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등 뒤로 차갑고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가장 키가 큰 사내가 이사벨의 희고 가는 목덜미를 혀로 핥으며 치마를 거칠게 헤집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먼 곳에서 빅벤의 종소리가 울렸다.
지이익-
종소리 사이로 무언가를 끄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기이한 소리와 함께 금발의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의 사내는 무심한 얼굴로 걸어 들어와 이사벨의 치마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자의 뒤에서 팔목을 잡아 비틀어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악!”
“시발. 저, 저거 뭐야! 이 새끼야! 너 누구야!”
자존심이 상한 사내들이 소리를 지르며 남자를 향해 몸을 던졌지만 남자는 별 말없이 차례대로 사내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 몸놀림이 너무도 빨라 사람 같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기세좋게 달려들던 그들은 금발의 남자에게 속절없이 당했다. 남자는 달려드는 사내들의 머리통을 커다란 손으로 갈겨 땅바닥 위에 나뒹굴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절룩거리는 다리와 부러진 코를 움켜쥔 무리들이 결국 꽁무니를 뺐다. 남자가 그들을 물리치는데 걸린 시간은 열두 번의 종소리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벨은 순결한 처녀답게 뺨을 물들이며 자신을 도와준 남자를 향해 수줍게 감사인사를 했다. 남자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배고파, 토르.”
이때 남자의 뒤에서 한 소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사벨은 깜짝 놀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안젤라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소년은 마치 어둠으로 빚어낸 것 같았다. 창백한 피부와 그와 대조되는 까만 머리카락까지. 소년의 외모는 예술가가 정성을 기울여 만든 도자기 인형과 같은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어린아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법한 순진함과 사랑스러운 무지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사벨은 소년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기보다 한 뼘은 작은 어린아이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포는 아주 거대해 그녀를 집어 삼켰다. 어쩌면 좀 전의 사내들과 마주한 것이 더 안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년은 두려움에 떠는 이사벨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왔다. 소년의 녹색 눈이 기이한 빛을 냈다.
“나, 이 여자가 먹고 싶어.”
소년의 흰 손이 이사벨을 향해 뻗어왔다. 그녀는 피할 수 없었다. 고양이 앞에 놓인 쥐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서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녀의 몸에 남자의 손이 닿았다. 남자는 이사벨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하오.”
그것이 이사벨이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우드득, 머리가 기괴하게 틀어진 그녀의 몸이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이상하게도 이사벨은 남자에게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죽음이 너무 순식간이었기도 했지만 그 순간 마주친 남자의 눈동자를 보며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수긍했다. 다만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동생, 안젤라가 걱정이 될 뿐이었다.
*
소년은 무언가 성에 차지 않는 듯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토르! 토르!”
그 모습은 영락없이 떼를 쓰는 어린아이였다.
“너 그 계집이 맘에 들었구나! 그렇지? 그래서 그렇게 단번에 고통 없이 죽인거지? 그런 거지?”
토르라고 불린 남자는 답이 없었다. 그 침묵이 더욱 소년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소년은 쓰러져 있는 이사벨의 가냘픈 몸을 걷어찼다. 소년이 힘껏 걷어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체는 몇 번 들썩이고 말 뿐이었다. 토르는 소년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가녀린 어깨가 위 아래로 거칠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로키.”
“너의 고귀한 연인에게 이런 대우는 부당하다고 느끼는 거야?”
로키의 비아냥거림에도 토르는 침묵을 지킨 채 품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날이 선 단도가 달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토르는 익숙한 솜씨로 이사벨의 가슴을 갈랐다. 토르는 무릎을 꿇고 벌어진 사이로 두 손을 밀어 넣었다. 토르의 손 가득 순결한 처녀의 피가 담겼다. 토르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로키를 향해 말했다.
“피가 식어간다. 부패하기 전에 어서 마셔.”
그러나 로키는 고개를 돌린 채 샐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년의 피 따위는 마시지 않겠어.”
“자. 어서.”
토르는 로키의 코앞으로 손을 가져갔다. 로키의 코에 향긋한 처녀의 피 냄새가 스쳤다. 로키는 자신의 입술을 진주 같은 송곳니로 짓이겼다. 창백했던 입술이 금세 붉게 변했다. 결국 로키는 어리광을 부리듯 토르의 손목에 매달려 정신없이 피를 핥아 마셨다. 붉은 죄악의 증거가 로키의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 * *
토르는 동이 터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으로 비쳐 드는 희끄무레한 빛은 물결처럼 출렁거리며 서서히 엷어져 갔다. 오늘따라 더욱 몸이 꽁꽁 묶인 채 캄캄한 바다 속으로 가라앉듯, 어둠 속으로 잦아드는 느낌이었다. 난로의 불은 꺼진지 오래였고 시계소리만 들렸다. 토르는 의자에 기대앉아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토르는 점점 나쁜 일에 무디어져갔지만 오늘 밤 같은 일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특히 그녀는 자신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토르는 방안 구석에 놓인 관을 바라보았다. 목단나무로 만들어졌고 뚜껑 위에는 십자가 모양이 새겨져 있는 평범한 관이었지만 사실 보통의 관과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그것은 크기였다. 관의 크기가 보통 관의 반만 했다. 아이를 위한 관이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관을 만드는 것은 간단했다. 보통의 관을 만든 뒤 반으로 자르는 것이 방법의 전부였다. 물론 이런 관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런던에서는 아이들이 죽으면 대부분 맨몸으로 땅에 묻혔다. 아이를 위한 관을 만들기에는 날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죽어나갔다. 하지만 토르는 로키의 육신을 벌레들에게 먹히게 내버려둘 수 없었기에 로키를 위해 특별히 주문한 관이었다.
그러나 이 관이 땅에 묻힌 적은 없었다. 토르는 로키가 죽었던, 이십 년 전의 그 날을 기억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 순간부터 이 모든 절망과 공허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 * *
이십 년 전, 런던에는 또 다른 전염병이 돌았다. 이로 인해 도시 인구 오분의 일이 죽어 나갔다. 로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로키는 무척이나 아팠다. 토르는 어린 동생의 숨결이 점점 미약해지는 것을 알았다. 백방으로 알아봤으나 만나는 의사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로키를 낳으며 돌아가셨고 불과 삼 년 전에 토르는 아버지를 잃었었다. 로키는 토르에게 하나 남은 가족이었다. 토르는 로키마저 잃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약을 구하러 토르가 집을 비운 사이 로키는 죽음과 조우했다. 집으로 돌아온 토르를 기다린 것은 죽음의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는 로키였다. 움푹 팬 뺨과 창백하고 움직임 없는 얼굴. 조그맣고 섬약한 모습의 로키를 보며 토르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토르는 로키를 끌어안고 뻣뻣해지기 시작한 손발을 어루만졌다. 토르는 품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내어 로키의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런던의 뒷골목에서 구한 뱀파이어의 피였다. 혹시나 싶어서 집어온 것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로키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토르는 마지막으로 이 수상한 피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미처 삼키지 못한 피가 로키의 입가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토르는 그것들을 모아 다시 억지로 로키의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덕분이었는지 로키의 심장이 잠시 멈추기는 했지만 로키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로키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순간이었다. 그날을 경계로 로키는 점점 야위어만 갔다. 분명 병은 모두 나았건만 음식을 입에 넣는 족족 게워냈고 종내에는 그렇게 좋아하던 호밀 빵의 냄새조차 질색했다. 낮 동안이면 깊은 잠에 빠졌다가 밤이면 몽유병 환자처럼 밖을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 토르는 그런 로키를 보며 걱정했다.
두 뺨은 점차 창백해지고 검은 머리, 커다란 두 눈, 곧은 콧날, 작은 새와 같던 걸음걸이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던 로키는 다 사라지고 침묵에 잠겨 있는 모습은 마치 어떠한 숭고한 숙명에 의해 알 수 없는 표식을 이마에 새겨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것은 너무나도 슬프고 차분하고 동시에 너무나도 부드럽고 또 안타까웠기 때문에 로키의 곁에 가까이 가는 사람은 겨울에 핀 꽃향기에 몸이 떨리듯 어떤 기괴한 매력에 사로잡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때문에 많은 이들이 로키의 매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로키는 조금씩 탐욕과 분노와 증오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정숙해 보이는 입술은 마음의 고뇌를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로키 스스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사건은 일어나게 마련이었다. 토르는 그 날을 잊지 못했다. 사라진 로키를 찾은 곳은 이웃의 정원에서였다. 로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곁에는 바지춤을 채 추스르지 못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토르는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욕정적인 눈으로 로키를 훔쳐보던 이웃집 남자였다. 남자의 목덜미는 짐승에게 물린 듯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토르는 황급히 다가가 자신의 셔츠로 로키의 얼굴을 닦아 냈다.그리고 로키에게 무슨 상처가 난 것이 아닌지를 확인했다. 몇 군데 옆집남자에게 입은 듯 생채기가 있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형. 나 더 먹고 싶어.”
로키가 입맛을 다시며 토르에게 칭얼거렸다. 로키의 얼굴에서 죄의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배고픔에 허덕이던 로키의 얼굴이 포만감으로 빛이 났다. 그 모습은 마치 인간이 소와 양을 죽일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생존을 위한 살해는 죄책감을 요구하지 않았다. 토르는 자신이 가지고 온 약이 진짜 뱀파이어 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로키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다.
토르는 로키가 다치지 않은 것이, 그리고 이들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로키에게 해를 입히려고 했던 나쁜 놈이 죽는 것이었다. 자신의 동생은 죄가 없었다. 토르는 정원 한켠에 있던 돌덩이를 주워들었다.
“사, 살려…….”
남자가 바짓단을 붙들고 애원했다. 토르는 눈을 감고 남자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꿈틀거리던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로키는 남자의 으깨어진 머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뒷목에 이를 박아 넣은 뒤 허겁지겁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토르의 눈시울이 촉촉이 젖는가 싶더니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
로키에게 있어서 그날은 토르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본 날이자 마지막 날이었다. 로키는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토르의 눈물을 모두 받아내기에는 자신의 손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결국 로키는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 * *
살롱에 들어서자 꽃향기와 고기 냄새, 송로의 향기가 뒤섞인 따뜻한 공기에 감싸이는 것을 로키는 느꼈다. 촛대 위의 촛불들이 종 모양 은제 덮개 위에서 불꽃을 피워 올리고, 증기가 뽀얗게 낀 커트글라스들이 서로 창백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색색의 꽃다발들은 식탁의 끝에서 끝까지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훌륭한 연회장이 그러하듯 한쪽 구석에 놓인 카드놀이 테이블 위로 금화가 쏟아지는 맑은 소리가 들려오고 부인들의 부풀어 오른 스커트가 서로 스쳐지나가며 부채 너머로 상대를 흘깃거렸다.
열아홉 살부터 마흔 살 안팎의 남녀들이 춤추는 사람들 속에 섞이기도 하고 서로 담소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들의 나이, 옷차림, 얼굴 모습은 각각 달라도 어딘가 서로 공통된 데가 있었다. 그들은 외양은 젊었지만 어딘가 노숙한 격조가 느껴졌다. 눈빛에는 날마다 정념을 만족시킨 데서 오는 고요함이 감돌았고, 부드러운 거동 뒤에는 특유의 욕망이 엿보였다. 큼직하게 이니셜을 수놓은 손수건으로 입을 훔칠 때면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들은 종종 파티를 열어 교류했다. 겉모습은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인간처럼 구는 것을 유희로 삼았다. 인간이었던 때를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때때로 그들은 인간들보다 욕망에 대해 솔직하게 굴었다.
육체의 뜨거운 흥분과 애정으로 가득한 거대한 발코니와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고 각양각색의 희귀한 꽃으로 가득한 바구니, 연인들의 밀회를 위해 비단 장막이 드리워진 규방. 이 모든 것들이 토니 스타크의 저택을 상징해주고 있음과 동시에 뱀파이어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었다.
로키는 오케스트라의 리듬에 몸을 싣고 가볍게 움직이면서 앞으로 미끄러져나갔다. 때때로 다른 악기들이 잠잠해진 사이에 혼자 연주되는 바이올린의 미묘한 선율을 들을 때면 로키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로키의 미소를 이 만찬의 주인인 토니 스타크가 긴 식탁의 상석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런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풍문에 따르면 그는 여왕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영 틀린 말이 아니었는지 오늘의 연회는 무척 화려했다.
이윽고 준비된 만찬이 나오기 시작했다. 토니 스타크의 명성에 맞게 파티는 화려했다. 스페인산 포도주가 잔뜩 나오고 새우와 아몬드 즙이 든 수프, 파인애플이나 석류 같은 진귀한 과일들, 트라팔가르 푸딩 그리고 온갖 종류의 고기들이 쟁반에 담겨 나오기 시작했다. 화려하고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스타크답게 공작고기까지 준비가 되어있었다.
로키는 토니의 악취미라며 혀를 차며 마라스키노 술이 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진짜 진주가 박혀있는 조개모양의 접시를 손에 들고 숟가락을 입에 넣은 채 눈을 반쯤 감았다.
“아직 술은 좀 이른 나이가 아니던가?”
토니 스타크가 등 뒤에서 나와 로키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자신의 엄지로 닦아낸 뒤 입에 넣고 소리 나도록 빨았다.
“음, 달군.”
토니는 로키를 향해 명백히 유혹적인 동작을 해보였지만 로키는 영리하게도 그 이면에 자신의 어린애 취향의 입맛에 대해 놀리는 토니의 심중을 알아채고는 별다른 반응 없이 재빨리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아내었다. 그조차 토니의 눈에는 귀엽게 보였다.
“여기는 혼자 온 건가? 보호자 없이?”
“그럼 내가 누구와 함께 와야 하지?”
로키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토니는 예상대로 날을 세우는 로키의 반응에 속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로키에게 거짓 용서를 구했다.
“사과의 의미로 재밌는 걸 보여주지.”
토니가 손가락을 튕기자 제복을 갖춰 입은 급사들이 은쟁반을 하나씩 들고 나왔다. 그 위에는 혀를 빼물고 죽은 자들의 목이 하나씩 담겨있었다. 부인네들은 들고 있던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작은 탄성을 내뱉었지만 호기심 어린 눈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어때? 저게 바로 ‘그 잭’ 의 시체인데.”
토니는 로키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온 런던시내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칼잡이 잭의 시체였지만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는 단순한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벌거벗은 남녀 열 쌍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것이 오늘 연회의 진짜 백미였다. 살아있는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토니 스타크의 파티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었다.
“자 여러분. 만찬을 즐깁시다!”
토니의 선언에 여기저기서 비릿한 피 냄새가 여기저기서 퍼져나갔다. 오 분 전만해도 따뜻하고 아름답던 연회장은 광기와 살육의 장으로 변해버렸다. 뱀파이어들은 각자 눈에 보이는 대로 이를 박고 피를 마셔댔다. 로키 또한 허기를 느꼈다. 눈앞에는 훌륭한 먹잇감이 제공되고 있었고 로키는 가서 구미에 맞는 음식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로키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로키!”
이때 상기 된 얼굴을 한 토르가 연회장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토르의 몸 여기저기에는 생채기가 나있었다. 분명히 저택을 지키는 문지기나 토르와 안면이 있는 뱀파이어와 다툰 흔적이 틀림없었다. 토르는 로키를 망토로 감싸 안아 재빠르게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
로키의 심기가 불편 한 것처럼 보였다. 흥미로운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었으리라고 토르는 미루어 짐작했다. 로키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었다. 다 지난 일이 되었지만.
무엇이 되었든 토니 스타크는 로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자임에는 분명했다. 토르는 외투를 걸어두고 거울 앞에 서 있는 로키에게 다가갔다.
토르도 거울 속에 비쳐진 로키의 모습을 등 뒤에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울 속에는 오직 토르 혼자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로키는 거울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토르는 로키를 돌려세워 로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로키가 여기 실제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하듯 꼼꼼하게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반듯한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다시 넘겨주었다. 토르의 손이 로키의 머리에서 귀로, 아직 다부지지 않은 턱으로 그리고 로키의 섬세한 입술을 스쳤다. 로키의 입술 사이로 감춰지지 않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흥분했다는 증거였다. 토르는 로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초록색 눈이 한층 더 짙게 보였다. 토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토르는 로키의 손을 잡고 간곡하게 청했다.
“다시는 저런 것들과 어울리지 말아라.”
로키는 토르의 손을 매섭게 쳐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저런 것? 누구를 말하는 거지?”
로키의 반문에 토르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로키의 눈동자에서 조용히 타고 있는 분노를 읽어낼 수 있었다. 토르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길길이 날뛰었다.
“뭔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그들과 나는 똑같아. 나도 똑같은 뱀파이어라고!”
“아니! 로키, 너는 다르다!”
이번에는 로키가 아닌 토르가 분노했다. 토르의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토르의 분노에도 로키는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 도리어 토르에게 다가가 자신과 다른 단단하고 너른 등에 뺨을 문질렀다. 로키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외롭고 외로운 걸? 나를 상대해주는 거라고는 형이 그렇게 싫어하는 토니 밖에 없어.”
“하지만 그것이 어떤 눈으로 너를 보는 줄 알아?”
“어차피 변태들이나 나랑 어울려주지. 그래 보여도 토니는 신사라고. 아직 나와 동침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어째서 너는!”
토르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반대로 로키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키들거리며 방안을 천천히 걸으며 우아한 손놀림으로 셔츠와 바지, 속옷을 하나씩 벗었다.
“이십 년 전만해도 형과 나의 키는 별로 차이가 없었잖아. 아니 내가 조금 더 컸었어. 기억나?”
점점 드러나는 로키의 몸은 기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미성숙한 성기와 옅은 체모. 가느다랗고 곧게 뻗은 다리, 우아하게 균형 잡힌 몸을 가진 로키는 토니 스타크가 탐낼 만도 했다. 토르는 고개를 돌리지만 로키는 허락하지 않는다. 집요하게 쫓아와 토르의 얼굴을 자신을 향하게 만든다.
“잘 봐. 그때와 난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여전히 어린애에 불과해. 쥐새끼 죽일 힘 하나 없어.”
“내가 있잖느냐.”
“토르. 나는 형제가 아니라 연인이 필요해. 나를 어른으로 대해 주고 만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해.”
“차라리 네 또래의 여자를 만나는 건!”
로키는 모욕이라도 당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로키의 속눈썹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장갑을 내던지고 결투를 신청할 기세였다. 그러나 로키는 자신이 들 수 있을만한 검 따위는 없다는 것을 서글플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우스웠다 제 또래의 여자는 어떤 여자를 말하는 걸까. 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토르만이 모르고 있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형이야.”
“…너는 몹시 아팠고.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내가 너를 죽게 내버려둘 리 없잖느냐.”
토르가 로키의 뺨을 감싸 쥐었다. 로키의 가슴 깊은 곳에서 원망과 분노가 말갛게 솟아올라왔다. 자신의 비참함이 가슴을 도려내듯 아픈 통증을 일으켰던 것이다. 처참하게 망가진 젊음, 욕망을 억누르며 보내야 했던 기나긴 나날들, 욕망의 좌절 끝에 오는 이 한없는 굴욕감.
“위선자!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
로키는 토르를 향해 주위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던져댔다. 토르는 씁쓸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 로키는 힘없이 주저앉아 토르가 나간 문을 향해 외쳤다.
“이십년이야 토르. 이십 년.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그러나 나는 여전히 어린애일 뿐이잖아. 그것도 앞으로 영원히.”
* * *
로키는 과자부스러기와 설탕으로 손이 온통 끈적끈적해 질 때까지 과자를 실컷 먹었다. 토니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로키의 앞에 저택의 디저트는 모두 들고 왔다. 로키는 신경질이 났다.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이었다.
로키가 이런 기분을 처음 느껴본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이면 로키는 토르가 돌아올 때까지 어둠이 드리워지는 문밖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그를 기다리고는 했다. 그가 가지고 온 피를 허겁지겁 삼키면 그는 서글프고 낯선 것을 바라보는 눈을 했다. 로키는 결국 찻잔 하나를 깼다.
로키는 무릎에 턱을 괴고 가만히 생각했다. 어쩌면 토니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토르에 대한 혐오를 연인에 대한 동경으로 착각했고 불타오르는 증오를 뜨거워지는 애정으로 오해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전히 폭풍은 휘몰아쳤고 정열은 타오를 대로 타올라 재가 되었지만 아무런 구원도 오지 않았다. 빛은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았기에 어디를 향해도 캄캄한 밤이었으므로 로키는 뼛속까지 스미는 무서운 추위 속에서 길을 잃은 채 갈 곳을 모르고 있었다. 토르의 품안에 안기면 텅 비고 야윈 가슴이 한결 넉넉해졌다. 로키의 세계에는 오로지 토르가 전부였다. 그것이 증오든 애정이든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토니는 저 우울한 얼굴을 한 대 쳐준다면 속이 시원하리라고 생각했다. 눈앞의 소년은 악마였다. 물론 저 작은 몸 어디 때릴 곳이 있겠느냐마는 때때로 답답하게 굴적마다 때려주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태생인 양 이것저것 요구하는 꼴이 밉지 않았다. 토니는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들어두고 죽어버린 녀석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작은 악마 같으니. 토니는 로키의 뺨에 입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시무룩해서야. 애인이 달아난다고.”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걸. 이런 비정상적인 몸.”
로키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작고 섬세한 손으로 앞섬을 풀어헤쳤다. 달빛에 비춰진 로키의 몸은 어린아이의 몸도 어른의 몸도 아니었다. 어른과 아이, 그 미묘한 경계에서 서 있었다. 그것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필요하다면 내가 위로해줄까?”
토니는 이 한없이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몸을 조심스럽게 쓸어 내렸다. 로키의 존재는 뱀파이어 세계에서도 희귀한 존재였다. 토니는 이 작고 어린 것에게 무한한 애정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토니는 다정하고 섬세하지만 뜨겁고 탐욕스러운 손길로 로키의 아랫배를 더듬었다. 그러나 여전히 로키의 눈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토니는 쓰게 웃으며 로키의 동그란 정수리에 입맞춤을 했다. 어린 것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달큰하고 비릿한 향이 토니의 정욕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는 로키의 뺨에 살짝 키스를 한번 한 뒤 물러났다.
“여기까지. 왕자님이 공주님을 구하러 오는 소리가 들리는군.”
토니가 과장되게 손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로키 또한 토니가 칭하는 왕자가 누군지는 알았지만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고 말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안으로 토르가 뛰어 들어왔다.
“로키!”
토니는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으면서 토르에게 다가갔다.
“이런. 토르. 이게 얼마만이지?”
토르는 토니의 인사는 모두 무시한 채 로키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 토르를 보며 토니는 비웃음을 던지며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 말라고. 너의 공주님은 순결한 처녀니까. 당장이라도 유니콘을 타고 가실 정도라고. 아직까지는 말이야.”
“닥쳐!”
핏발선 눈이 칼날처럼 번득였다. 토르는 분노하며 토니를 향해 단도를 휘둘렀다. 아슬아슬하게 토니는 몸을 피했지만 입고 있던 옷자락이 잘려나갔다. 토니는 아끼던 옷이 상한 것에 화를 냈다. 갈색 눈동자에 안광이 번뜩이고 입에서 순식간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인간주제에 감히! 로키만 아니었다면 당장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텐데!”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둘 사이에 로키가 조용하게 걸어 나와 둘을 가로막았다.
“토르. 돌아가자.”
로키의 한마디에 토르는 곧바로 토니를 향한 적개심을 버리고 로키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토르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로키의 작고 부드러운 발에 쪽빛 덧버선을 신겨주었다. 로키는 의자에 앉아 자연스럽게 토르의 시중을 받았다.
처음과 다름없는 완벽한 복장이 된 로키가 토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토르는 로키를 안아들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마치 둘 이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구는 모습을 바라보며 토니는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 * *
토르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토니 스타크의 앞에 알몸으로 선 로키를 본 순간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 위안에 대한 갈구이자 저속함에 대한 갈구, 로키를 영원히 소유 하고 싶은 갈망과 동시에 한순간의 쾌락에 대한 갈증들이 뒤섞여 자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토르는 그전까지만 해도 구체화 되지 않은 감정 덩어리가 어느새 자신의 형상을 하고 제 안에 들어앉았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부정할수록 점점 제 목줄을 옭아맬 것이었다. 이 감정에는 어떤 날카롭고 위험한 것이 숨어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채고 달아나려고 했지만 결국 뒷덜미를 채여 허우적 되었다. 그것은 우연이었거나 혹은 필연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운명은 거부 할 수 없기에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 이었다. 토르는 결국 그 운명에 굴복했다.
토르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로키를 끌어안아 입을 맞추었다. 토르가 로키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자 로키의 입술이 떨렸다.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관능의 부재에 로키의 몸은 경직되어있었다. 그런 로키가 토르는 너무나 사랑스러워 우습게도 토르 또한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키의 모든 것이 토르의 눈에는 한없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달빛을 받아 방안의 모든 것들이 순백색으로 빛났고 토르의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감동이 일었다.
토르는 로키의 목덜미를 이로 물었다가 입술로 가볍게 그 자리를 더듬었다. 로키도 열정적으로 그에 응하기 시작했다. 로키는 몸을 떨고 있었다. 토르는 로키를 두 팔로 끌어안고 그의 두 귀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맞춤이었다. 로키를 바닥 위에 눕힌 채 작고 부드러운 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로키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고 그의 입언저리에도 입을 맞추었다.
가지런한 이빨들과 날카로운 송곳니도 핥아주었다. 로키가 엉겁결에 토르의 혀를 살짝 깨물었다가 자신이 흥분했던 것을 아는지 새된 소리로 웃었다. 토르 역시 로키의 온몸을 구석구석 핥았다.
위험하고도 미래가 없는 초로의 욕정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 토르에게 로키는 마치 매혹적인 괴물 같았다. 아니,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괴물이었다. 그러나 누가 괴물인 것일까. 그를 탐하는 자신인가 아니면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로키인가. 토르는 알 수 없었다.
*
로키는 어젯밤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기억들을 더듬어보았다. 몸의 깊은 곳까지 휘저어진 것 같은 달콤한 나른함. 희미한 위화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서서히 해가 뜨고 있었다. 로키는 잠든 토르의 등을 바라보며 곁에 앉아 있었다. 마치 연인 같다. 라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왔다. 로키는 토르를 부드럽게 깨웠다. 이제 단 한 가지의 소원만 이루어지면 되었다.
“이제 내 피를 마셔줘.”
로키가 토르의 옷가지 사이에서 단도를 꺼내들어 자신의 손목을 있는 힘껏 그었다. 로키의 가녀린 손목을 타고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키!”
토르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지만 로키의 얼굴은 평온했다. 로키는 순식간에 아물어가는 상처를 들여다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거 보여. 토르? 형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어.”
로키는 팔을 들어 토르에게 들이밀었다. 로키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러니 마셔. 그리고 나와 함께 해줘. 형.”
토르가 자신과 같은 뱀파이어가 되는 것 그것이 로키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어쩌면 로키는 이제는 더 이상 토르를 미워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No, Loki. no…….”
토르는 자신은 이미 너무 멀리까지 왔다는 것을 알았다. 로키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할 수 있었고 그와 함께 잠을 잘 수도 있었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되는 것만은 할 수 없었다. 토르의 단호한 말에 로키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로키의 뺨 위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너는 점점 죽어가고 있잖아. 그리고 곧 죽겠지. 그러면 누가 나의 갈증을 달래주지? 누가 나의 악몽을 물리쳐주지? 누가 나와 함께 있어주지?”
로키의 말이 옳았다. 토르는 점점 나이를 먹었고 로키는 언제까지나 무력하고 어린아이로 남아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토르는 그런 로키의 외침을 들어주지 않았다.
“잔인해! 형은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야. 얼마나 나를 외롭게 만들어야 만족하겠어?”
로키는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며 몸을 떨었다. 토르는 로키를 진정시키려 다가가 어깨를 끌어안았다.
“로키…….”
토르는 뱃가죽이 화끈해지는 고통을 느꼈다. 단도는 작았지만 날이 벼려있어 그 날카로움은 토르의 내장까지 헤집어 놓을 수 있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토르는 잘 알고 있었다. 토르는 천천히 로키에게 떨어졌다. 배에 꽂힌 칼을 잡아 뽑았다.
맑은 쇳소리를 내며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날이 선 단도의 끝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토르가 애써 상처를 막아보지만 손 틈새로 흘러나오는 피를 막을 수 없었다. 토르의 무릎이 꺾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로키는 점점 아물어가는 상처를 쓰러진 토르의 입으로 들이밀었다.
“어서 마셔! 이 피를 마시면 살 수 있어. 영원히. 둘이 함께야.”
영생이 약속 된 붉은 피였다. 피에서 사과 향이 났다. 이브를 유혹하고 아담을 타락하게 만든 금단의 과실과 꼭 같은 향이었다. 토르는 이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저 피를 마시면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까무룩 해지는 시선 끝에 이십 년 전과 다름없는 얼굴을 한 자신의 어린 동생이 있었다. 소년으로 있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내가, 잘..못했다. 로키.”
토르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토르의 뜨거운 피가 로키의 발등을 적셨다. 토르의 체온이 점점 로키와 닮아갔다.
“토르!”
“나를 용서해주렴.”
로키는 피에 젖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 위를 덧대어 발랐다. 로키는 피처럼 붉은 입술로 토르의 입술을 천천히 마주했다. 입을 다문 채, 입술 그대로 오래도록 이어지는 그 순결한 입맞춤, 서로의 입술이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인 감각을 나누며 하나하나 헤아려 보는 시간이 로키는 황홀하도록 좋았다. 그러나 토르의 입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로키는 울음에 번지는 말로 토르를 저주했다.
“나는 너를 증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