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팁로키] 모순 2

글/긴 2018. 2. 28. 17:48

2015.06 스팁로키 앤솔로지 <창과 방패>




* * *



웨스트 윙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잠깐이나마 활짝 열어뒀던 창문들은 다시 철문이 덧대어졌고 모두가 사태파악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근처 전력소가 파괴되기라도 한 건지 어느 곳보다 밝아야 할 백악관의 전등들은 깜빡이며 힘겹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움 사이에서 스티브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수석비서인 게리는 재빠르게 이번 사건에 대한 상황보고를 했다.


“…피해가 만만찮았지만 다행이 민간인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그 말은 즉, 그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린 경호원들은 살아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스티브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단호한 손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모두 다 이 방에서 나가주세요.”

“하지만 현재 상황의 위험함을 생각하면 혼자 계시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스티브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오래도록 군인으로 살아왔기에 말투가 딱딱하고 고지식한 사고방식을 가지긴 했어도 일적인 부분에서만 냉정했지 기본적으로는 따뜻하고 상냥한 남자였다. 아무리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화를 내기보다 체육관의 샌드백을 터트리는 것으로 해소 할 정도였다. 그러나 때로 스티브는 딴사람처럼 차갑게 굴었는데 대부분의 이유는 로키였다. 로키의 일방적인 살육이 끝나고 나면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혼자 있기를 원했고 이럴 때는 그의 뜻대로 홀로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 나름의 자기반성 시간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보좌관들은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났다. 그러나 태산과도 같던 어깨가 어둠 속에 잠기는 것을 볼 때마다 가끔씩, 그가 자살이라도 하는 것이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금세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할 헛된 망상으로 치부할 뿐이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캡틴아메리카였기에.


“이제 나와.”


허공을 쳐다보며 낮게 중얼거리는 스티브에게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흐트러진 윗옷을 아예 벗어버리고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바닥으로 던지고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휘휘 돌렸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가 취했다고 여겼겠지만 캡틴아메리카를 취하게 만드는 술은 없었다. 취할 수 없었지만 스티브는 오늘 같은 날이면 예전의 습관대로 술을 마셨다. 그 앞에는 자신의 잔과 오늘 자신을 막아섰던 경호원들의 숫자만큼의 술잔이 놓여있었다. 술은 누군가를 기리는데 좋은 도구였다. 잘은 몰랐지만 그들 가운데는 결혼을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었고 당연히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스티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당장 나와!”


스티브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위스키 병을 벽에 던졌다. 아니, 던졌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산산조각이 나야 할 병이 실로 매달아 놓은 것처럼 공중에서 멈추었다.


“이런, 조심해야지. 여기 가구들 대부분이 미국역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함부로 대하면 안 되지. 여기가 스미소니언박물관이나 다름없다는 걸 너도 잘 알면서. 오, 물론 너를 포함해서 말이야.”

“로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나타난 이는 몇 시간 전만해도 캡틴아메리카와 대치하던 그의 최대의 적, 로키였다. 항상 과장 된 뿔 투구와 단단한 갑옷을 입고 나타나던 로키였지만 지금은 제게 꼭 맞는 고급스러운 정장과 녹색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모델로 알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들만큼 로키에게 잘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로키는 허공에 떠있던 병을 잡아 스티브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는 그 곁에 앉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 스티브. 내가 보고 싶었어?”


로키와 마주 앉은 캡틴아메리카라니. 가장 의심이 많은 음모론자도 감히 꺼내지 못할 이야기였다. 세기의 악당과 세기의 영웅의 밀회였다. 스티브는 이를 악물고 로키를 향해 말했다. 


“왜 그들을 죽인거지? 너라면 죽이지 않을 수 있었잖아!”


마치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로키는 허리를 굽히며 크게 웃었다. 몇 번이나 파안대소한 로키는 혀를 끌끌 차며 스티브의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있는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오. 스티브 로저스. 아직도 이렇게 순진하다니!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선 공포심을! 공포를 얻기 위해선 죽음을 봐야하는 것쯤은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아?”


스티브는 로키의 손길을 거칠게 쳐낸 뒤 눈을 감고 그를 등졌다. 스티브에게 있어 침묵은 곧 무언의 동의란 것을 로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현재 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것도 잘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비웃던 로키는 갑자기 불안한 기색으로 스티브의 눈치를 살피는 듯 눈썹을 늘어뜨리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스티브. 아주 작은 실수였어. 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잖아?”


냉정히 돌아선 스티브의 등을 로키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리다 마치 굳게 닫힌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듯 톡톡 두드렸다. 그러나 스티브가 돌아서기는커녕 벌떡 일어나 아예 뒤돌아 나가려는 순간, 스티브의 소매 끝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스티브. 나를 내치지마.”


흔들리던 녹색 눈동자의 색이 흐릿해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해보였지만 로키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 다시 환하게 웃어보였다. 여전히 쳐진 눈썹과 잘게 떨리는 입 꼬리가 억지웃음이란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스티브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지난 번 눈물을 흘리던 로키에게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그의 눈물이라고 말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는 탓이었다. 


스티브는 강한 손길로 로키의 섬약해 보이는 턱을 그러잡았다. 아픔을 느꼈는지 로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한순간이었을 뿐, 이내 순종적인 태도로 스티브를 올려다보았다. 로키는 그의 처분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광기로 지독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어디로 사라지고 녹색눈동자에는 초식동물처럼 유순함을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좀 전까지 사람들의 피로 손을 물들인 채 웃어젖히던 악당은 어디로 가고 사랑받기 원하는 어린아이만 남았는가. 이 애정을 갈망하는 눈동자를 마주 할 때 마다, 스티브는 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자꾸 생겨서는 안 될 감정들이 피어났다. 


스티브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다른 한손으로 로키의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내리자 컥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울렁이는 로키의 목울대가 스티브의 눈에 들어왔다. 1인치만 손을 내려 지금 당장 곧게 뻗은, 연약하고 흰 네 목을 부러트리면,

“다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자신을 향한 명백한 살의에도 부구하고 로키는 스티브를 저지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로키의 까만 머리통이 스티브의 손길에 따라 거칠게 흔들렸다. 로키는 희게 질린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결국 애원의 말을 꺼냈다. 


“스티브, 제발…….”


하지만 로키의 애원이 자신을 상처 입히지 말아달라는 것이 아님을, 그 눈동자가 걱정하는 것은 온전히 스티브 자신이었음을 스티브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혼란스러웠다. 너는 악당이야. 그것도 아주 못되고 악마 같은. 지금은 내 앞에서 울면서 애정을 갈구하고 있지만 사실 너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그리고 나는.


“그만하고, 나를 안아줘. 스티브”


그리고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 * *



기이한 푸른색이 감도는 세계가 자신을 덮쳤다고 생각한 순간, 스티브는 자신이 처음 보는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무無의 공간이었다. 제 아무리 기이한일을 많이 겪어본 자신이라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모든 것이 암흑이었고 오로지 저만이 뚜렷이 보일 뿐이었다. 잠깐의 당황함을 뒤로 한 채 스티브는 이내 걱정하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은 떨어지고 있던 발키리호에 있었다. 간신히 레드스컬을 저지했지만 해결해야할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발키리호는 폭탄을 가득 실은 채 뉴욕으로 가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폭탄들이 터진다면 수만명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었다. 스티브는 당장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조건 앞을 향해 달렸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네 죄책감이 덜어진다면야.”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내는 중세시대에나 입을법한 옷차림을 하고서는 저를 향해서 웃고 있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의자에 앉은 것처럼 허공에 떠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떠있는 것이 놀라웠지만 이미 이상한 일은 충분히 겪은 참이었다. 스티브는 방패를 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남자는 스티브의 모습이 가당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코웃음을 쳤다. 남자가 레드스컬의 한편인가라고 생각했었건만 그의 관심 없어 보이는 태도에 자세를 풀고 질문했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시간과 공간의 틈. 세계와 세계를 연결해주는 통로. 그리고 존재해서도 안 되고 존재하지도 않는 장소.”

“그런 말도 안 되는! 여기에 당신과 내가 존재하는데?” 


스티브의 말을 들은 남자는 어리석은 것을 보는 듯 혀를 차다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왔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걸 보니 필멸자로군. 여기까지 온 인간은 처음 이야. 아니, 나 외에는 처음 온 존재지.”


그제야 흥미롭다는 듯 스티브의 눈을 쳐다보던 남자는 당당하게 가슴을 피며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아스가르드의 로키다.”


여유롭게 자기소개나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놀랍고 분명 제 인생에 있어서 처음 있는 기이한 일이었지만 관심을 둘만큼의 여유가 스티브에게는 없었다. 분명 뉴욕으로 가던 비행선의 방향을 틀어 남극으로 가고 있었고 페기와 대화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눈앞이 푸른색으로 물들더니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지금 비행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뉴욕? 아니면 바다 속으로? 이건 꿈일까? 하지만 아직도 전투의 여파로 욱씬거리는 몸의 통증이 현실임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이제 알았다. 테서렉트 때문이었군. 공간을 열어주는 물건이지.”


스티브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로키는 제 의문이 풀린 것에 퍽 즐거워했다. 보지 않고도 테서렉트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로키를 보며 아마도 이 곳을 빠져나가는 것도 그가 알 것이라고 여긴 스티브가 로키를 붙들고 캐물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 폭탄을 실은 비행선이 뉴욕을 향해 가고 있어요. 제가 그걸 막아야합니다. 혹시 돌아가는 방법을 아십니까?”


어느새 스티브에게서 빠져나온 로키는 스티브의 손이 닿았던 손목을 거칠게 닦아내며 화를 내었다.


“돌아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텐데? 너는 외롭게 죽을 거야!”


로키는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티브의 운명을 단언했다. 분명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신은 외롭게 죽지 않을 것이었다. 스티브는 제 품안에서 나침반을 꺼내들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사랑이 될 그녀의 사진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스티브는 로키를 향해 단언했다.


“제가 선택한 것이니. 그것이 제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것입니다.”


담담한 스티브의 말에 로키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는, 내가 아는 자들을 많이 닮았군.”


그 말을 내뱉은 로키는 살짝 고개를 모로 틀어 제 슬픔을 감추려는 듯 했다. 그러나 고전 명화처럼 그의 처연함이 스티브의 마음속에 깊게 새겨졌다. 깊고 짙은 녹색의 눈동자 속에서 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감정은 오래도록 켜켜이 쌓여 그 형태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 것처럼 보였다. 아마 눈앞의 남자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자칫하면 저 심연과도 같은 곳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었다. 스티브는 떨치고 나와야했다. 이곳에서 사로잡힐 수는 없었다.


“필멸자, 네 이름이 뭐지?”

“…스티브, 스티브 로저스.”

“좋아, 스티브. 네 소원을 들어주겠어. 소원을 말해봐.”


로키는 스티브를 바라보며 자비로운 신처럼 웃었다. 저 남자가 자신을 구해주고 세상을 구해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게 끝날 수 있지 않을까? 미련을 털었다고 생각했지만 실낱같은 가능성이 보이자 다시 희망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스티브는 로키를 향해 세 가지 소원을 빌었다.


“내가 타고 있던 비행선이 뉴욕이 아닌 곳으로 떨어지는 것. 전쟁이 끝나는 것. 그리고 페기를 만나는 것.”

“좋아, 네 소원을 들어주지.”


그가 손을 한번 휘두르자 사방이 밝아져왔다. 신이 빛이 있으리라 명한 것처럼 순간 사방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빛의 세계가 스티브와 로키를 덮쳤고 순식간에 그들을 집어삼켰다. 그것이 로키와 스티브의 첫 만남이었다.


스티브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페기와 약속했던 토요일 8시, 스토크 클럽 앞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 스티브를 발견한 페기는 그의 생환에 눈물을 흘렸고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들은 이 놀라운 기적을 마음껏 누렸다. 스티브는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음에 신이 진정 존재했음을 진실로 기뻐했다. 그러나 스티브의 소원은 지독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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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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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로키] 모순 1

글/긴 2018. 2. 23. 15:58

2015.06 스팁로키 앤솔로지 <창과 방패>



모순











거리엔 어둠이 떠다녔고 새벽이 오는 것은 머나 먼 일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숨죽인 채 집안에 웅크리고 누워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고된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것은 꿈이었으니 누구든 이 시간을 마음껏 즐기리라. 그러나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캡틴아메리카의 하루는 끝을 모르고 계속 되풀이되고 있었다. 


간단한 운동을 마치고 오벌 오피스(Oval Office)에 들어온 캡틴아메리카는 짙은 밤나무 색 책상 중앙에 독수리문양이 멋지게 새겨진 대통령 집무실 책상(The Resolute Desk)이 아닌 창가에 걸터앉아 손바닥 크기의 수첩을 펼쳤다. 화려하고 웅장한 집무실은 그에게 어색하고 불편한터라 그는 연설문을 쓰거나 사색을 할 때면 이렇게 종종 창가에 앉곤 했다. 보좌관들은 그런 그를 위해 그리고 선전용으로 써먹기 위해 좀 더 소박한 분위기의 새로운 집무실을 하나 짓자고 건의했으나 스티브는 천성적으로 검소함과 간편함을 추구했고 국가에서 대대적으로 절약캠페인을 펼치는 때였기에 단칼에 거절을 했었다. 입으로만 공약을 내세우는 것은 그의 성격이 못되었다. 게다가 캡틴아메리카에게만큼은 백악관 웨스트 윙이란 여전히 국가를 상징하는 곳이었기에 그런 곳을 차지하고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스티브는 충분히 제 손에 길들여져 익숙한 만년필의 무게를 느끼며 손을 놀렸다. 어린 시절 겪었던 대공황과 이후에 일어난 2차 대공황까지 견딘 그가 사치를 부리는 것은 오직 필기구뿐이었다. 모든 것이 자동화 된 세상인데다 버튼 한번만 누르면 당장이라도 달려와 일정을 달달 외워 불러줄 비서들이 옆방에 대기 중이었지만 캡틴아메리카는 예전부터 지금 대통령이란 자리에 오른 뒤에도 일정을 확인하고 다시 수첩에 쓰는 일을 남에게 맡긴 적이 단 한번 도 없었다. 그는 아날로그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시대의 사람이었고 자신의 할 일은 제 손으로 직접 해야 안심을 하곤 했다. 스티브는 뒤에서 자신을‘아무도 믿지 않는 노인네’라며 손가락질 하는 것은 알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사람들의 입방아 때문에 수작업이 주는 안정감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며 무언가를 직접 쓰는 행위는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옛날의‘스티브 로저스’의 유일한 흔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티브는 자신이 이제는 늙었다는 것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임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아침 생방송, 유럽전쟁 참전자들과의 조찬, 재개장한 전쟁박물관의 축하연설, 캐나다 연합군과의 회담, 내년도 국방부 예산 편성 논의, 새로운 선전영상 촬영….


벌써 노트를 몇 장이나 가득 채웠지만 끝나지 않는 일정들을 들여다보며 스티브는 문득 피로감을 느꼈다. 하루에 3시간도 자지 못하는 생활이 벌써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이제는 그만둘 때라고도 스티브는 생각했지만 재작년에 통과된 대통령의 연임 관련 법안은 연임의 제한을 기존의 두 번에서 그 제한횟수를 없앴다. 현재 선거일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지만 선거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거의 없었다. 결과를 아는 선거만큼 지루한 것도 없었다. 현재 미국은 선거제를 선택했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였지만 언제나 결론은 나있었다. 


캡틴아메리카가 당신을 지켜드립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영웅인 캡틴아메리카의 보호아래에 들어가길 원했다. 애석하게도 스티브는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매일의 업무는 과중했고 복잡하게 얽혀있었으며 그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허투루 넘길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랬기에 혼자 애쓰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선택 하나하나에 달려있는 목숨들을 생각하면 남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생활이 10년이 넘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미 나가떨어졌을 테지만 그를 수퍼솔져로 만들어준 혈청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이 신비로운 약물은 그에게 보통의 인간과 다른 신체능력을 주었고 그 덕분에 견뎌낼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 아브라함 박사가 연약하고 어린병사인 스티브에게 혈청을 권유했을 때 이런 일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왜 저죠?(why me?)’


스티브는 실험 전날 밤, 박사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왜 나였을까. 수 천 번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질문이었다. 아브라함 박사는 스티브를 바라보며 그가 좋은 사람이기에, 힘의 가치를 알고 연민을 느낄 줄 알기 때문이라고 답해주었다.


젠장. 스티브는 욕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빗어 넘겼다. 요즘 들어 과거를 그리워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모든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건만 사실은 아무것도 잊지 못했다. 아마 이제 정말로 늙고 지쳐 물러날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혈청은 노화를 느리게 해주었고 그에게 여전히 젊고 건강한 육체를 주었지만 영생을 주지는 못했다. 정말 늙은이가 다 되었군. 자꾸 옛 생각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스티브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수첩은 접어두고 이제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전쟁박물관 개관식에서의 연설문을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언론매체와 일반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오는 자리였으며 그것을 떠나 이번 연설은 중요했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티브는 잠시 연설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진을 찍는 기자들과 말간 얼굴을 한 어린아이부터 참전 군인으로 보이는 노인들까지 스티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스티브는 손을 한번 쥐었다 폈다. 단상 위에 서있노라면 사람들의 고통과 그 고통을 끝내주리란 자신을 향한 기대감이 손에 베일 듯 전해져왔다.


“만약 온 나라 전체에서 당신만이 한 방향의 길을 택하면, 그리고 당신의 신념이 그것을 옳은 길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조국에게 임무를 다한 것이다. 머리를 꼿꼿이 들어라. 부끄러워할 게 없다.”


오랜 시간동안 스티브의 삶의 지침이 되어준 말이었다. 지난 50년간 줄곧 해온 일들 전부가 모두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또 다시 시작 된 전쟁들 이후에도, 수많은 이들의 죽음에도, 페기와의 불화와 헤어짐 그리고 그녀의 죽음 뒤에도. 캡틴아메리카는 제 신념을 위해서 머리를 꼿꼿이 들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제 신념만은 가슴속에 남아 스티브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책임져야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조국과 제 동포를 지키는 것, 그것들은 저의 사사로운 것들은 모조리 뒤에 놓을 만큼 중요했다. 

현재 눈앞의 사람들은 모두 지쳐있었다. 수십 년간 많은 전쟁을 치렀기에 소중한 이들을 잃었고 적대적인 타국의 견제에 사람들은 오랜 기간 가난에 시달렸었다. 몰락, 상실, 고통이 발전시킨 비애감은 사람들을 새로운 패배와 다른 형태의 가난으로 몰아넣었기에 스티브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일어서라고, 나아가야한다고. 그의 진정성 깊은 연설에 사람들의 안색이 밝아지고 있었을 때, 공포에 젖은 새된 비명소리가 캡틴아메리카와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내리꽂혔다.


“끼야아아아악!”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새카만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기묘한 현상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숨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가장 가까운 방공호를 찾기 시작했다. 이내 사이렌이 왕왕거리며 울리자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집에서 귀하거나 값이 나가는 것을 챙길 틈도 없이 오직 자기 가족들의 손을 부여잡고 최대한 멀리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빛나는 황금빛 갑옷과 위협적으로 솟은 황금색 뿔 투구를 쓴 남자는 갑작스레 나타나 우아한 몸짓으로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튀어나왔고 아스팔트도로 위로 화염이 번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라도 하는 듯 손을 움직이며 불꽃을 뿜어냈다. 남자는 희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손이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나가떨어진 목숨이 수십이었고 지금껏 수천, 수만에 이르렀다. 남자는 공중에 뜬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 이름은 로키다. 너희들의 어둠이자 분노며 두려움이자 죽음이다.”


로키의 진한 녹색의 눈은 광기로 빛났으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커질 때마다 입 꼬리를 잔뜩 당겨 환히 웃었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접한 사람들은 마치 메두사의 눈을 마주한 것 마냥 공포에 몸을 굳히고 움직이지 못했다.


“로키!”


태연자약하게 공중에 떠 있던 로키의 몸이 흔들리며 땅 아래로 떨어졌다. 캡틴아메리카가 던진 방패가 로키의 투구 끝에 부딪혔다 다시 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스티브는 로키의 주의를 사람들이 아닌 자신에게로 돌리고자 했고 그의 작전대로 로키의 관심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스티브를 막아서는 것은 로키가 아닌 그의 곁에 있던 경호원들이었다.


“모두 대통령님을 보호해!”


모두 전직 군인으로 이루어졌으며 자신의 영웅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던 용감한 애국자들이 몸을 날려 스티브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들은 스티브를 로키에게서 보호하고자 했다. 


“이런, 캡틴아메리카. 이제는 방패가 아니라 사람들 뒤에 숨는 건가?”


로키는 스티브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비웃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힘을 제대로 쓴다면 경호원들을 제치고 로키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으나 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알았기에 차마 그들을 물릴 칠 수 없었다. 십년 전이었다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직접 방패를 들고 악당과 싸웠을 캡틴아메리카였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방패를 제대로 써먹어보지도 못한 채 캡틴아메리카는 자신의 보좌관들에게 떠밀려 물러나야만 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전히 강인했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지위는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제 캡틴아메리카는 미국 그 자체였다.


“캡틴아메리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캡틴아메리카를 보며 로키는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씨근덕거리며 영웅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로키가 자신의 창을 들어 사방으로 휘두르자 순식간에 건물들이 땅 아래로 무너졌고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이 위로 솟구쳤다 다시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먼 곳에서 가까운 곳까지 메아리쳤다. 좀 전까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던 거리의 풍경은 순식간에 지옥도로 변해버렸다. 


잔뜩 파괴를 즐기고 난 로키가 이내 자취를 감추었지만 공포심은 여전히 남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공포, 그것이 로키의 의도라는 것을 알았지만 두려움을 거두고 투쟁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사람들은 너무도 오랜 시간 죽음을 겪었다. 그나마 그들이 버틸 수 있던 건 그들의 영웅인 캡틴아메리카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그리고 그들의 영웅이자 희망인 캡틴아메리카에게 감사했다. 스티브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쳐다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나는 영웅이 아니야. 라고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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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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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친분들께서 챙겨주신 생일 연성들ㅠㅠㅠ제가 이렇게 매번 받기만 하네요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매일 매일 생일이었으면 좋겠네요ㅠㅠㅠㅠㅠ진짜 감사드려요ㅠㅠㅠㅠ 생일 하루종일 행복했던ㅠㅠ

* 자랑주의



블루님ㅠㅠㅠㅠㅠㅠ 고화질까지 따로 챙겨주시고ㅠㅠㅠ그건 나만 볼꺼야ㅠㅠㅠ진짜ㅠㅠㅠ막 달달하고ㅠㅠ 아련하고 버드키슨데ㅠㅠㅠ설레고ㅠㅠㅠ


마르샤님ㅠㅠㅠㅠ그림은 언제나 기여워ㅠㅠㅠㅠ귀여운ㅠㅠㅠㅠ 애기로키랑 애기캡아ㅠㅠㅠㅠ말샤님은 진짜 손빠르고 귀여운데 핵심을 짚는 정확하심이 있어ㅠㅠㅠㅠㅠ


만타님ㅠㅠㅠ만타님ㅠㅠㅠ진짜ㅠㅠㅠㅠ제게 주신 게 첫 스팁로키라니ㅠㅠㅠ제가 만타님의 처음을 가지고 갔...(///)캡아 존잘ㅠㅠㅠ거기다 스팁 꿀떨어지는 눈길ㅠㅠㅠ로키의 개구진 미소랑ㅠㅠㅠ아 넘 좋아ㅠㅠ사랑해요ㅠㅠㅠ

클모님ㅠㅠㅠㅠ로키가 가운을 입고 있는 걸 보세요. 누드! ㅠㅠㅠ누드화였어ㅠㅠㅠㅠ바들바드류ㅠㅠㅠ설저유ㅠㅠㅠ섬세해ㅠㅠㅠㅠ요망한 로키ㅠㅠㅠㅠ화가 스팁 속성 너무 좋아요ㅠㅠㅠㅠ


카나레님ㅠㅠㅠㅠㅠㅠㅠ카날님이 주신 스팁로키ㅠㅠㅠ심지어 로키가 서리거버젼이야ㅠㅠㅠ캡아수트ㅠㅠㅠㅠ큽ㅠㅠㅠ로키 눈 내리깔은 것 좀 봐여ㅠㅠㅠ 캡아 상처투성이인데 뒤에 숨어서ㅠㅠㅠ뭐죠??이거ㅠㅠㅠㅠ아 넘 좋네ㅠㅠ



진짜 매일 생일이었으면 좋겠어요ㅠㅠㅠㅠㅠ감사합니다ㅠㅠㅠ연성뿐만아니라 멘션주셔서 축하해주신 분들 넘 상냥하셔ㅠㅠㅠ맨날 생일인거 티내고 다니는 뻔뻔한 인간이긴 하지만ㅠㅠㅠ진짜ㅠㅠㅠ감사드립니다ㅠㅠㅠ 태어나길 잘했어ㅠㅠㅠㅠ



유카님ㅜㅜㅜㅜ글ㅠㅠㅠ감사합니다ㅠㅠㅠ 진짜ㅠㅠㅠㅠ너무 좋아요ㅠㅠㅠㅠ유카님 사랑합니ㅏㄷ

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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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ht, night

 

 

 

 

 

 

제대로잠들었던 날이 언제였던가. 불면의 밤이 열흘이 넘어가고 나서야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앓는 소리를 하기에는 뉴욕에 사는 사람들 중 절반은 자의나 타의에 의해 잠들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스물 네 시간 내내 발광하는 거리의 네온사인들이 그 증거였다. 불면증은 현대인에게 결코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며칠 전만해도 밤을 꼬박 지새우고 창문 너머로 동이 터오는 것을 보며 전시회 준비에 도움이 되리라고 쉽게 생각했다. 누구나 한때 홍역을 앓듯이 불면증도 그처럼 짧게 지나가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낙관이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부족한 수면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 억지로 쑤셔 넣었던 음식들은 수면부족에 혀가 굳어 맛마저 느끼지 못하게 되자 도리어 고문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건강해보이지 않는다고 핀잔 듣기 일쑤였던 마른 몸은 더욱 살이 내려앉아 심지어 이런 일에 둔감한 형마저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허리사이즈는 2인치가 줄었고 피부는 까칠하고 푸석해졌다. 안색은 시체처럼 납빛으로 물들었다. 그즈음의 나는 발작처럼 캔버스를 찢어버리기 일쑤였다.

 

 

***

 

오랜만이네.”

갑작스럽게 찾아 온 바튼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무언가의 증거를 찾으려는 듯 작업실 이곳저곳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결국 그에게 망가진 캔버스들을 들키고 나서야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 전시회에 낼 작품이 없다는 것을 시인했다. 역시 그를 속일 수는 없었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나를 담당해오던 바튼의 눈썰미가 아주 좋다는 사실은 업계에서도 정평이 나있다.

이번 전시회는 미루는 게 어떨까? 대타도 구해놨으니 걱정하지 말고.”

나의 상황을 어떻게 알았는지 바튼은 내게 먼저 전시회의 연기를 제안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안도를 느꼈다. 평소의 나라면 그런 얘기를 듣자마자 이 정도도 못해낼 것 같았냐, 어떻게든 제 시간 안에 끝내겠다며 화를 냈을 테지만 전시하기로 한 스무 점의 작품 중 반절도 완성하지 못한 빈 캔버스들을 보며 어쩌면 나는 그가 먼저 전시회를 미뤄주기를, 아니면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먼저 전시회를 미룰 수는 없었다. 결국 못이기는 척 바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유능한 사람이었고 그의 판단이 틀린 적은 거의 없었다. 몇 달 전 바튼은 내게 분명한 어조로 말했었다. 이번 전시회를 취소하자고.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전시회를 강행한 것은 나였다. 이번에도 그는 옳았다.

, 로키. 그러니까 말이야. 괜찮아?”

대충 계약서를 훑어 본 뒤 그를 배웅했다. 바튼은 현관앞에 서서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이런 걱정은 우리사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런 어색한 상황은 질색이었다. 그만큼 내 꼴이 말이 아닌 거겠지. 바튼을 얼른 보내고 침대에 파묻혀 잠들고 싶었다. 바튼의 걱정 어린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에게 괜찮다는 말을 할 여유도없었다. 나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되묻던 바튼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어깨를 몇 번 토닥이고서야 밖으로 나갔다.


***

 

바튼의 훌륭한 일처리 덕분에 별다른 위약금 없이 전시회의 연기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안 듯 모든 준비를 끝내둔 느낌이었다. 내 이름 대신 다른 사람의 이름이 올라간 포스터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숨은 여러 감정을 담고 있었다. 서운함, 홀가분함. 그리고 약간의 기대. 마감에 대한 스트레스로 잠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 굴레에서 벗어난 지금 잠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잠들 수 없는 밤은 지속되었다.

아침이면 미친 사람마냥 속을 게워낼 때까지 센트럴파크를 몇 바퀴씩 돌았지만 잠이 들기는커녕 갑작스러운 과도한 운동에 몸이 놀랐는지 손끝에서 발끝까지 뼈마디마디가 쑤시는 고통에 더욱 잠을 잘 수 없었다. 녹초가 된 몸이 물 먹은 솜 마냥 축축 늘어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잠은 오지 않았다. 운동과 식이요법,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들에 매달려 잘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다녔다. 모두 다 허사로 돌아갔다. 따뜻한 우유나 지루한 음악 따위는 불쾌감만을 불러일으켰고 CTMRI로 온 몸을 죄다 헤집어 보았지만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의사들은 모두 정신적인 부분을 짚고 넘어갔다. 그들의 변명에 지친 나는 결국 집안의 주치의였던 배너를 찾아갔다.

로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니까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된 상담을 받는 것이 나을거예요.

배너는 약에 의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며 처방을 꺼려했지만 잠들지 못해 겨울의 나뭇가지마냥 말라 비틀어진 내 몰골을 보며 마지막에는 항상 처방전을 내주었다. 말은 냉정하게 했지만 그래도 처방전에 쓰여 있는 날짜 간격을 짧게 하여 방문을 유도하는 걸 보면 그가 얼마나 나를 생각하고 챙기는지 알기에 충분했다.

처음 몇 번은 구걸하다시피 수면유도제를 원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마저도 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 희고 작은 알약들이 주던 잠의 달콤함을 그리워하며 나는 습관처럼 알약을 집어 삼키고는 했다. 그러나 그 짓도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응급실에 들어가 위세척을 받은 뒤로부터는 할 수 없었다. 자살시도를 한 것이 아니냐는 질책과 지금의 상황을 토르에게 알려야겠다는 이야기에 배너를 찾아가는 것도 관두었다. 이제 다시는 약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내게 배너는 걱정이 가득담긴 말투로 말했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어요. 로키, 이제 그만 그를 놔줘요.”

배너는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충고했지만 좋게 말해서 섬세했고 사실은 굶주린 야생동물마냥 예민하기 짝이 없는 제 성질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가장 잘 알았기에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지금까지 이런 예민한 성격을 원망해 본 적 없었으나 지금만큼은 저주스러울 정도였다.

 

***

 

사실, 엄연히 따지자면 잠들지 않은 날은 없었다. 불면은 켜켜이 쌓이다 기면으로 제 형태를 바꾸었다.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도 혹은 길을 걷다가도 까무룩 잠이 들고는 했다. 배터리가 방전된 기계가 그러하듯 갑작스레 잠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더 최악이었다. 어떤 예고 없이 불현 듯 잠에 빠져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언제는 길가에서 그냥 쓰러져서 일어나보니 지갑이 몽땅 털린 적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스타크가 경호원을 붙여주겠노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렇게라도 잠이 들지 않는다면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런 쪽잠들을 모두 헤아려봤자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이쯤 되자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리 없었다. 제 처지가 돈에 궁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동안 벌어둔 돈도 있었고 아마 집안에 자신의 재정 상태를 말한다면 평생을 먹고 살만한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집안에 알리는 것은 싫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나는 도심에 있던 작업실 겸 주거공간으로 쓰던 스튜디오를 팔고 도심 외곽의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 어차피 혼자쓰기에 차고도 넘치는 넓은 공간에 있는 것은 잠이 오기는커녕 몸마저 얼어붙을 것 같았다.

점점 사람이 찾아오는 것도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도 힘에 겨웠다. 뉴욕을 사랑했지만 대도시에는 수면을 방해하는 소음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사림이 없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나는 결코 뉴욕 근처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브룩클린의 작은 집을 찾아 정착했다.

이사 온 뒤로는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잠에 들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냈다. 집 크기를 줄인 대신 침대는 가장 좋은 것으로 샀다. 어차피 딱딱하든 푹신하든 어차피 쓸모도 없는 것이었지만 최고급 이불에 감싸 안긴 기분마저 양보하고 싶지는 않았다. 책도 읽을 수 없었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무기력한 우울함이 온몸을 감쌌다. 손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았다.


***


결국 내가 찾아낸 마지막 수단은 섹스였다다행이 이 방법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나는 매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섹스를 했다처음에는 여자를 불러들였고 이후에는 최소한의 전희와 반복해야하는 허리 짓조차 버거워져 남자를 불렀다은밀한 만남을 주선하는 곳에 전화하여 내 몸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억지로라도 나를 절정으로 이끌어줄 강인한 남자들을 지명했다. 콜걸들에게도 부탁할 수 있었지만 보통의 여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나를 들고 옮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남자를 사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아무렴 어떤가잠들 수만 있다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었다.

섹스는 간단했다. 전화를 한 뒤 문을 열어둔 채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노라면 어느새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내 몸을 짓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내 몸 위를 타고 오르는 남자에 의해 몸을 온전히 맡겼다그저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으면 남자는 알아서 몸의 흥분을 이끌어주었다. 강제적인 사정이 끝나고 졸음이 밀려올때 쯤, 탁자 위에 미리 올려 둔 지폐뭉치를 가리키면 여전히 얼굴도 모르는 남자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씻지도 않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사정 뒤 밀려오는 허무함과 자기혐오감에 휩싸여 괴로워했지만 결국엔 잠을 잘 수 있다면 아무것도 상관없었다그런 짓도 토니 스타크의 방문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섹스가 필요한 거면 나랑 하자나 잘해섹스.”

오랜시간동안 그의 가장 친한 친구로 알고 지냈지만 처음 보는 토니의 절박한 얼굴을 보며 나는 조금 웃었다그가 조금이라도 안심하길 바라면서.

바보 같긴내가 필요한 건 섹스가 아니라 잠이야.”

나는 전화부에 있던 번호들을 모두 지우고 다시 원래대로의 생활로 돌아갔다그리고 아주 가끔씩정말 가끔씩 잠을 자고 싶어 못 견딜 때면 토니에게 전화를 했다낮이든 밤이든 토니는 바로 달려와 주었고 덕분에 나는 가까스로 잠들 수 있었다.


***


 허니. 나 왔어.”

우리가 하는 것은 데이트가 아니니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스타크는 오늘도 장미꽃다발과 레드와인을 들고 와 내게 떠넘기듯 건넸다.

생긴 것만 고양이를 닮은 줄 알았더니. 고양이처럼 작은 상자 안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군.”

스타크는 전보다 작아진 집을 둘러보며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누가 백만장자 아니랄까봐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하고 소박한 집을 보며 작은 상자라는 둥 나를 놀릴 때면 나는 그가 들고 온 와인을 잔뜩 따른 잔을 들려줌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물론 작은 집을 놀리기보단 나를 고양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걸 알았지만 일부러 토니의 의중을 모르는 척 했다.


잘자, My Sleeping Beauty.”

스타크와의 섹스가 끝나고 나면 그는 엉망이 된 시트를 갈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꼼꼼하게 몸을 닦아주었다. 바로 잘 수 있도록 나를 위한 배려였다. 행위 중에도 그랬고 후에도 토니스타크는 제법 다정한 파트너였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의 말을 비꼬았다.

로맨틱한 키스가 아니라 여기저기 만지는 변태가 어디의 누구더라?”

토니 스타크는 좀처럼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나를 부를 때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며 놀렸는데 짐짓 야멸차게 쏘아도 스타크는 주눅 들지 않고 능글맞게 웃으며 이내 몸을 붙여왔다.

와우, 방금 너 스스로를 공주라고 시인한 거야? 천하의 로키 오딘슨이?”

나는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 토니를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이 말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을 안 토니는 낮게 웃다가 나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침대를 떠났다. 이렇게 장난스럽게 나의 나태함을 꾸짖으면서도 아침이면 갓 구운 크루아상과 싱싱한 제철 과일을 잔뜩 담은 쟁반을 침대까지 들고 왔다. 스타크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여자한테도 해준 적 없는서비스였지만 그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날이 갈수록 입으로 음식을 넘기는 것이 힘들어졌다. 깔깔한 목을 붙잡고 짜증스럽게 고개를 젓는 것으로 아침식사를 거절하면 스타크는 내 입안으로 포도 알 몇 개를 밀어 넣었다. 몽롱한 와중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우물거리면 스타크는 낄낄거리며 입가로 흘러내린 과일즙을 핥아주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잠드는 것은 힘들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괜찮은 생활이었다.

 

***

 

오늘도 잠을 자지 못했다. 세면대 위의 거울을 들여다보자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얼굴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눈 아래의 그늘이 더욱 짙게 내려앉았다. 창밖으로 희붐한 새벽빛이 밝아왔다. 스타크의 손목에서 작게 진동하는 알람을 보며 나는 스타크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이내 잠에서 깨어난 그가 눈을 감은 내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잔뜩 예민해진 청각이 그가 조심스럽게 출근을 준비하는 모든 행동을 알아차렸지만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오늘도 잠들지 못했다는 것을 토니에게 차마 알릴 수 없었다.

 

***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스타크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부족한 수면은 모든 것을 귀찮고 짜증나는 일로 받아들이게 했다. 허벅지 사이를 꼼꼼하게 닦아주는 손길이, 조심스럽게 내리누르는 입술의 감촉이 모두가 불만스럽게 느껴지고는 했다. 몸은 겹쳤지만 마음은 줄 수 없었다. 그것을 미안해하기에는 내가 너무 힘들었다. 스스로도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머리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정말, 이러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죽으면, 편하게 잘 수 있을까?”

? 죽으면그런 개소리 하지 마.”

무심코 내뱉은 말에 토니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그의 심각한 얼굴을 보며 나는 그만 말해야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파괴적인 욕구가 치솟았다. 정말 누구든 상처 입히고 싶었다. 그것이 나여도 좋았고 그여도 상관 없었다.

"벌써 삼 일째야! 한숨도 못잤어, 넌 내 맘을 몰라!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

진짜 죽여줘? 그렇게 스티브가 보고 싶은 거야?”

스티브. 그 이름이 토니의 입에서 나온 순간, 나는 결국 진실과 마주했다. 

스티브 로저스. 내 연인, 내 사랑. 나의 유일한 안식처.

사실은,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스티브의 죽음은 나에게서 잠을 앗아갔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이미 끝냈다. 지금의 나는 그저 잠을 자고 싶을 뿐이었다. 잠들고 싶었다. 세상과 단절된 채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롯이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나는 토니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 이름 말하지 마! 감히, 어떻게!”

아니, 몇 번이고 말해주지. 스티브 로저스는 죽었어! 그러니까, 너도 이제는! ”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토니를 향해 던졌다. 그러나 화낼 기력도 없어 금세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 집에서 나가.”

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떨리는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엉망이 된 얼굴을 토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 얼굴을 본다면 다시 돌아올테니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비틀린 우리 사이를 다시 돌릴 때라고 생각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다시는 토니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토니를 욕할 수 없었다. 그도 할 만큼 했다. 이건 명백히 내 잘못이었다

천천히 바닥을 더듬으며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푹신한 이불을 한가득 품안에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볕에 말려 따뜻하고 밝은 햇살의 냄새가 가슴 안에 가득 퍼져나갔다. 마치 스티브에게 안긴 기분이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이제 없었다. 그것을 깨닫는데 너무도 오랜 시간을 낭비했다. 이제야 비로소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 





>

듀공님ㅠㅠㅠㅠㅠ리퀘이옵니다.

완성은 오래 전에 했지만 차마 드리기에 민망한 글이라 이리저리 다듬다보니 벌써...(암전

쓰면서도 이런 글로도 괜찮은 건지;;; 뭔가 제 취향이 잔뜩 들어간데다 난해한 전개ㅇㅁㅜ)네요. 설명을 해보자면 연인이었던 스팁이 죽고 불면증에 시달린 로키랑 로키를 짝사랑(..)했던 오랜 친구인 토니가 로키의 불면증을 치료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메디컬물!(아님

허허허 여튼 듀공님이 기억하실지 모를정도로ㅠ너무 오래지났지만ㅠ 리퀘를 드, 드리오니 거절하지 마시고 재밌게(?)봐주시길!

+ 근데 이 정도는 15금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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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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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

[펜드럴로키] Neighbor

글/짧 2014. 11. 23. 13:37

Neighbor

 

누구에게나 가슴 떨리는 첫사랑은 있는 법이다


나의 첫사랑은 훌륭한 양아치였다. 양아치일 뿐 아니라 유명한 바람둥이였는데 얼마나 양아치인지 설명해주자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꼬마 시절부터 기호식품으로 과자와 사탕대신 담배와 술을 선택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남들이 야동을 보면서 딸딸이 칠 때 저보다 다섯 살은 많은 과외누나, 교회누나, 옆집누나들과 함께 실전경험을 하는 아주 되바라지고 까진 양아치였다. 그런데도 내가 왜 이 남자를 좋아하는지는 내 인생의 아직 풀리지 않는 세 가지 궁금증 중 하나였다. (혹시 궁금해 할 사람이 있을까 해서 말하는데 첫 번째는 토르가 내 형인 것이고 둘째는 맨델 제과점의 푸딩 레시피이다.)

내 첫사랑과 나의 형은 유치원에서 코 흘리던 때부터 지금까지 알아온 죽마고우(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알친구)로 자연스럽게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를 알아온 셈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의 사생활은 물론이거니와 연애사와 즐겨 하는 체위까지도 꿰고 있었는데 스토킹을 했다거나 그가 떠들고 다녔다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양아치긴 했어도 자신과 잠자리를 했던 여자들에 관해서 떠들고 다니는 타입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커튼을 치는 걸 잊고 다니는 조심성 없는 면을 갖추고 있던 것뿐이었다.

그와 나는 이웃사촌으로 우리 집 다락방에서 그의 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구조였는데 다락방에서 책 읽기를 즐겨하던 나는 종종 그가 낯선 여자와 낯 뜨거운 일을 벌이는 것을 목격하곤 했다. 정말이지 그건 무척 짜증나는 일이었고 평소의 나라면 그에게 창문을 닫고 다니라며 냉정하게 충고를 했을 텐데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그가 여자가 침대위에서 옷을 벗은 채로 키스하는 것을 목격한 밤, 내 몽정의 상대로 그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내가 게이란 것과 심지어 형의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었으니, 그의 무신경함이 한 청소년의 성정체성을 흔들어 놓은 셈이었다.

 

*

 

간만에 만난 그는 어른처럼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여전히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있었다. 나를 발견했는지 그가 깜짝 놀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슬쩍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는 주위의 여자들에게 귓속말을 하더니 깔깔거리는 그녀들과 헤어지고 나에게 다가왔다.

로키! 여기까진 웬일이야?”

나 대학 여기로 올까 하거든요. 학교 구경도 하고 겸사겸사 형 얼굴도 보고.”

? 너 공부 잘하지 않았어?”

법대가려고요. 집에서 나오려면 전액장학금도 받아야 해서.”

아 그랬구나. 변호사나 검사가 되고 싶은 거야? 너랑 어울린다. , 그는 뭐 그런 이야기랑 토르의 안부, 고향소식을 두서없이 물어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고 삐딱하게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수다스러운 질문이 멈추자 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 해지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매번 어른스러운 척, 여유롭기만 하던 얼굴이 당황하는 모습이 제법 웃겼다.

, 담배도 피울 줄 알아?”

이거 가르쳐 준 사람이 형이잖아요.”

어이없어 코웃음 치자 그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모습에 순간 가슴이 설렜다.

내가 그랬었나? 안 좋은 거 가르치고 되게 나쁜 놈이었네.”

그의 얼굴을 보니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건만 과거 일들은 모두 잊어버린 듯해서 괜한 심술이 났다.


어릴 때는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옳아보였고 뭔 짓을 해도 내 눈에는 멋지게만 보였다. 그는 못하는 게 없었으며 아는 것도 많았다. , 그것도 몇 년 안가서 환상이 깨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술을 처음 마셔본 것도, 담배를 펴본 것도.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모조리 그에게서 배웠다.

그는 매번, 안 돼! 라며 나를 단속하려는 형과는 달리 모든지 경험해봐야 는다며 내 편을 들어주고는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개새끼건만 그때는 왜 이리 멋있었던지. 그래도 덕분에 확실히 무엇이 내게 맞고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나에게 수음방법을 가르쳐 준 것도 그였으며 내첫 수음상대도 그였다. 어쩌다 우리 집에 둘만 남았던 날이었다. 야한 잡지를 형한테 빌려주러 왔던 그는 야한잡지를 조달하는 것을 부모님께 이르겠다고 하는 나에게 입막음의 댓가로 좋은 걸 알려주겠다며 수음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문제는 그가 보여주는 벌거벗은 여자의 몸뚱이가 나오는 사진보다 그가 나의 몸에 와 닿는 체온에, 흥분으로 살짝 붉어진 그의 얼굴 때문에 사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주제에 뭐? 그랬었나?

끊은 지 좀 됐는데 피우는 거 보니까 나도 땡긴다. 나도 한 대만 줄래?”

나는 끄덕이며 담배를 건네주었다. 그가 살짝 반색하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는 그가 즐겨 피우던 담배브랜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브랜드를 지금 내가 피우고 있으니까 잊을 수 없지.

담배를 입에 문 그가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적였는데 금연했다는 말이 진짠지 라이터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가까이 가져다대 그의 담배에 불을 옮겼다. 고개를 모로 돌려 다가가면서 모양새가 키스를 연상시킨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가까이 다가간 그에게서 여자들의 화장품 냄새와 함께 익숙한 향수냄새가 맡아졌다. 이 향수냄새. 그의 졸업식 때 내가 사준 향수의 향이었다. 무겁지 않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향기. 이 향을 맡자마자 그에게 정말 어울리는 향이라고 생각했다. 왜 아직도 이걸 쓰고 있는 거야. 약간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이 향수 쓰는구나.”

넌 아직도 우아하네.”

그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어린애취급을 했다. 나도 컸다구요, 따위의 유치한 말을 내뱉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졸업하는 날. 나는 그에게 그가 즐겨 쓰던 향수를 선물했다. 그때 그가 선택한 학교는 집에서 아주 먼 곳이었다. 그는 형이나 다른 친구들과도 떨어진 대학교로 진학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그를 언제나 옆집에서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나에게 충격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고백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아마 좋아하는 거 같아요. 아니, 좋아해요."

나는 얼굴도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에게 고백했다. 어차피 잘 보지도 못 할 텐데 차여도 그만이었다. 사실 잘 되면 장거리연애는 어렵다고 하는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고 걱정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아직 니가 어려서 착각하는 거 같아. 없던 일로 할 테니까 비밀로 하고 전처럼 잘 지내자."

시발. 진짜 어이가 없었다. 나를 어린애로 보는 건 여전했다. 차라리 취향이 아니라거나 남자가 싫다고 욕이라도 했다면 단념했을 텐데. 그래서 미련이 남아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나는 그 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을 보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

 

나는 형과 세살차이가 났는데 그 말은 나와 그의 나이차이가 세 살이라는 뜻이었다. 3년이란 차이가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굉장히 짜증나는 었다. 어차피 늙으면 거기서 거기일 텐데(예순 세 살이나 예순 살이나 다 할아버지.) 내가 한참 유치원을 다닐 때 그들은 초등학교에 다닌다며 놀아주지 않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더니 머리가 컸다고 뻐겼으며 중학생이 되자 그들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특히나 내가 한참 스쿨버스를 타고 다닐 때 면허를 딴 그들은, 중고였지만 빨간 스포츠카(토르는 이 차에 묠니르라는 애칭까지 붙였다.)를 타고 지나가는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나이 차이에 화딱지가 나곤 했다.

매번 이런 식었기에 나는 그가 졸업하는 것이 가장 걱정이 되었다. 학교에서 보지 못하는 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옆집에 사는데, 어떻게든 보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다만 안 그래도 나를 어린애처럼 보는 그가 졸업을 해서 성인이 되면, 미성년자일 나를 어떻게 취급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좁아지지 않은 격차로 인해 나는 조바심이 났다. 가장 열 받는 일은 어쩌면 그가 영원히 나를 어린애로 볼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정말이지, 지가 나를 낳았어? 아님 키웠어? 이런 말을 하면 제 손으로 기저귀를 갈아줬다고 말하겠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애들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주제에 나를 키웠다니. 나는 언젠가는 자기한테 효도하라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그의 엉덩이를 힘껏 차주겠다고 마음먹었다.

 

*

 

"오늘 어디서 잘 거야?"

"형 집에서 재워주면 안 돼요? 예전처럼 노는 것도 그립고."

그가 피식하고 웃었다.

"언제부터 나랑 놀고 싶어 했다고."

맞는 말이었다. 어릴 적에는 그들이 나와 같이 놀아주기를 원했는데 조금 커서는 나를 내버려두었으면 했다. 그들은 부모님이 자주 자리를 비우는 우리 집을 제 아지트마냥 여기고 놀러왔는데 가끔씩 피자를 시켜서 위조 신분증으로 사온 맥주를 마시곤 했다. 나는 형과 그 친구들이 놀러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모님한테 혼나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었고 천성적으로 떠들면서 시끄럽게 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모이면 경찰이 들이닥치지 않는 게 용할 정도로 시끌벅적했기 때문이었다. 형은 무심했기에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하고 매번 나를 끌고 가 무리와 어울리기를 강요했는데 억지로 그들과 놀다가도 끝에는 도망치듯 내 방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래도 가끔씩, 그가 내 방문을 두드리고는 들어와 나를 다시 불렀는데 그럴 때면 나는 못 이기는 척 다시 그의 손에 이끌려 나왔다.

나는 형의 친구들 중 그가 나를 불렀다는 것에 대해 설렜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호건은 형의 친구치고는 똑똑하고 상냥한 편이었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고 나 또한 물론 그랬기에 친해질 일은 없었고 볼스테그는 어떤 면에서는 토르보다 더 단순하고 무신경했기에 나를 돌보는 몫이 자연히 그에게 돌아간 것은 당연했다. 나는 그가 내 형이었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농담처럼 자신들과 인기 있는 남자들과 어울리는 걸 영광으로 알라며 웃었으나 사실 나는 토르나 그 무리들이 학교에서 인기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집에 와서는 매일같이 팬티바람으로 소파에 누워 유치한 텔레비전 쇼를 쳐다보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노라면 부러워하는 반 아이들에게 우리 형, 니네가 좀 가지고 가라.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다만 그들이 운동경기에 나갈 때만큼은 예외였는데 토르와 그를 포함 네 사람은 모두 미식축구팀의 주전이었다. 토르는 쿼터백, 호건은 윙맨, 볼스테그는 센터, 그는 리시버로 활약을 했는데 어릴 적에는 그들이 내심 자랑스러웠으나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토르의 동생이란 이유로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며 내가 형보다 못하며, 심지어 공부벌레라는 것에 실망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때문에 나는 점점 커가면서 형과 그 친구들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들 무리에 내 자신이 가려지는 것에 불만을 가졌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형뿐만 아니라 그까지도 피해 다녔는데 내 심정을 눈치 채지 못 했던 형과는 달리, 그는 집근처에서 마주 치면 언제 서먹했냐는 듯 다가와서 내게 다가와서 시답잖은 말 한마디를 걸고 가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언제부턴가 집에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그럴 때면 나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내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아마 그때도 어렴풋이 그의 여자친구에게 질투를 했던 것 같았다. 그런 다음날이면 그가 내게 다가와 슬쩍 공주님, 어제는 왜 안보였어?” 라고 놀리면 최대한 쌀쌀맞은 태도로 여자 향수냄새가 역겨웠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는 여자들에게 잘 먹히던 미소로 여자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돼, 여자는 마음이 여려서 상처받아.” 라며 충고 아닌 충고를 했는데 그러면 나도 상처받는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래도 몇 번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부터 그가 여자를 우리 집에 데리고 오는 일이 없었다. 그건 아마도 나를 신경을 써준 거라기보다는 형과 그 친구들이 노는데 여자가 끼면 재미없다고 불평했기 때문일 것인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

 

"짐은 이게 다야?"

"조금 있다가 이 쪽으로 이삿짐센터 오기로 했어요."

약간 당황한 얼굴이 된 그는 내게 농담하지 말라며 내 집네 둘이 살만한 공간은 없다고 속사포로 내뱉었다.

"무슨 착각하는 거예요. 나도 나 차버린 사람하고 같이 살 생각은 없어요."

그의 몸이 움찔하고 튀어오르는 게 다 보였다. 오늘 하루 동안 그에게서 볼 수 없던 모습을 다 보는 것 같아 즐거웠다. 나는 그의 반응을 즐기며 천천히 말했다.

"옆집으로 이사 오는 거예요. 예전처럼 이웃사촌해요."

싱글거리며 웃는데 갑자기 벽으로 밀쳐졌다. 맞는다고 생각한 순간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연인과의 키스라고 하기엔 너무 조심스럽고 친구동생과의 키스라고 하기엔 너무 뜨거운 키스였다.

", 너 말이야. 내가 어떤 마음으로 떠났는데. 너 진짜...왜 날 이렇게 힘들게 해."

언제나 여유롭게 웃기만 하던 그가 나를 보며 잔뜩 괴로운 얼굴을 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다가 그의 엉덩이를 힘껏 차주었다. 악하고 소리 지르는 그의 목을 끌어당겨다가 깊게, 평생 동안 하지 못한 만큼 몫의 키스를 해주었다. 정말이지, 이런 한심한 남자에게 반하다니.

"언제부터였어?"

"처음 봤을 때부터?"

"..형 수법 다 아니까 솔직하게 말해."

그는 억울하다는 듯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부모님에게 나를 자기 동생으로 달라고 졸랐다고 했다. 그의 계획은 토르로 인해 깨졌지만 형이될 수없다면 평생 옆에서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고백한 순간 덜컥 겁이 났다고 했다.

"니가 착각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너한테 성적인 걸 보여줬으니까 헷갈리고 있는 게 아닐까. 널 속이고 있는 게 아닐까 했어."

그게 다 계획이었구나! 정말 덫에 걸린 느낌이 들어 나는 다시 한 번 더 세게 그의 엉덩이를 걷어 차주었다.

"..그만해! 진짜 아프다구! 그럼 넌 내 어디가 좋았던 건데?"

내가 그에게 반한 계기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어릴 때의 일로 나는 그날따라 형의 배려심 없고 무심한데에 질려있었다. 십 수년을 같이 산 주제에 내가 토마토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을 모르고 내게 자기가 만들었다며 토마토 스파게티를 억지로 먹였다. 자주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날은 왠지 나도 모르게 서러워져서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에 못 이겨서 소리치고 발을 구르면서 난리를 치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두드러기가 나서 엉망이 된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토르나 그 친구들이 알게 되었다간 분명히 놀림만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를 구해준 게 그였다. 언제나처럼 내 방에 들어와 나를 달래주려다가 내 꼴을 보더니 놀리기는커녕 아무도 모르게 약을 사가지고 와서 주었다. 덕분에 토르는 내가 직접 토마토 알레르기가 있다고 말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어쩌면 그때부터 내가 그를 좋아한 걸지도 몰랐다. 나는 알고 있었다. 금발의 미남이란 이유로 가볍게 보일 때도 있지만 실상은 굉장히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겉보기에는 양아치에 바람둥이긴 해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그러나 내가 그 이유를 말하는 날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건 그동안 나를 힘들게 한 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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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특으로 썼던 펜드럴로키. 

헤헤헤. 얘네들은 이런 낯간지러움이 좋아,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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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탕을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칠 거야." 

  까만머리의 소년이 내게 말했다. 오늘이 할로윈이라는 걸 알리는 듯 간신히 구색 맞춘 초록색 망토 를 걸친(그러고보니 녹색 망토을 걸친 영웅이 있던가.) 소년을 한번 봤다가 우리집 현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앞뜰과 현관, 지붕까지 그 흔한 호박이나 꼬마전구 하나 없는 우리집으로 찾아온 예상치 못한 꼬마손님 앞에서 나는 피자배달부인줄 알고 내민 10달러를 든 손을 감추고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음, 꼬마야. 집을 잘못 찾아온 거 같은데? 미안하지만 우리집에는 사탕같은 거 없어."

  그 한마디에 뭐가 그리 놀란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던 소년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바보같아! 오늘은 사탕을 주는 날이잖아!"

  "우리집은 할로윈을 안 챙기는데. 봐봐, 집 앞에 아무 것도 없고 아무도 안 오지? 차라리 다른 집을 가보지 그래?"

  "...다른 집은 이미 다른 유령들이 너무 많아. 이 집이 제일 조용했단 말야."

  내게 보인 당돌한 언행과는 달리 수줍음이 많은 소년인 것 같았다. 하긴, 이 시간이면 이미 거리는 이런저런 복장을 한 아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거다. 아마 다른 애들한테 차례를 뺏겼을지 모르지. 그러고보니 애 부모는 어딨는거야? 설마 이 시간에 혼자서 돌아다니게 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줄 수 있는게 없는걸. 이제 가봐."

  "칫, 그러면...장난을 칠 수밖에 없지." 

  장난을 치겠다며 패기롭게 외치는 꼬마의 모습이 조금은 귀여운 것 같기도 해서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어떤 장난을 칠 건데?"

  "벌거벗은 임금님 책 본적 있어?"

  소년이 눈을 한번 깜빡이자 순식간에 까만 머리위에 황금색 투구가 씌여지고 소년의 등 뒤에 걸쳐있던 녹색망토 사이로 소년의 키 만한 커다랗고 날카로운 무기가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비현실에 나는 황망해져서 소리조차 지르지도 못했다. 다만 소년의 녹색 눈동자가 무척이나 장난스럽게 반짝이고 있다는 것만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줄게."

  그리고 저 소년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해낼 힘도 있고 그럴 의향도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안 돼! 이러다가 정말로 애들이 득실득실한 동네 한복판에서 벌거벗고 돌아다닌다면 정말이지 동네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면서 주머니를 뒤적였다. 지폐와 동전 몇개, 열쇠꾸러미와 영수증. 그 흔한 껌 하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할 때 그제야 부시럭, 하고 뭔가 손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병원에 갔다가 엉겁결에 받아 온 사탕이 주머니에 하나 있다는 게 기억이 났다. 나는 약간 절박한 심정으로 사탕을 꺼내 소년에게 들이밀었다. 소년은 손바닥 위에 있는 사탕 쪽으로 고개를 숙여 이리저리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닥 마음에 안드는 지 팔짱을 낀 채 곰곰히 생각하던 소년이 낼름 내게서 사탕을 뺏어갔다.

  "계피라....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이걸로 참아주지. 내년에는 좀 더 달콤한 걸 준비해놓라고!"

  어느새 위협적인 복장은 사라지고 처음처럼 녹색 망토 하나만 걸친 검은머리의 소년이 거리로 뛰어나가며 외쳤다. 

  "Trick or T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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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배너와 진짜 유령이었던...꼬마로키였는데 왠지 배너같지 않아서 좌절. 

여튼, Trick or Treat! 만우절과 할로윈만큼 로키와 어울리는 날도 없지!! 

여러분! 연성 안 주면 장난 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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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스팁로키 / 19세 미만 구독금지 / A5 / 40P 


↓ 표지 


 표지는 가지님께서 수고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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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

확신컨대 내 머리를 검사해보면 정신병이 있을 것이다. 몸은 무척이나 건강했지만 머리는 항상 맛이 가 있었다. 상대방이 내 결점을 눈치 채기 전에 타고난 멋진 웃음으로 가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이 점에 있어 멋진 외모를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했다.)내 병명은 아마도 애정결핍일 테다. 남들이 듣는다면 섹스중독 이라고 정정해줄지 모르겠지만 내가 섹스를 좋아하는 것은 모두 애정을 원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체온을 원했기에 내게 다가오는 여자들을 거절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상냥했고 부드럽고 향긋한 살결과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형제들은 모두 훌륭한 직업을 가진 어른으로 자랐다. 나를 제외하자면 액자에 걸어놓아도 좋을 만큼 화목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나만이 미운오리새끼처럼 따로 떨어져 삶을 낭비하고 방황했다. 나의 학창시절은 굉장히 소모적이고 지루했다.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빌어먹게도 산만한 아이였고 부모님의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정규교육을 간신히 마친 나는 할릴없이 시간만 죽이다 겨우 지금에서야 적성에 맞은 일을 찾은 것이다. 그 일이 바로 레이싱 이었다. 정상적인 일이라고 하기에는 삶에서 가장 멀고 죽음과 가장 가까운 일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제일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 이 따위인것을. 게다가 잘만 하면 술과 여자와 돈을 엄청나게 받을 수 있으니까 일석이조였다. 물론 그 무엇보다 트랙을 달리다보면 머신이 나를 안아주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기계 혹은 괴물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죽음으로 돌진하는 나에게 있어 머신이야말로 유일한 동반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친구>
레이싱을 하고 부터는 슬슬 주위 눈치도 볼 줄 알게 되어서(이 말을 하면 코웃음칠 지 몰라도)친구들이라고 어느정도 말할 수 있는 관계들이 생겼다. 제멋대로에 예민하기 짝이 없는 나를 받아주는 그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물론 지금까지도 유일한 친구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앵무새 한쌍 뿐이었다. 안어울릴지 몰라도 나는 어릴 적부터 작은 동물에 무척 약했다. 특히나 그 작은 앵무새를 한 손에 쥐고 멀리 날아 도망가지 못하도록 잘라버린 뭉툭한 날개죽지를 슬며시 쓸어보며 나는 이런 아름답고 자유로운 영혼이 철창 속에 묶여있음을 애도했고 그렇게 만든 스스로에게 못내 뿌듯함을 느끼고는 했다.

<고민>
최근,그 추악하지만 끝내 지고 가야할 내 성정을 동하게 하는 이가 내 눈앞에 있음을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르는 채로 서있었다. 나는 뱃속 깊숙이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니키 라우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가볍게 몸을 떨던 작은 동물은 몸부림치며 나에게서 달아났지만 처음에는 놓아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뒷모습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그를 낚아채 그 자유로움을 뺏어갈 수 있을까. 그것이 나의 요즘의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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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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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니키] runner

글/짧 2014. 3. 26. 01:48
나에게 삶은 도피였다. 집안의 기대에서, '라우다'라는 이름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트랙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레이싱에 뛰어든 이유는 단 두 가지였다. 첫째, '사업가'와 대척점에 있을 것. 둘째, '사업가' 만큼 돈을 벌 수 있을 것. 그것들만이 이 미친세계로 뛰어든 이유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이유들은 나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열정이나 호승심따위에 흔들려 승리를 눈 앞에서 놓치는 멍청한 놈들과 달리 나는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포인트를 땄고 그것은 스폰서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었다. 손상되지 않는 차. 승리를 따오는 레이서. 페라리에서 날 놓치 않는 것은 당연했다. 가끔씩 나에게 스타성이 없다고 하는 무례한 놈들도 있었지만 나에겐 그런 불만쯤은 흘려들을 수 있는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 헌트 처럼' 이란 소리가 나오면 얘기가 달라졌다.
"제임스 헌트처럼 기자회견장에서 쇼맨쉽을 보여주라고!"
그런 어이없는 말을 내뱉은 매니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공기에 매니저는 자신의 실언에 대하여 사과를 해왔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받아들이는 걸로 일은 일단락 되었지만 사실 나는 전혀 괜찮지 못했다. 
"제임스 헌트."
이빨 사이로 그의 이름을 짓이기듯 뇌까렸다. 공공연히 나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애송이(나보다 먼저 데뷔했지만 F1은 내가 선배다. 나이는 내 알바 아니었다.)나와 마주칠때면 나를 향해 little rat 이라며 우스꽝스럽게 구는 것이며(머신을 타기에 작은 게 더 유리했다. ASSHOLE!) 그는 나의 신경을 자꾸 건드렸고 평정심을 깨트렸다. 이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평정심과 절제가 사라진 트랙에는 광기와 무모함만이 남는다. 이성을 잃고 판단을 잘못하면 한순간에 목숨이 날라가는 것이 트랙이었다. 생존확률과 우승확률은 반비례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돈벌이에서 20퍼센트의 확률이면 목숨의 댓가로 충분했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멍청하기 트랙위에서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헌트와의 만남이 있는 날이면 쉽사리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냉정해지자고 몇번이나 자신을 타일렀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라이벌의식때문인가. 나에게도 그런 유치하고 뜨거운 감정이 남아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해보지만 그런 순수한 감정과는 조금 다른. 기묘한 구석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트랙 위를 돌다가도 돌연 뒷덜미가 선뜩해지는 때가 종종 있다. 백미러에는 익숙해진 멕라렌의 마크가 나를 당장이라도 집어삼킬듯 점차 크기를 더했다. 그럴때마다 그 위협에 벗어나고 싶어 엑셀을 더욱 세게 밟았다. 나는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포에 질려 달리는 셈이었다. 굴욕적이었지만 제임스 헌트는 자신의 이름마냥 사냥꾼처럼 나를 쫓아왔다. 서킷을 달리고 있다보면 그를 아예 내칠 수 없었다. 간발의 차이는 나에게 승리를 안겨주는데 부족함이 없었으나 마치 사냥꾼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냥감마냥 나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게 만들긴 충분했다. 
게다가 트랙 위에서 뿐만 아니라 점점 제임스 헌트를 만나는 일이 잦아지니 집중이 되지 않았다.
"헤이, 리틀 랫."
역시나 오늘도 웃는 낯짝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들어오는 제임스 헌터와 마주쳤다. 젠장. 어떻게든 태연한척 지나가려고 했지만 결국 헌터가 몇 걸음 앞에 오자 본능처럼 등을 돌렸다. 
"Hey! 또 도망치는 거야?"
또. 라는 말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겁쟁이라고 여겨지는 게 분명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천천히 헌트를 향해 돌아섰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도망치는 거 아냐."
발음을 또박또박 눌러가며 아니라고 말해보지만 이 무례한 영국남자는 독일억양이 잔뜩 묻은 내 말을 못알아듣겠다며 speak in English 라고 능청스럽게 말한다. 그러는 지는 외국어 할 줄 하는 것 하나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무례한 섬나라 놈들.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자 헌트가 배를 잡고 크게 웃어댔다. fuck.fuck.fuck! 상종할 가치가 없는 놈이었다. 등을 돌린 순간 손목을 휘감는 억센 손길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도망가도 끝까지 쫓아가 잡아먹어줄테니 기대하라고."
그의 선전포고에 결국 나는 언제나와 같이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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