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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1.24 [스팁로키] Rose Day

[스팁로키] Rose Day

글/짧 2013. 11. 24. 23:59


1.


  눈앞의 남자는 무척 위험했다. 인구 백만이 넘는 대도시 맨해튼에서 꽃집을 몇 십년 째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장미를 들여다보는 남자는 근래에 보기 드문 남자였다. 이 금발의 남자는 막 화보에서 나온 것 처럼 완벽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단정하게 올린 머리와 균형잡힌 탄탄한 몸에 싱그러운 미소라니. 빌어먹을, 내가 백인우월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빛나는 금발과 대서양같은 푸른 눈을 보고 있자면 절로 KKK단의 미학적 관점에 찬동을 하고 싶어졌다. 이 사상적으로 위험한 남자는 나의 고뇌는 알지 못한 채 벌써 몇 십분째 색색의 장미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남자가 붉은장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장미꽃 한다발 주시겠습니까? 마담." 


이 각이 잡힌 행동거지에 이 남자의 직업이 군인이나 혹은 제복을 입는 종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새 군인은 이렇게 기품이 넘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우아한 골동품과도-


  "마담?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에요. 호호호. 혹시 데이트?"


  남자의 외모에 눈이 먼 나머지 본래의 의무를 잃어버릴 뻔 했다. 나도 주책이지. 가장 싱싱하고 아름다운 봉오리들로 꽃을 골라내며 질문을 하자 이 눈앞의 남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수줍어하는 얼굴로 무언가를 골똘이 생각하더니 금세 확신에 넘치는 대답을 했다.

  

  "네. 데이트가 있습니다." 

 

  역시, 멋진 남자에게는 다 임자가 있는 법이었다. 


  "무슨 기념일인가봐요? 장미꽃을 챙겨주고."

  "말하자면, 오늘이 첫 데이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첫 데이트때 장미꽃을 안겨주는 남자는 이미 30년전에 멸종한걸로 알았는데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 나타난 로맨티시스트란말인가. 나는 전율했다. 이거 맨하탄 전설이로군. 오늘 매상은 생각하지 않고 이 시대의 전설에게 마음을 쓰기로 했다. 게다가 이렇게 멋진 남자가 장미꽃을 들고 다니면 우리가게도 자연스럽게 홍보가 될 것이었다. 최대한 솜씨를 발휘해 꽃다발을 포장했다. 금세 아름답고 커다란 꽃다발 하나가 만들어졌다.

  "자, 장미꽃 백송이에요."

  "오. 마담 이렇게까지 많을 필요는..."


  남자는 곤란한 듯 고개를 저었다. 나도 백송이는 좀 너무했나 걱정이 들었지만 역시나 내 예상대로 장미꽃 백송이를 들고 있는 금발의 남자는 파괴적으로 아름다웠다. 내가 딱 스무살만 젊었어도! 나는 이런 상념을 하다가 한숨을 쉬고 남자의 가슴팍에 꽃다발을 들이밀었다.  


  "꽃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법이지요. 게다가 여자라면 한번쯤은 이런 꿈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아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제 데이트 상대는- 이런, 시간이.... 마담 얼마인가요?"

  "20달러에요."

  "20달러는 너무 적은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20달러랍니다. 다만 다음번에도 꽃이 필요하다면 꼭 들려줘요."


  이 금발의 미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남자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서 다시 꽃을 사갈 것이다. 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나이가 먹으면 이런 쪽으로는 기막히게 알아차리는 법이었다.


  "고맙습니다. 마담. 그럼 다음에." 

  "데이트 성공하길 바랄게요!" 


  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저 꽃다발의 주인이 될 이 시대 최고의 행운아를 생각하면서. 



2.


   거대한 도시에서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는 스티브는 모두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티브는 이 회색의 도시에서 꽃집을 찾은 것이 무척 운이 좋았다는생각에 기뻐했다. 거기다가 꽃집의 여주인은 무척 상냥했고 친절하게도 백송이씩이나 되는 장미꽃을 주었다. 그것도 아주 싼 값에. 게다가 이 붉은 장미는 자신이 지금 만날 이와 무척 닮아있었다. 장미는 도도하고 오만한 인상을 주곤 했지만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꽃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꽃이라니. 딱 이었다. 아름답고 강하고 오만하다.

  문득 스티브는 페기카터, 그녀를 떠올렸다. 그 여인도 무척 강인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내 스티브는 고개를 흔들며 그 생각을 잊으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생각을 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그에게 상처로 남는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이 장미는 그에 대한 사죄였고 첫 설레임의 표식이었다. 스티브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향기를 맡았다. 화려한 향이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순간 아찔해졌다.


  역시, 어울려. 


  이 지구에 자신과 딱 어울리는 꽃이 있다는 것을 로키는 알까.  이 거대하고 화려한 꽃다발을 받은 로키의 반응을 상상해보며 스티브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기뻐하기를 바라면서.

 


3.


  약속시간은 아직 삼십분이나 남았다. 로키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스가르드에서도 시간관념이 철저했기에 늦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도 없던 로키였다. 하지만 그는 카페테리아에 앉아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키는 언제나 그러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히 차려입고 있었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차려입은 양복과 고급스러운 구두와 시계, 마지막으로 향수까지 완벽하게 뿌린 로키를 웨이트리스가 아까부터 흘끔거리고 있었다. 사실 언제나 완벽한 차림새였기때문에 티는 나지 않았지만 사실 로키는 이렇게 차려입고 나오기까지 꽤나 오랜시간을 공들였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기분이 고양되고 있었으나 사실 이 완벽한 치장도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생각이 떠올라 금세 기분이 나빠졌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 수록 이른 여름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자 불쾌지수가 치솟았다. 비록 로키가 더위를 타지 않았지만 뜨거움이 선사하는 답답함이 슬쩍슬쩍 목을 죄였다. 로키는 눈을 감고 누군가를 떠올렸다. 빛나는 금발과 푸르른 눈동자. 그렇게만 표현한다면 그는 자신의 형제와 닮아있었지만 로키는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다 같았다. 무엇이든 포용할 수 있는 깊은 바다를 닮았다. 로키는 그 심연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 지는 오래였다. 그러나 그에게 자신의 감정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그 고지식한 남자가 여전히 잊지 못하는 한 여인이었다. 지구인의 삶은 유한하고 무척이나 짧았기에 엇갈린 인연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 짧은 사랑에 괴로워했다. 

 

  머리가 아팠다. 어두워진 시야로 갑자기 붉은 빛이 뒤덮였다. 눈을 뜨니 붉은장미꽃 사이로 한 남자가 보였다. 

 
  그였다. 스티브 로저스. 자신이 기다리던 남자.


4.


  스티브는 로키의 눈 앞에 커다랗고 화려한 장미꽃다발을 내미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로키는 얼굴을 다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꽃다발과 스티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주변의 시선이 금세 몰렸다. 빨간 장미꽃다발과 두명의 미남은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로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스티브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인적이 드문 곳까지 걸어가면서도 그들은 눈에 띄는 존재들이었다. 스티브는 멍청하게 로키에게 끌려가면서 걱정하고 있었다. 혹시 자신이 또 무언가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역시 꽃다발을 주는 행위는 너무 뒤떨어진 유행이었나. 로키는 대체 무엇에 화가 나있는가. 이번에는 로키를 기쁘게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등등의 여러 생각을 떠올리던 스티브는 돌연 서버린 로키의 행동에 로키를 뒤에서 껴안는 것 처럼 되어버렸다. 정식으로 데이트를 하기 전에 벌어진 스킨십에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스티브에게 어설프게 안긴 로키 또한 가슴이 뛰었다. 더구나 자신을 껴안은 채 장미를 주는 스티브의 행동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애써 표정을 정리했다. 로키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흥미거리가 되는 것이 싫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가장 화가났던 것은 따로 있었다. 아스가르드식으로 보자면 붉은 장미의 꽃말은 열렬한 사랑이었다. 농익은 연인끼리 주고 받는 메시지인 것이다. 로키는 그와 자신의 관계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와 단둘이 만나는 것은 오늘이 겨우 처음이지 않는가. 어쩌면 그리고 할 말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그 커다란 꽃다발이라니 창피하지도 않아? 혹은 그 장미가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잖아. 라던가. 

하지만 어떤 말도 너무 구차하게 느껴졌고 그 때문에 스티브에게도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스티브에게 할말을 고르려던 로키는 결국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껴안은 팔을 풀고 벤치에 앉아버렸다. 그런 로키를 바라보던 스티브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다. 

 "아까 못했던 말을 할게요."
 "-로키. 당신과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주어서 고마워요." 
 
 이 멍청이 같은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로키는 자신의 고민이 일순간에 날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스티브의 푸른 눈동자는 진지했고 그의 행동은 의심이란 것이 없었다. 그래, 이런 남자였다. 로키는 그의 꽃다발을 받았다. 향이 짙었다. 자신이 즐겨쓰던 향수와 비슷한 향이었다. 로키는 자신의 반응을 전전긍긍하며 지켜보는 스티브에게 말했다.

  "스티브. 다음부터는 꽃말을 알아봐."

(1년...도 더 넘은... 12년 로즈데이에 썼던 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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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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