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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ht, night

 

 

 

 

 

 

제대로잠들었던 날이 언제였던가. 불면의 밤이 열흘이 넘어가고 나서야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앓는 소리를 하기에는 뉴욕에 사는 사람들 중 절반은 자의나 타의에 의해 잠들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스물 네 시간 내내 발광하는 거리의 네온사인들이 그 증거였다. 불면증은 현대인에게 결코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며칠 전만해도 밤을 꼬박 지새우고 창문 너머로 동이 터오는 것을 보며 전시회 준비에 도움이 되리라고 쉽게 생각했다. 누구나 한때 홍역을 앓듯이 불면증도 그처럼 짧게 지나가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낙관이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부족한 수면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 억지로 쑤셔 넣었던 음식들은 수면부족에 혀가 굳어 맛마저 느끼지 못하게 되자 도리어 고문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건강해보이지 않는다고 핀잔 듣기 일쑤였던 마른 몸은 더욱 살이 내려앉아 심지어 이런 일에 둔감한 형마저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허리사이즈는 2인치가 줄었고 피부는 까칠하고 푸석해졌다. 안색은 시체처럼 납빛으로 물들었다. 그즈음의 나는 발작처럼 캔버스를 찢어버리기 일쑤였다.

 

 

***

 

오랜만이네.”

갑작스럽게 찾아 온 바튼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무언가의 증거를 찾으려는 듯 작업실 이곳저곳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결국 그에게 망가진 캔버스들을 들키고 나서야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 전시회에 낼 작품이 없다는 것을 시인했다. 역시 그를 속일 수는 없었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나를 담당해오던 바튼의 눈썰미가 아주 좋다는 사실은 업계에서도 정평이 나있다.

이번 전시회는 미루는 게 어떨까? 대타도 구해놨으니 걱정하지 말고.”

나의 상황을 어떻게 알았는지 바튼은 내게 먼저 전시회의 연기를 제안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안도를 느꼈다. 평소의 나라면 그런 얘기를 듣자마자 이 정도도 못해낼 것 같았냐, 어떻게든 제 시간 안에 끝내겠다며 화를 냈을 테지만 전시하기로 한 스무 점의 작품 중 반절도 완성하지 못한 빈 캔버스들을 보며 어쩌면 나는 그가 먼저 전시회를 미뤄주기를, 아니면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먼저 전시회를 미룰 수는 없었다. 결국 못이기는 척 바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유능한 사람이었고 그의 판단이 틀린 적은 거의 없었다. 몇 달 전 바튼은 내게 분명한 어조로 말했었다. 이번 전시회를 취소하자고.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전시회를 강행한 것은 나였다. 이번에도 그는 옳았다.

, 로키. 그러니까 말이야. 괜찮아?”

대충 계약서를 훑어 본 뒤 그를 배웅했다. 바튼은 현관앞에 서서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이런 걱정은 우리사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런 어색한 상황은 질색이었다. 그만큼 내 꼴이 말이 아닌 거겠지. 바튼을 얼른 보내고 침대에 파묻혀 잠들고 싶었다. 바튼의 걱정 어린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에게 괜찮다는 말을 할 여유도없었다. 나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되묻던 바튼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어깨를 몇 번 토닥이고서야 밖으로 나갔다.


***

 

바튼의 훌륭한 일처리 덕분에 별다른 위약금 없이 전시회의 연기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안 듯 모든 준비를 끝내둔 느낌이었다. 내 이름 대신 다른 사람의 이름이 올라간 포스터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숨은 여러 감정을 담고 있었다. 서운함, 홀가분함. 그리고 약간의 기대. 마감에 대한 스트레스로 잠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 굴레에서 벗어난 지금 잠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잠들 수 없는 밤은 지속되었다.

아침이면 미친 사람마냥 속을 게워낼 때까지 센트럴파크를 몇 바퀴씩 돌았지만 잠이 들기는커녕 갑작스러운 과도한 운동에 몸이 놀랐는지 손끝에서 발끝까지 뼈마디마디가 쑤시는 고통에 더욱 잠을 잘 수 없었다. 녹초가 된 몸이 물 먹은 솜 마냥 축축 늘어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잠은 오지 않았다. 운동과 식이요법,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들에 매달려 잘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다녔다. 모두 다 허사로 돌아갔다. 따뜻한 우유나 지루한 음악 따위는 불쾌감만을 불러일으켰고 CTMRI로 온 몸을 죄다 헤집어 보았지만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의사들은 모두 정신적인 부분을 짚고 넘어갔다. 그들의 변명에 지친 나는 결국 집안의 주치의였던 배너를 찾아갔다.

로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니까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된 상담을 받는 것이 나을거예요.

배너는 약에 의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며 처방을 꺼려했지만 잠들지 못해 겨울의 나뭇가지마냥 말라 비틀어진 내 몰골을 보며 마지막에는 항상 처방전을 내주었다. 말은 냉정하게 했지만 그래도 처방전에 쓰여 있는 날짜 간격을 짧게 하여 방문을 유도하는 걸 보면 그가 얼마나 나를 생각하고 챙기는지 알기에 충분했다.

처음 몇 번은 구걸하다시피 수면유도제를 원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마저도 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 희고 작은 알약들이 주던 잠의 달콤함을 그리워하며 나는 습관처럼 알약을 집어 삼키고는 했다. 그러나 그 짓도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응급실에 들어가 위세척을 받은 뒤로부터는 할 수 없었다. 자살시도를 한 것이 아니냐는 질책과 지금의 상황을 토르에게 알려야겠다는 이야기에 배너를 찾아가는 것도 관두었다. 이제 다시는 약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내게 배너는 걱정이 가득담긴 말투로 말했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어요. 로키, 이제 그만 그를 놔줘요.”

배너는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충고했지만 좋게 말해서 섬세했고 사실은 굶주린 야생동물마냥 예민하기 짝이 없는 제 성질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가장 잘 알았기에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지금까지 이런 예민한 성격을 원망해 본 적 없었으나 지금만큼은 저주스러울 정도였다.

 

***

 

사실, 엄연히 따지자면 잠들지 않은 날은 없었다. 불면은 켜켜이 쌓이다 기면으로 제 형태를 바꾸었다.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도 혹은 길을 걷다가도 까무룩 잠이 들고는 했다. 배터리가 방전된 기계가 그러하듯 갑작스레 잠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더 최악이었다. 어떤 예고 없이 불현 듯 잠에 빠져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언제는 길가에서 그냥 쓰러져서 일어나보니 지갑이 몽땅 털린 적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스타크가 경호원을 붙여주겠노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렇게라도 잠이 들지 않는다면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런 쪽잠들을 모두 헤아려봤자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이쯤 되자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리 없었다. 제 처지가 돈에 궁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동안 벌어둔 돈도 있었고 아마 집안에 자신의 재정 상태를 말한다면 평생을 먹고 살만한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집안에 알리는 것은 싫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나는 도심에 있던 작업실 겸 주거공간으로 쓰던 스튜디오를 팔고 도심 외곽의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 어차피 혼자쓰기에 차고도 넘치는 넓은 공간에 있는 것은 잠이 오기는커녕 몸마저 얼어붙을 것 같았다.

점점 사람이 찾아오는 것도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도 힘에 겨웠다. 뉴욕을 사랑했지만 대도시에는 수면을 방해하는 소음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사림이 없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나는 결코 뉴욕 근처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브룩클린의 작은 집을 찾아 정착했다.

이사 온 뒤로는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잠에 들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냈다. 집 크기를 줄인 대신 침대는 가장 좋은 것으로 샀다. 어차피 딱딱하든 푹신하든 어차피 쓸모도 없는 것이었지만 최고급 이불에 감싸 안긴 기분마저 양보하고 싶지는 않았다. 책도 읽을 수 없었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무기력한 우울함이 온몸을 감쌌다. 손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았다.


***


결국 내가 찾아낸 마지막 수단은 섹스였다다행이 이 방법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나는 매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섹스를 했다처음에는 여자를 불러들였고 이후에는 최소한의 전희와 반복해야하는 허리 짓조차 버거워져 남자를 불렀다은밀한 만남을 주선하는 곳에 전화하여 내 몸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억지로라도 나를 절정으로 이끌어줄 강인한 남자들을 지명했다. 콜걸들에게도 부탁할 수 있었지만 보통의 여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나를 들고 옮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남자를 사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아무렴 어떤가잠들 수만 있다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었다.

섹스는 간단했다. 전화를 한 뒤 문을 열어둔 채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노라면 어느새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내 몸을 짓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내 몸 위를 타고 오르는 남자에 의해 몸을 온전히 맡겼다그저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으면 남자는 알아서 몸의 흥분을 이끌어주었다. 강제적인 사정이 끝나고 졸음이 밀려올때 쯤, 탁자 위에 미리 올려 둔 지폐뭉치를 가리키면 여전히 얼굴도 모르는 남자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씻지도 않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사정 뒤 밀려오는 허무함과 자기혐오감에 휩싸여 괴로워했지만 결국엔 잠을 잘 수 있다면 아무것도 상관없었다그런 짓도 토니 스타크의 방문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섹스가 필요한 거면 나랑 하자나 잘해섹스.”

오랜시간동안 그의 가장 친한 친구로 알고 지냈지만 처음 보는 토니의 절박한 얼굴을 보며 나는 조금 웃었다그가 조금이라도 안심하길 바라면서.

바보 같긴내가 필요한 건 섹스가 아니라 잠이야.”

나는 전화부에 있던 번호들을 모두 지우고 다시 원래대로의 생활로 돌아갔다그리고 아주 가끔씩정말 가끔씩 잠을 자고 싶어 못 견딜 때면 토니에게 전화를 했다낮이든 밤이든 토니는 바로 달려와 주었고 덕분에 나는 가까스로 잠들 수 있었다.


***


 허니. 나 왔어.”

우리가 하는 것은 데이트가 아니니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스타크는 오늘도 장미꽃다발과 레드와인을 들고 와 내게 떠넘기듯 건넸다.

생긴 것만 고양이를 닮은 줄 알았더니. 고양이처럼 작은 상자 안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군.”

스타크는 전보다 작아진 집을 둘러보며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누가 백만장자 아니랄까봐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하고 소박한 집을 보며 작은 상자라는 둥 나를 놀릴 때면 나는 그가 들고 온 와인을 잔뜩 따른 잔을 들려줌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물론 작은 집을 놀리기보단 나를 고양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걸 알았지만 일부러 토니의 의중을 모르는 척 했다.


잘자, My Sleeping Beauty.”

스타크와의 섹스가 끝나고 나면 그는 엉망이 된 시트를 갈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꼼꼼하게 몸을 닦아주었다. 바로 잘 수 있도록 나를 위한 배려였다. 행위 중에도 그랬고 후에도 토니스타크는 제법 다정한 파트너였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의 말을 비꼬았다.

로맨틱한 키스가 아니라 여기저기 만지는 변태가 어디의 누구더라?”

토니 스타크는 좀처럼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나를 부를 때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며 놀렸는데 짐짓 야멸차게 쏘아도 스타크는 주눅 들지 않고 능글맞게 웃으며 이내 몸을 붙여왔다.

와우, 방금 너 스스로를 공주라고 시인한 거야? 천하의 로키 오딘슨이?”

나는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 토니를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이 말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을 안 토니는 낮게 웃다가 나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침대를 떠났다. 이렇게 장난스럽게 나의 나태함을 꾸짖으면서도 아침이면 갓 구운 크루아상과 싱싱한 제철 과일을 잔뜩 담은 쟁반을 침대까지 들고 왔다. 스타크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여자한테도 해준 적 없는서비스였지만 그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날이 갈수록 입으로 음식을 넘기는 것이 힘들어졌다. 깔깔한 목을 붙잡고 짜증스럽게 고개를 젓는 것으로 아침식사를 거절하면 스타크는 내 입안으로 포도 알 몇 개를 밀어 넣었다. 몽롱한 와중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우물거리면 스타크는 낄낄거리며 입가로 흘러내린 과일즙을 핥아주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잠드는 것은 힘들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괜찮은 생활이었다.

 

***

 

오늘도 잠을 자지 못했다. 세면대 위의 거울을 들여다보자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얼굴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눈 아래의 그늘이 더욱 짙게 내려앉았다. 창밖으로 희붐한 새벽빛이 밝아왔다. 스타크의 손목에서 작게 진동하는 알람을 보며 나는 스타크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이내 잠에서 깨어난 그가 눈을 감은 내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잔뜩 예민해진 청각이 그가 조심스럽게 출근을 준비하는 모든 행동을 알아차렸지만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오늘도 잠들지 못했다는 것을 토니에게 차마 알릴 수 없었다.

 

***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스타크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부족한 수면은 모든 것을 귀찮고 짜증나는 일로 받아들이게 했다. 허벅지 사이를 꼼꼼하게 닦아주는 손길이, 조심스럽게 내리누르는 입술의 감촉이 모두가 불만스럽게 느껴지고는 했다. 몸은 겹쳤지만 마음은 줄 수 없었다. 그것을 미안해하기에는 내가 너무 힘들었다. 스스로도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머리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정말, 이러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죽으면, 편하게 잘 수 있을까?”

? 죽으면그런 개소리 하지 마.”

무심코 내뱉은 말에 토니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그의 심각한 얼굴을 보며 나는 그만 말해야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파괴적인 욕구가 치솟았다. 정말 누구든 상처 입히고 싶었다. 그것이 나여도 좋았고 그여도 상관 없었다.

"벌써 삼 일째야! 한숨도 못잤어, 넌 내 맘을 몰라!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

진짜 죽여줘? 그렇게 스티브가 보고 싶은 거야?”

스티브. 그 이름이 토니의 입에서 나온 순간, 나는 결국 진실과 마주했다. 

스티브 로저스. 내 연인, 내 사랑. 나의 유일한 안식처.

사실은,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스티브의 죽음은 나에게서 잠을 앗아갔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이미 끝냈다. 지금의 나는 그저 잠을 자고 싶을 뿐이었다. 잠들고 싶었다. 세상과 단절된 채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롯이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나는 토니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 이름 말하지 마! 감히, 어떻게!”

아니, 몇 번이고 말해주지. 스티브 로저스는 죽었어! 그러니까, 너도 이제는! ”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토니를 향해 던졌다. 그러나 화낼 기력도 없어 금세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 집에서 나가.”

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떨리는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엉망이 된 얼굴을 토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 얼굴을 본다면 다시 돌아올테니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비틀린 우리 사이를 다시 돌릴 때라고 생각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다시는 토니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토니를 욕할 수 없었다. 그도 할 만큼 했다. 이건 명백히 내 잘못이었다

천천히 바닥을 더듬으며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푹신한 이불을 한가득 품안에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볕에 말려 따뜻하고 밝은 햇살의 냄새가 가슴 안에 가득 퍼져나갔다. 마치 스티브에게 안긴 기분이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이제 없었다. 그것을 깨닫는데 너무도 오랜 시간을 낭비했다. 이제야 비로소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 





>

듀공님ㅠㅠㅠㅠㅠ리퀘이옵니다.

완성은 오래 전에 했지만 차마 드리기에 민망한 글이라 이리저리 다듬다보니 벌써...(암전

쓰면서도 이런 글로도 괜찮은 건지;;; 뭔가 제 취향이 잔뜩 들어간데다 난해한 전개ㅇㅁㅜ)네요. 설명을 해보자면 연인이었던 스팁이 죽고 불면증에 시달린 로키랑 로키를 짝사랑(..)했던 오랜 친구인 토니가 로키의 불면증을 치료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메디컬물!(아님

허허허 여튼 듀공님이 기억하실지 모를정도로ㅠ너무 오래지났지만ㅠ 리퀘를 드, 드리오니 거절하지 마시고 재밌게(?)봐주시길!

+ 근데 이 정도는 15금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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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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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드럴로키] Neighbor

글/짧 2014. 11. 23. 13:37

Neighbor

 

누구에게나 가슴 떨리는 첫사랑은 있는 법이다


나의 첫사랑은 훌륭한 양아치였다. 양아치일 뿐 아니라 유명한 바람둥이였는데 얼마나 양아치인지 설명해주자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꼬마 시절부터 기호식품으로 과자와 사탕대신 담배와 술을 선택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남들이 야동을 보면서 딸딸이 칠 때 저보다 다섯 살은 많은 과외누나, 교회누나, 옆집누나들과 함께 실전경험을 하는 아주 되바라지고 까진 양아치였다. 그런데도 내가 왜 이 남자를 좋아하는지는 내 인생의 아직 풀리지 않는 세 가지 궁금증 중 하나였다. (혹시 궁금해 할 사람이 있을까 해서 말하는데 첫 번째는 토르가 내 형인 것이고 둘째는 맨델 제과점의 푸딩 레시피이다.)

내 첫사랑과 나의 형은 유치원에서 코 흘리던 때부터 지금까지 알아온 죽마고우(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알친구)로 자연스럽게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를 알아온 셈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의 사생활은 물론이거니와 연애사와 즐겨 하는 체위까지도 꿰고 있었는데 스토킹을 했다거나 그가 떠들고 다녔다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양아치긴 했어도 자신과 잠자리를 했던 여자들에 관해서 떠들고 다니는 타입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커튼을 치는 걸 잊고 다니는 조심성 없는 면을 갖추고 있던 것뿐이었다.

그와 나는 이웃사촌으로 우리 집 다락방에서 그의 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구조였는데 다락방에서 책 읽기를 즐겨하던 나는 종종 그가 낯선 여자와 낯 뜨거운 일을 벌이는 것을 목격하곤 했다. 정말이지 그건 무척 짜증나는 일이었고 평소의 나라면 그에게 창문을 닫고 다니라며 냉정하게 충고를 했을 텐데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그가 여자가 침대위에서 옷을 벗은 채로 키스하는 것을 목격한 밤, 내 몽정의 상대로 그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내가 게이란 것과 심지어 형의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었으니, 그의 무신경함이 한 청소년의 성정체성을 흔들어 놓은 셈이었다.

 

*

 

간만에 만난 그는 어른처럼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여전히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있었다. 나를 발견했는지 그가 깜짝 놀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슬쩍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는 주위의 여자들에게 귓속말을 하더니 깔깔거리는 그녀들과 헤어지고 나에게 다가왔다.

로키! 여기까진 웬일이야?”

나 대학 여기로 올까 하거든요. 학교 구경도 하고 겸사겸사 형 얼굴도 보고.”

? 너 공부 잘하지 않았어?”

법대가려고요. 집에서 나오려면 전액장학금도 받아야 해서.”

아 그랬구나. 변호사나 검사가 되고 싶은 거야? 너랑 어울린다. , 그는 뭐 그런 이야기랑 토르의 안부, 고향소식을 두서없이 물어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고 삐딱하게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수다스러운 질문이 멈추자 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 해지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매번 어른스러운 척, 여유롭기만 하던 얼굴이 당황하는 모습이 제법 웃겼다.

, 담배도 피울 줄 알아?”

이거 가르쳐 준 사람이 형이잖아요.”

어이없어 코웃음 치자 그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모습에 순간 가슴이 설렜다.

내가 그랬었나? 안 좋은 거 가르치고 되게 나쁜 놈이었네.”

그의 얼굴을 보니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건만 과거 일들은 모두 잊어버린 듯해서 괜한 심술이 났다.


어릴 때는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옳아보였고 뭔 짓을 해도 내 눈에는 멋지게만 보였다. 그는 못하는 게 없었으며 아는 것도 많았다. , 그것도 몇 년 안가서 환상이 깨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술을 처음 마셔본 것도, 담배를 펴본 것도.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모조리 그에게서 배웠다.

그는 매번, 안 돼! 라며 나를 단속하려는 형과는 달리 모든지 경험해봐야 는다며 내 편을 들어주고는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개새끼건만 그때는 왜 이리 멋있었던지. 그래도 덕분에 확실히 무엇이 내게 맞고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나에게 수음방법을 가르쳐 준 것도 그였으며 내첫 수음상대도 그였다. 어쩌다 우리 집에 둘만 남았던 날이었다. 야한 잡지를 형한테 빌려주러 왔던 그는 야한잡지를 조달하는 것을 부모님께 이르겠다고 하는 나에게 입막음의 댓가로 좋은 걸 알려주겠다며 수음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문제는 그가 보여주는 벌거벗은 여자의 몸뚱이가 나오는 사진보다 그가 나의 몸에 와 닿는 체온에, 흥분으로 살짝 붉어진 그의 얼굴 때문에 사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주제에 뭐? 그랬었나?

끊은 지 좀 됐는데 피우는 거 보니까 나도 땡긴다. 나도 한 대만 줄래?”

나는 끄덕이며 담배를 건네주었다. 그가 살짝 반색하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는 그가 즐겨 피우던 담배브랜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브랜드를 지금 내가 피우고 있으니까 잊을 수 없지.

담배를 입에 문 그가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적였는데 금연했다는 말이 진짠지 라이터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가까이 가져다대 그의 담배에 불을 옮겼다. 고개를 모로 돌려 다가가면서 모양새가 키스를 연상시킨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가까이 다가간 그에게서 여자들의 화장품 냄새와 함께 익숙한 향수냄새가 맡아졌다. 이 향수냄새. 그의 졸업식 때 내가 사준 향수의 향이었다. 무겁지 않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향기. 이 향을 맡자마자 그에게 정말 어울리는 향이라고 생각했다. 왜 아직도 이걸 쓰고 있는 거야. 약간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이 향수 쓰는구나.”

넌 아직도 우아하네.”

그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어린애취급을 했다. 나도 컸다구요, 따위의 유치한 말을 내뱉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졸업하는 날. 나는 그에게 그가 즐겨 쓰던 향수를 선물했다. 그때 그가 선택한 학교는 집에서 아주 먼 곳이었다. 그는 형이나 다른 친구들과도 떨어진 대학교로 진학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그를 언제나 옆집에서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나에게 충격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고백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아마 좋아하는 거 같아요. 아니, 좋아해요."

나는 얼굴도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에게 고백했다. 어차피 잘 보지도 못 할 텐데 차여도 그만이었다. 사실 잘 되면 장거리연애는 어렵다고 하는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고 걱정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아직 니가 어려서 착각하는 거 같아. 없던 일로 할 테니까 비밀로 하고 전처럼 잘 지내자."

시발. 진짜 어이가 없었다. 나를 어린애로 보는 건 여전했다. 차라리 취향이 아니라거나 남자가 싫다고 욕이라도 했다면 단념했을 텐데. 그래서 미련이 남아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나는 그 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을 보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

 

나는 형과 세살차이가 났는데 그 말은 나와 그의 나이차이가 세 살이라는 뜻이었다. 3년이란 차이가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굉장히 짜증나는 었다. 어차피 늙으면 거기서 거기일 텐데(예순 세 살이나 예순 살이나 다 할아버지.) 내가 한참 유치원을 다닐 때 그들은 초등학교에 다닌다며 놀아주지 않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더니 머리가 컸다고 뻐겼으며 중학생이 되자 그들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특히나 내가 한참 스쿨버스를 타고 다닐 때 면허를 딴 그들은, 중고였지만 빨간 스포츠카(토르는 이 차에 묠니르라는 애칭까지 붙였다.)를 타고 지나가는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나이 차이에 화딱지가 나곤 했다.

매번 이런 식었기에 나는 그가 졸업하는 것이 가장 걱정이 되었다. 학교에서 보지 못하는 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옆집에 사는데, 어떻게든 보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다만 안 그래도 나를 어린애처럼 보는 그가 졸업을 해서 성인이 되면, 미성년자일 나를 어떻게 취급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좁아지지 않은 격차로 인해 나는 조바심이 났다. 가장 열 받는 일은 어쩌면 그가 영원히 나를 어린애로 볼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정말이지, 지가 나를 낳았어? 아님 키웠어? 이런 말을 하면 제 손으로 기저귀를 갈아줬다고 말하겠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애들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주제에 나를 키웠다니. 나는 언젠가는 자기한테 효도하라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그의 엉덩이를 힘껏 차주겠다고 마음먹었다.

 

*

 

"오늘 어디서 잘 거야?"

"형 집에서 재워주면 안 돼요? 예전처럼 노는 것도 그립고."

그가 피식하고 웃었다.

"언제부터 나랑 놀고 싶어 했다고."

맞는 말이었다. 어릴 적에는 그들이 나와 같이 놀아주기를 원했는데 조금 커서는 나를 내버려두었으면 했다. 그들은 부모님이 자주 자리를 비우는 우리 집을 제 아지트마냥 여기고 놀러왔는데 가끔씩 피자를 시켜서 위조 신분증으로 사온 맥주를 마시곤 했다. 나는 형과 그 친구들이 놀러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모님한테 혼나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었고 천성적으로 떠들면서 시끄럽게 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모이면 경찰이 들이닥치지 않는 게 용할 정도로 시끌벅적했기 때문이었다. 형은 무심했기에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하고 매번 나를 끌고 가 무리와 어울리기를 강요했는데 억지로 그들과 놀다가도 끝에는 도망치듯 내 방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래도 가끔씩, 그가 내 방문을 두드리고는 들어와 나를 다시 불렀는데 그럴 때면 나는 못 이기는 척 다시 그의 손에 이끌려 나왔다.

나는 형의 친구들 중 그가 나를 불렀다는 것에 대해 설렜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호건은 형의 친구치고는 똑똑하고 상냥한 편이었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고 나 또한 물론 그랬기에 친해질 일은 없었고 볼스테그는 어떤 면에서는 토르보다 더 단순하고 무신경했기에 나를 돌보는 몫이 자연히 그에게 돌아간 것은 당연했다. 나는 그가 내 형이었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농담처럼 자신들과 인기 있는 남자들과 어울리는 걸 영광으로 알라며 웃었으나 사실 나는 토르나 그 무리들이 학교에서 인기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집에 와서는 매일같이 팬티바람으로 소파에 누워 유치한 텔레비전 쇼를 쳐다보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노라면 부러워하는 반 아이들에게 우리 형, 니네가 좀 가지고 가라.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다만 그들이 운동경기에 나갈 때만큼은 예외였는데 토르와 그를 포함 네 사람은 모두 미식축구팀의 주전이었다. 토르는 쿼터백, 호건은 윙맨, 볼스테그는 센터, 그는 리시버로 활약을 했는데 어릴 적에는 그들이 내심 자랑스러웠으나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토르의 동생이란 이유로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며 내가 형보다 못하며, 심지어 공부벌레라는 것에 실망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때문에 나는 점점 커가면서 형과 그 친구들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들 무리에 내 자신이 가려지는 것에 불만을 가졌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형뿐만 아니라 그까지도 피해 다녔는데 내 심정을 눈치 채지 못 했던 형과는 달리, 그는 집근처에서 마주 치면 언제 서먹했냐는 듯 다가와서 내게 다가와서 시답잖은 말 한마디를 걸고 가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언제부턴가 집에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그럴 때면 나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내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아마 그때도 어렴풋이 그의 여자친구에게 질투를 했던 것 같았다. 그런 다음날이면 그가 내게 다가와 슬쩍 공주님, 어제는 왜 안보였어?” 라고 놀리면 최대한 쌀쌀맞은 태도로 여자 향수냄새가 역겨웠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는 여자들에게 잘 먹히던 미소로 여자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돼, 여자는 마음이 여려서 상처받아.” 라며 충고 아닌 충고를 했는데 그러면 나도 상처받는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래도 몇 번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부터 그가 여자를 우리 집에 데리고 오는 일이 없었다. 그건 아마도 나를 신경을 써준 거라기보다는 형과 그 친구들이 노는데 여자가 끼면 재미없다고 불평했기 때문일 것인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

 

"짐은 이게 다야?"

"조금 있다가 이 쪽으로 이삿짐센터 오기로 했어요."

약간 당황한 얼굴이 된 그는 내게 농담하지 말라며 내 집네 둘이 살만한 공간은 없다고 속사포로 내뱉었다.

"무슨 착각하는 거예요. 나도 나 차버린 사람하고 같이 살 생각은 없어요."

그의 몸이 움찔하고 튀어오르는 게 다 보였다. 오늘 하루 동안 그에게서 볼 수 없던 모습을 다 보는 것 같아 즐거웠다. 나는 그의 반응을 즐기며 천천히 말했다.

"옆집으로 이사 오는 거예요. 예전처럼 이웃사촌해요."

싱글거리며 웃는데 갑자기 벽으로 밀쳐졌다. 맞는다고 생각한 순간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연인과의 키스라고 하기엔 너무 조심스럽고 친구동생과의 키스라고 하기엔 너무 뜨거운 키스였다.

", 너 말이야. 내가 어떤 마음으로 떠났는데. 너 진짜...왜 날 이렇게 힘들게 해."

언제나 여유롭게 웃기만 하던 그가 나를 보며 잔뜩 괴로운 얼굴을 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다가 그의 엉덩이를 힘껏 차주었다. 악하고 소리 지르는 그의 목을 끌어당겨다가 깊게, 평생 동안 하지 못한 만큼 몫의 키스를 해주었다. 정말이지, 이런 한심한 남자에게 반하다니.

"언제부터였어?"

"처음 봤을 때부터?"

"..형 수법 다 아니까 솔직하게 말해."

그는 억울하다는 듯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부모님에게 나를 자기 동생으로 달라고 졸랐다고 했다. 그의 계획은 토르로 인해 깨졌지만 형이될 수없다면 평생 옆에서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고백한 순간 덜컥 겁이 났다고 했다.

"니가 착각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너한테 성적인 걸 보여줬으니까 헷갈리고 있는 게 아닐까. 널 속이고 있는 게 아닐까 했어."

그게 다 계획이었구나! 정말 덫에 걸린 느낌이 들어 나는 다시 한 번 더 세게 그의 엉덩이를 걷어 차주었다.

"..그만해! 진짜 아프다구! 그럼 넌 내 어디가 좋았던 건데?"

내가 그에게 반한 계기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어릴 때의 일로 나는 그날따라 형의 배려심 없고 무심한데에 질려있었다. 십 수년을 같이 산 주제에 내가 토마토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을 모르고 내게 자기가 만들었다며 토마토 스파게티를 억지로 먹였다. 자주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날은 왠지 나도 모르게 서러워져서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에 못 이겨서 소리치고 발을 구르면서 난리를 치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두드러기가 나서 엉망이 된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토르나 그 친구들이 알게 되었다간 분명히 놀림만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를 구해준 게 그였다. 언제나처럼 내 방에 들어와 나를 달래주려다가 내 꼴을 보더니 놀리기는커녕 아무도 모르게 약을 사가지고 와서 주었다. 덕분에 토르는 내가 직접 토마토 알레르기가 있다고 말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어쩌면 그때부터 내가 그를 좋아한 걸지도 몰랐다. 나는 알고 있었다. 금발의 미남이란 이유로 가볍게 보일 때도 있지만 실상은 굉장히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겉보기에는 양아치에 바람둥이긴 해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그러나 내가 그 이유를 말하는 날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건 그동안 나를 힘들게 한 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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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특으로 썼던 펜드럴로키. 

헤헤헤. 얘네들은 이런 낯간지러움이 좋아,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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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탕을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칠 거야." 

  까만머리의 소년이 내게 말했다. 오늘이 할로윈이라는 걸 알리는 듯 간신히 구색 맞춘 초록색 망토 를 걸친(그러고보니 녹색 망토을 걸친 영웅이 있던가.) 소년을 한번 봤다가 우리집 현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앞뜰과 현관, 지붕까지 그 흔한 호박이나 꼬마전구 하나 없는 우리집으로 찾아온 예상치 못한 꼬마손님 앞에서 나는 피자배달부인줄 알고 내민 10달러를 든 손을 감추고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음, 꼬마야. 집을 잘못 찾아온 거 같은데? 미안하지만 우리집에는 사탕같은 거 없어."

  그 한마디에 뭐가 그리 놀란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던 소년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바보같아! 오늘은 사탕을 주는 날이잖아!"

  "우리집은 할로윈을 안 챙기는데. 봐봐, 집 앞에 아무 것도 없고 아무도 안 오지? 차라리 다른 집을 가보지 그래?"

  "...다른 집은 이미 다른 유령들이 너무 많아. 이 집이 제일 조용했단 말야."

  내게 보인 당돌한 언행과는 달리 수줍음이 많은 소년인 것 같았다. 하긴, 이 시간이면 이미 거리는 이런저런 복장을 한 아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거다. 아마 다른 애들한테 차례를 뺏겼을지 모르지. 그러고보니 애 부모는 어딨는거야? 설마 이 시간에 혼자서 돌아다니게 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줄 수 있는게 없는걸. 이제 가봐."

  "칫, 그러면...장난을 칠 수밖에 없지." 

  장난을 치겠다며 패기롭게 외치는 꼬마의 모습이 조금은 귀여운 것 같기도 해서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어떤 장난을 칠 건데?"

  "벌거벗은 임금님 책 본적 있어?"

  소년이 눈을 한번 깜빡이자 순식간에 까만 머리위에 황금색 투구가 씌여지고 소년의 등 뒤에 걸쳐있던 녹색망토 사이로 소년의 키 만한 커다랗고 날카로운 무기가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비현실에 나는 황망해져서 소리조차 지르지도 못했다. 다만 소년의 녹색 눈동자가 무척이나 장난스럽게 반짝이고 있다는 것만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줄게."

  그리고 저 소년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해낼 힘도 있고 그럴 의향도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안 돼! 이러다가 정말로 애들이 득실득실한 동네 한복판에서 벌거벗고 돌아다닌다면 정말이지 동네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면서 주머니를 뒤적였다. 지폐와 동전 몇개, 열쇠꾸러미와 영수증. 그 흔한 껌 하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할 때 그제야 부시럭, 하고 뭔가 손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병원에 갔다가 엉겁결에 받아 온 사탕이 주머니에 하나 있다는 게 기억이 났다. 나는 약간 절박한 심정으로 사탕을 꺼내 소년에게 들이밀었다. 소년은 손바닥 위에 있는 사탕 쪽으로 고개를 숙여 이리저리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닥 마음에 안드는 지 팔짱을 낀 채 곰곰히 생각하던 소년이 낼름 내게서 사탕을 뺏어갔다.

  "계피라....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이걸로 참아주지. 내년에는 좀 더 달콤한 걸 준비해놓라고!"

  어느새 위협적인 복장은 사라지고 처음처럼 녹색 망토 하나만 걸친 검은머리의 소년이 거리로 뛰어나가며 외쳤다. 

  "Trick or Treat!"


----

10대 배너와 진짜 유령이었던...꼬마로키였는데 왠지 배너같지 않아서 좌절. 

여튼, Trick or Treat! 만우절과 할로윈만큼 로키와 어울리는 날도 없지!! 

여러분! 연성 안 주면 장난 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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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

확신컨대 내 머리를 검사해보면 정신병이 있을 것이다. 몸은 무척이나 건강했지만 머리는 항상 맛이 가 있었다. 상대방이 내 결점을 눈치 채기 전에 타고난 멋진 웃음으로 가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이 점에 있어 멋진 외모를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했다.)내 병명은 아마도 애정결핍일 테다. 남들이 듣는다면 섹스중독 이라고 정정해줄지 모르겠지만 내가 섹스를 좋아하는 것은 모두 애정을 원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체온을 원했기에 내게 다가오는 여자들을 거절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상냥했고 부드럽고 향긋한 살결과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형제들은 모두 훌륭한 직업을 가진 어른으로 자랐다. 나를 제외하자면 액자에 걸어놓아도 좋을 만큼 화목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나만이 미운오리새끼처럼 따로 떨어져 삶을 낭비하고 방황했다. 나의 학창시절은 굉장히 소모적이고 지루했다.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빌어먹게도 산만한 아이였고 부모님의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정규교육을 간신히 마친 나는 할릴없이 시간만 죽이다 겨우 지금에서야 적성에 맞은 일을 찾은 것이다. 그 일이 바로 레이싱 이었다. 정상적인 일이라고 하기에는 삶에서 가장 멀고 죽음과 가장 가까운 일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제일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 이 따위인것을. 게다가 잘만 하면 술과 여자와 돈을 엄청나게 받을 수 있으니까 일석이조였다. 물론 그 무엇보다 트랙을 달리다보면 머신이 나를 안아주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기계 혹은 괴물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죽음으로 돌진하는 나에게 있어 머신이야말로 유일한 동반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친구>
레이싱을 하고 부터는 슬슬 주위 눈치도 볼 줄 알게 되어서(이 말을 하면 코웃음칠 지 몰라도)친구들이라고 어느정도 말할 수 있는 관계들이 생겼다. 제멋대로에 예민하기 짝이 없는 나를 받아주는 그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물론 지금까지도 유일한 친구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앵무새 한쌍 뿐이었다. 안어울릴지 몰라도 나는 어릴 적부터 작은 동물에 무척 약했다. 특히나 그 작은 앵무새를 한 손에 쥐고 멀리 날아 도망가지 못하도록 잘라버린 뭉툭한 날개죽지를 슬며시 쓸어보며 나는 이런 아름답고 자유로운 영혼이 철창 속에 묶여있음을 애도했고 그렇게 만든 스스로에게 못내 뿌듯함을 느끼고는 했다.

<고민>
최근,그 추악하지만 끝내 지고 가야할 내 성정을 동하게 하는 이가 내 눈앞에 있음을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르는 채로 서있었다. 나는 뱃속 깊숙이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니키 라우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가볍게 몸을 떨던 작은 동물은 몸부림치며 나에게서 달아났지만 처음에는 놓아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뒷모습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그를 낚아채 그 자유로움을 뺏어갈 수 있을까. 그것이 나의 요즘의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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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니키] runner

글/짧 2014. 3. 26. 01:48
나에게 삶은 도피였다. 집안의 기대에서, '라우다'라는 이름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트랙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레이싱에 뛰어든 이유는 단 두 가지였다. 첫째, '사업가'와 대척점에 있을 것. 둘째, '사업가' 만큼 돈을 벌 수 있을 것. 그것들만이 이 미친세계로 뛰어든 이유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이유들은 나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열정이나 호승심따위에 흔들려 승리를 눈 앞에서 놓치는 멍청한 놈들과 달리 나는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포인트를 땄고 그것은 스폰서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었다. 손상되지 않는 차. 승리를 따오는 레이서. 페라리에서 날 놓치 않는 것은 당연했다. 가끔씩 나에게 스타성이 없다고 하는 무례한 놈들도 있었지만 나에겐 그런 불만쯤은 흘려들을 수 있는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 헌트 처럼' 이란 소리가 나오면 얘기가 달라졌다.
"제임스 헌트처럼 기자회견장에서 쇼맨쉽을 보여주라고!"
그런 어이없는 말을 내뱉은 매니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공기에 매니저는 자신의 실언에 대하여 사과를 해왔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받아들이는 걸로 일은 일단락 되었지만 사실 나는 전혀 괜찮지 못했다. 
"제임스 헌트."
이빨 사이로 그의 이름을 짓이기듯 뇌까렸다. 공공연히 나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애송이(나보다 먼저 데뷔했지만 F1은 내가 선배다. 나이는 내 알바 아니었다.)나와 마주칠때면 나를 향해 little rat 이라며 우스꽝스럽게 구는 것이며(머신을 타기에 작은 게 더 유리했다. ASSHOLE!) 그는 나의 신경을 자꾸 건드렸고 평정심을 깨트렸다. 이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평정심과 절제가 사라진 트랙에는 광기와 무모함만이 남는다. 이성을 잃고 판단을 잘못하면 한순간에 목숨이 날라가는 것이 트랙이었다. 생존확률과 우승확률은 반비례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돈벌이에서 20퍼센트의 확률이면 목숨의 댓가로 충분했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멍청하기 트랙위에서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헌트와의 만남이 있는 날이면 쉽사리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냉정해지자고 몇번이나 자신을 타일렀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라이벌의식때문인가. 나에게도 그런 유치하고 뜨거운 감정이 남아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해보지만 그런 순수한 감정과는 조금 다른. 기묘한 구석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트랙 위를 돌다가도 돌연 뒷덜미가 선뜩해지는 때가 종종 있다. 백미러에는 익숙해진 멕라렌의 마크가 나를 당장이라도 집어삼킬듯 점차 크기를 더했다. 그럴때마다 그 위협에 벗어나고 싶어 엑셀을 더욱 세게 밟았다. 나는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포에 질려 달리는 셈이었다. 굴욕적이었지만 제임스 헌트는 자신의 이름마냥 사냥꾼처럼 나를 쫓아왔다. 서킷을 달리고 있다보면 그를 아예 내칠 수 없었다. 간발의 차이는 나에게 승리를 안겨주는데 부족함이 없었으나 마치 사냥꾼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냥감마냥 나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게 만들긴 충분했다. 
게다가 트랙 위에서 뿐만 아니라 점점 제임스 헌트를 만나는 일이 잦아지니 집중이 되지 않았다.
"헤이, 리틀 랫."
역시나 오늘도 웃는 낯짝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들어오는 제임스 헌터와 마주쳤다. 젠장. 어떻게든 태연한척 지나가려고 했지만 결국 헌터가 몇 걸음 앞에 오자 본능처럼 등을 돌렸다. 
"Hey! 또 도망치는 거야?"
또. 라는 말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겁쟁이라고 여겨지는 게 분명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천천히 헌트를 향해 돌아섰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도망치는 거 아냐."
발음을 또박또박 눌러가며 아니라고 말해보지만 이 무례한 영국남자는 독일억양이 잔뜩 묻은 내 말을 못알아듣겠다며 speak in English 라고 능청스럽게 말한다. 그러는 지는 외국어 할 줄 하는 것 하나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무례한 섬나라 놈들.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자 헌트가 배를 잡고 크게 웃어댔다. fuck.fuck.fuck! 상종할 가치가 없는 놈이었다. 등을 돌린 순간 손목을 휘감는 억센 손길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도망가도 끝까지 쫓아가 잡아먹어줄테니 기대하라고."
그의 선전포고에 결국 나는 언제나와 같이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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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로키] Rose Day

글/짧 2013. 11. 24. 23:59


1.


  눈앞의 남자는 무척 위험했다. 인구 백만이 넘는 대도시 맨해튼에서 꽃집을 몇 십년 째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장미를 들여다보는 남자는 근래에 보기 드문 남자였다. 이 금발의 남자는 막 화보에서 나온 것 처럼 완벽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단정하게 올린 머리와 균형잡힌 탄탄한 몸에 싱그러운 미소라니. 빌어먹을, 내가 백인우월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빛나는 금발과 대서양같은 푸른 눈을 보고 있자면 절로 KKK단의 미학적 관점에 찬동을 하고 싶어졌다. 이 사상적으로 위험한 남자는 나의 고뇌는 알지 못한 채 벌써 몇 십분째 색색의 장미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남자가 붉은장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장미꽃 한다발 주시겠습니까? 마담." 


이 각이 잡힌 행동거지에 이 남자의 직업이 군인이나 혹은 제복을 입는 종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새 군인은 이렇게 기품이 넘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우아한 골동품과도-


  "마담?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에요. 호호호. 혹시 데이트?"


  남자의 외모에 눈이 먼 나머지 본래의 의무를 잃어버릴 뻔 했다. 나도 주책이지. 가장 싱싱하고 아름다운 봉오리들로 꽃을 골라내며 질문을 하자 이 눈앞의 남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수줍어하는 얼굴로 무언가를 골똘이 생각하더니 금세 확신에 넘치는 대답을 했다.

  

  "네. 데이트가 있습니다." 

 

  역시, 멋진 남자에게는 다 임자가 있는 법이었다. 


  "무슨 기념일인가봐요? 장미꽃을 챙겨주고."

  "말하자면, 오늘이 첫 데이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첫 데이트때 장미꽃을 안겨주는 남자는 이미 30년전에 멸종한걸로 알았는데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 나타난 로맨티시스트란말인가. 나는 전율했다. 이거 맨하탄 전설이로군. 오늘 매상은 생각하지 않고 이 시대의 전설에게 마음을 쓰기로 했다. 게다가 이렇게 멋진 남자가 장미꽃을 들고 다니면 우리가게도 자연스럽게 홍보가 될 것이었다. 최대한 솜씨를 발휘해 꽃다발을 포장했다. 금세 아름답고 커다란 꽃다발 하나가 만들어졌다.

  "자, 장미꽃 백송이에요."

  "오. 마담 이렇게까지 많을 필요는..."


  남자는 곤란한 듯 고개를 저었다. 나도 백송이는 좀 너무했나 걱정이 들었지만 역시나 내 예상대로 장미꽃 백송이를 들고 있는 금발의 남자는 파괴적으로 아름다웠다. 내가 딱 스무살만 젊었어도! 나는 이런 상념을 하다가 한숨을 쉬고 남자의 가슴팍에 꽃다발을 들이밀었다.  


  "꽃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법이지요. 게다가 여자라면 한번쯤은 이런 꿈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아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제 데이트 상대는- 이런, 시간이.... 마담 얼마인가요?"

  "20달러에요."

  "20달러는 너무 적은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20달러랍니다. 다만 다음번에도 꽃이 필요하다면 꼭 들려줘요."


  이 금발의 미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남자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서 다시 꽃을 사갈 것이다. 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나이가 먹으면 이런 쪽으로는 기막히게 알아차리는 법이었다.


  "고맙습니다. 마담. 그럼 다음에." 

  "데이트 성공하길 바랄게요!" 


  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저 꽃다발의 주인이 될 이 시대 최고의 행운아를 생각하면서. 



2.


   거대한 도시에서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는 스티브는 모두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티브는 이 회색의 도시에서 꽃집을 찾은 것이 무척 운이 좋았다는생각에 기뻐했다. 거기다가 꽃집의 여주인은 무척 상냥했고 친절하게도 백송이씩이나 되는 장미꽃을 주었다. 그것도 아주 싼 값에. 게다가 이 붉은 장미는 자신이 지금 만날 이와 무척 닮아있었다. 장미는 도도하고 오만한 인상을 주곤 했지만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꽃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꽃이라니. 딱 이었다. 아름답고 강하고 오만하다.

  문득 스티브는 페기카터, 그녀를 떠올렸다. 그 여인도 무척 강인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내 스티브는 고개를 흔들며 그 생각을 잊으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생각을 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그에게 상처로 남는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이 장미는 그에 대한 사죄였고 첫 설레임의 표식이었다. 스티브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향기를 맡았다. 화려한 향이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순간 아찔해졌다.


  역시, 어울려. 


  이 지구에 자신과 딱 어울리는 꽃이 있다는 것을 로키는 알까.  이 거대하고 화려한 꽃다발을 받은 로키의 반응을 상상해보며 스티브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기뻐하기를 바라면서.

 


3.


  약속시간은 아직 삼십분이나 남았다. 로키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스가르드에서도 시간관념이 철저했기에 늦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도 없던 로키였다. 하지만 그는 카페테리아에 앉아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키는 언제나 그러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히 차려입고 있었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차려입은 양복과 고급스러운 구두와 시계, 마지막으로 향수까지 완벽하게 뿌린 로키를 웨이트리스가 아까부터 흘끔거리고 있었다. 사실 언제나 완벽한 차림새였기때문에 티는 나지 않았지만 사실 로키는 이렇게 차려입고 나오기까지 꽤나 오랜시간을 공들였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기분이 고양되고 있었으나 사실 이 완벽한 치장도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생각이 떠올라 금세 기분이 나빠졌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 수록 이른 여름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자 불쾌지수가 치솟았다. 비록 로키가 더위를 타지 않았지만 뜨거움이 선사하는 답답함이 슬쩍슬쩍 목을 죄였다. 로키는 눈을 감고 누군가를 떠올렸다. 빛나는 금발과 푸르른 눈동자. 그렇게만 표현한다면 그는 자신의 형제와 닮아있었지만 로키는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다 같았다. 무엇이든 포용할 수 있는 깊은 바다를 닮았다. 로키는 그 심연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 지는 오래였다. 그러나 그에게 자신의 감정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그 고지식한 남자가 여전히 잊지 못하는 한 여인이었다. 지구인의 삶은 유한하고 무척이나 짧았기에 엇갈린 인연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 짧은 사랑에 괴로워했다. 

 

  머리가 아팠다. 어두워진 시야로 갑자기 붉은 빛이 뒤덮였다. 눈을 뜨니 붉은장미꽃 사이로 한 남자가 보였다. 

 
  그였다. 스티브 로저스. 자신이 기다리던 남자.


4.


  스티브는 로키의 눈 앞에 커다랗고 화려한 장미꽃다발을 내미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로키는 얼굴을 다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꽃다발과 스티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주변의 시선이 금세 몰렸다. 빨간 장미꽃다발과 두명의 미남은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로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스티브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인적이 드문 곳까지 걸어가면서도 그들은 눈에 띄는 존재들이었다. 스티브는 멍청하게 로키에게 끌려가면서 걱정하고 있었다. 혹시 자신이 또 무언가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역시 꽃다발을 주는 행위는 너무 뒤떨어진 유행이었나. 로키는 대체 무엇에 화가 나있는가. 이번에는 로키를 기쁘게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등등의 여러 생각을 떠올리던 스티브는 돌연 서버린 로키의 행동에 로키를 뒤에서 껴안는 것 처럼 되어버렸다. 정식으로 데이트를 하기 전에 벌어진 스킨십에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스티브에게 어설프게 안긴 로키 또한 가슴이 뛰었다. 더구나 자신을 껴안은 채 장미를 주는 스티브의 행동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애써 표정을 정리했다. 로키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흥미거리가 되는 것이 싫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가장 화가났던 것은 따로 있었다. 아스가르드식으로 보자면 붉은 장미의 꽃말은 열렬한 사랑이었다. 농익은 연인끼리 주고 받는 메시지인 것이다. 로키는 그와 자신의 관계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와 단둘이 만나는 것은 오늘이 겨우 처음이지 않는가. 어쩌면 그리고 할 말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그 커다란 꽃다발이라니 창피하지도 않아? 혹은 그 장미가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잖아. 라던가. 

하지만 어떤 말도 너무 구차하게 느껴졌고 그 때문에 스티브에게도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스티브에게 할말을 고르려던 로키는 결국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껴안은 팔을 풀고 벤치에 앉아버렸다. 그런 로키를 바라보던 스티브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다. 

 "아까 못했던 말을 할게요."
 "-로키. 당신과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주어서 고마워요." 
 
 이 멍청이 같은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로키는 자신의 고민이 일순간에 날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스티브의 푸른 눈동자는 진지했고 그의 행동은 의심이란 것이 없었다. 그래, 이런 남자였다. 로키는 그의 꽃다발을 받았다. 향이 짙었다. 자신이 즐겨쓰던 향수와 비슷한 향이었다. 로키는 자신의 반응을 전전긍긍하며 지켜보는 스티브에게 말했다.

  "스티브. 다음부터는 꽃말을 알아봐."

(1년...도 더 넘은... 12년 로즈데이에 썼던 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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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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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타노스로키타노스

글/짧 2013. 10. 21. 00:13

Queen & Princess


소녀는 우주를 떠돌다 한 행성에 불시착하였다. 차가운 얼음과 바위들로 이루어진 행성은 평생을 좋은 것들에만 둘러싸여있던 소녀의 눈에는 쓰레기더미에 불과했지만 아무도 없다는 것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 그곳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현재 소녀에게는 고독이 필요했다. 자신에게 갑자기 닥쳐온 불행을 마음껏 음미할만한. 


그러나 몇걸음 걷지 않아 소녀의 동그란 이마에 주름이 갔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하는 일은 소녀에게 익숙치 않은 일이었다. 오직 홀로 있어야만 하는 행성에서 세상에서 제일 징그럽게 생겼을 괴물 무리들과 맞닥트렸다. 그들은 서리거인들보다 더 불결하고 천박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그 쉭쉭거리는 숨소리라니. 말이 통하지도 않는 야만적인 종족이었다. 소녀는 훌륭한 전사였지만 그들의 모습에 그만 싸울의욕이 사라졌다. 그저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소녀는 여왕을 만났다. 그녀가 여왕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녀만이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이런 미개한 종족에도 왕이라는 제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왕이란 오딘과 그리고 토르뿐이었다. 소녀는 얼굴을 굳혔다. 지금 이순간에도 아버지와 오라비를 떠올리는 자신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얼음과 바위들로 뒤덮인 행성의 가장 꼭대기에는 푸른 빛으로 빛나는 왕좌가 있었여왕은 소녀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붉은 피부와 푸른눈을 가진 여왕은 금발과 흰 피부를 가진 애시르들만 보던 로키의 눈에는 낯설게만 보였다. 그럼에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잠시 들겠금 하는 마성을 가지고 있었다. 소녀를 내려다보던 여왕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예상 외로 희고 가지런한 잇사이로 뱀처럼 유연한 혀가 오르락 내리락 했다. 여왕은 소녀의 눈에 스쳐지나가는 순수한 경멸을 읽어냈다.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없겠지."


여왕의 목소리는 위엄있었지만 고독의 밑바닥에서 들끓는 목소리였다. 소녀는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왕은 그녀보다 더 높이 있었고 더 오랫동안 고독한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로키는 짐짓 


“내가 너를 이해 할수 있을 리 없잖아?”


소녀는 도통 이해 할 수 없다는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아스가르드의 적법한 후계자였어. 저런 괴물들의 여왕으로 있는 너와 내가 같을리가 없잖아?"


소녀의 건방진 말투에 여왕의 발 아래 숨죽이고 있던 그녀의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고개를 들고 저마다 흉측한 아가미사이로 점액질을 뿜어댔다. 그러나 흥분한 수천의 병사들 사이에 둘러싸여있어도 소녀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여왕은 소녀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저 보잘것없고 연약한 생명체가 어떻게 감히 자신에게 대들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뻣뻣히 들고 있는 소녀에게 흥미로운 감정이 생겼다. 여왕의 가늘고 미끌거리는 손가락이 톡톡 왕좌를 두들겼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권력자들이 그러하듯 여왕은 결코 관대하지 않았다. 빈번하게 화를 냈으며 그때마다 수많은 행성들이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져갔다. 하지만 저 건방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에게는 화가 나지 않았다.


"귀여운 아이야. 선물을 주고 싶구나."


여왕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그녀의 발치에 무릎꿇고 있던 한 병사가 석관을 가져다 바쳤다. 여왕의 손짓에 석관이 열리자 그 안에서 황금과 푸른 보석으로 이루어진 셉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는 그것이 홀 과 같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궁니르나 토르의 묠니르와 같은 무기가 자신에게 생긴 것에 기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여왕은 소녀의 미소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악한 소녀는 여왕이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알아차렸다.


"네, 용모가 변했구나."


여왕은 크게 놀라워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푸른 눈을 닮은 피부와 자신의 붉은 피부를 닮은 붉은 눈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소녀는 여왕의 푸른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알게 되고, 당신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 나도, 당신과 같은."


봄날의 새싹처럼 반짝이던 초록빛 눈동자는 붉은 빛으로, 그리고 어느 새 겨울의 서리처럼 푸른 빛으로 변해버렸다. 하늘이나 바다같은 색이 아니라 한없이 차갑기만 한 푸른색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와 닮은.


"괴물이 되어버렸나봐."


여왕은 소녀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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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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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회장중구?] 냄새

글/짧 2013. 8. 11. 16:38


냄새

 

열 아홉. 남자를 만났던 내 나이가 그쯤이었을 거다. 중학교도 때려치우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만났다. 남자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그래서 따라 갔던 것 같다. 기집년도 아니고 쪽팔려서 진짜. 뭐 다른 이유를 대보자면 남자를 따라가면 그치처럼 좋은 양복과 구두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남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좋았다. 남자를 따라가면 그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길바닥에서 태어난 돼먹지 못한 인간이었기에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가져야만 직성이 풀렸다. 저 남자 밑으로 들어가면 가질 수 있는 게 많아질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싸움에는 자신 있었다. 돈 떼먹은 돼지 같은 놈들의 주둥아리에 시멘트를 붓고 쥐좆같은 놈들한테 기집년들을 바쳤다. 욕심이 점점 났다. 내 예상대로 남자는 많은 것을 내게 주었다. 즐거웠다. 남자는 흡족해했다. 가끔씩 한숨을 쉬었지만 그뿐이었다. 한숨은 담배연기로 가려졌고 남자의 위신이 흔들릴 일 따위는 없었다.

 

남자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그럴 때면 남자는 나를 불렀다. 남자는 내가 자기의 첫 사람이라고 했다. 나보다 먼저 조직에 들어간 이들은 많았다. 그러나 남자가 믿었던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나보다 먼저 들어왔던 놈들은 어느 순간 수술을 당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있었다. 남자는 이상하게도 식구들을 잘 믿지 못했다. 아니 아무도 안 믿었다는 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불만이 많은 이들도 있었지만 내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린 놈들이 어떤 식으로 나자빠졌는지를 알고 난 이후로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몇몇 놈들은 뒤에서 남자와 나의 관계에 대해 더러운 입을 놀렸지만 남자도 나도 그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무식한 새끼들. 남자는 여자를 좋아했다. 그것도 제 딸 뻘의 어린 여자애를 좋아했다. 여자들은 자주 갈아치워졌다. 그럼에도 철없는 년들은 자신의 젊음만 믿고 끝없이 욕심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파트 하나, 가게 하나로 정리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패악을 부리기도 했다. 그 뒤처리도 내 몫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가 죽기직전 만나러 가려 했던 여자가 생각났다. 용케도 몇 년 째 남자의 곁에 있던 여자였다. 여자는 얼굴이나 몸매가 끝내준다던가 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여자를 꽤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자연스레 나도 여자에겐 좀 더 조심히 굴었는데 그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여자가 남자와 닮은 냄새가 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남자는 우아한 것을 좋아했다. 차분한 말투, 바른 행동거지를 중요시 여겼고 문신을 가진 사람들은 천박하단 시선으로 내려 보았다. 점차 우리 조직에는 문신한 새끼들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조폭새끼가 까탈스럽게 군다며 남자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던 선배들도 결국에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밀려나가는 강물이었다. 남자가, 아니 우리가 옳은 것이였다. 나는 남자가 자랑스러웠다. 남자를 닮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정청 그 새끼를 조직에 들였을 때는 이 남자가 드디어 노망이라도 난 게 아닌가 싶었다. 천박한 말투와 싸구려 취향들. 뒷골목의 들개로 자란 흔적이 역력한 정청은 남자가 좋아하는 타입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정청이 좆나게 싫었다. 뭐가 싫었냐면 그래, 나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향수냄새로도 가려지지 않는 나의 냄새는 문득문득 나의 기분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그런 주제에 그 새끼는 가지고 싶은 것을 너무 손쉽게 꿀꺽꿀꺽 삼켜댔다. 아귀 같은 새끼. 제 옆에 이자성을 끼고 사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성에게는 남자와 같은 냄새가 났다. 정청보다는 이 새끼가 더 두려웠다. 정작 남자는 이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언제나 조심성 많고 의심 많던 남자가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같은 냄새가 낫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제 냄새라고 착각했었는지도 모르지. 나는 끝까지 자성을 아군으로 삼아야할지, 아니면 적으로 삼아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결국 이 사단이 난 거다.


시이발.


입에서 욕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내가 욕하는 걸 싫어했다. 입에서 쌍자음이 나올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그래도 내가 욕할 수 있는 건 이뿐이지. 안 그렀수? 영감? 맑은 하늘이었다. 필터 끝까지 담배를 빨아 당겼다. 허파안으로 알싸한 향이 맴돌았다. 남자는 담배를 피는 주제에 담배냄새를 싫어했다. 결국 그 여자를 만나면서 담배도 끊었다. 이 맛있는 걸 끊다니. 멍청한 노인네. 만수무강하실려고 담배도 끊어놓고 결국 그렇게 허무하게 가버리다니.


죽기 딱 좋은 날씨네.”


사실 나는 무서웠다. 죽는게 무서운 게 아니라 그 새끼들한테 개처럼 매달리고 목숨을 구걸할까봐. 태생이 태생인지라 더럽고 비굴한 본성이 나올까봐 무서웠다. 그런 쪽팔리는 짓은 남자를 처음 만났던 날 그의 다리에 매달렸던 것만으로도 족했다. 이를 악물었다. 신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턱이 다 뻑뻑해지도록 이를 꽉 물었다. 아찔했다. 부운 눈 사이로 땅바닥이 보였다. 너무 높은 곳까지 올라와버렸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이제 곧 볼 수 있겠구려. 영감.


-

준휘님. 온리전 힘내세요!!!! 석회장중구? 라고 해야하나 무언가의 번데기입니다...하하하 너무 늦게 드려서 죄송합니다ㅜㅜㅜ 석회장중구...에요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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